A. 영원성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하나님을 영원하신 존재로 이해해 왔다(롬 16:26). 하나님의 존재의 성질인 영원성은 하나님과 시간의 관계를 다루는 주제이다. 영원성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와 성경적인 이해 사이에 심각하고 결정적인 불일치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지지하는 영원성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는 헬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이해는 영원과 시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영원성에는 시간 및 시간과 관련된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성이란 하나님의 존재가 총체적으로, 철두철미하게 시간적인 것이나 역사적인 어떤 것에는 전혀 적합하지도 관련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결과적으로 이런 사상은 하나님의 본질과 행위에 관한 고전적인(전통적인) 개념 전체에 스며들어 그것을 좌우하고 있다. (141.1)
 그러나 이런 영원성의 개념을 성경에서 살펴보면 드러나는 첫 번째 국면은 일반적으로 “영원”(eternity)이라고 번역된 단어들에 분명하게 시간적 의미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구약의 히브리어 올람과 신약의 헬라어 아이온은 기본적으로 “긴 시간”을 의미하며, 따라서 시간의 제한된 또는 제한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이렇게 영원성을 시간적인 양태로 보는 것은 성경이 우리가 유한한 존재로서 경험하는 창조된 시간과 영원성을 동일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영원성이 우리의 시간과 이질적인 것이 아님을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시간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을 통합하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참조 II. B). 예컨대, 우리는 시간을 우리의 덧없음의 척도로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을 그런 덧없음 없이 경험하는 것이다(시 103:15-17; 욥 36:26). (141.2)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고전적인 그리스도교 전통과 달리,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성의 시간적 및 역사적 양태가 그분의 불변성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본다(시 102:24-27; 히 1:10-12). 바울은 “창세 전에” 구원의 계획이 세워졌다고 말한다(엡 1:4). “전에”라는 말은 창조 이전 시간을 내비친다. 구원의 계획이 “영원부터(for ages)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다(엡 3:9)고 말하는 바울의 진술은 영원한 과거를 하나님의 영원성의 특징만큼 시간과 결부된 것으로 가리킨다. 우리의 유한한 세계와 그 거민이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시간에는 시작이 생겼다(참조 고전 2:7). 창조주는 그분의 존재 및 시간과 역사에 대한 그분의 경험에 있어서 그런 한계를 초월한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최고 이성이나 상상의 노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제한적으로 그리고 유한하게 공유한다. 하나님의 시간을 정의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꿰뚫어 보고자 하는 사변적인 시도임이 분명하다. 바로 여기서 침묵이 웅변이 되는 것이다. (141.3)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사실 곧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였다(참조 III. B). 하나님은 인간 역사의 수준 안에서 인간과 인격적으로,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그분과 인간 존재들이 함께 동일한 역사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역동적이고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삶과 역사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창조된 우리의 역사 영역을 포함하는 동시에 완전히 초월한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과 그분 사이의 직접적이고 역사적인 소통을 막고 있는 거리란 무시간적이고 불변하는 하나님과 역사 안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지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창 3:22-24; 사 59:2). (141.4)
 B. 불변성
 불변성은 하나님의 존재의 또 다른 특성으로, 수세기에 걸쳐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왔다. 불변성은 하나님 안에는 변동이 없음을 가리킨다. 성경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고천명한다(말 3:6; 약 1:17).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통적인 신학은 이런 불변성을 무감정(impassibility) 동일시하였다. 이런 동일시는 영원성에 대한 무시간적 이해에서 비롯되었다(참조 III. A). 이렇게 불변성을 무감정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성이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의 내적인 생명에서 관계와 감정과 새로운 경험 및 변화를 완전히 배제한 요지부동의 삶을 지닌 분이 된다. 다시 말해, 불변성은 하나님의 삶이 인간의 경험 및 역사와 관련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하곤 한다. 이런 개념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에 대한 역사적 이해(참조 대쟁투 II-V)나 그리스도의 실제적 및 역사적 성육신(참조 그리스도 I. A. 2)에도 전혀 적합하지 않다. 고전적인 신학은 이렇게 가르침으로 불변성에 관한 성경적 개념을 완전히 무시한 채 헬라 철학을 따라 왔다. (142.1)
 다른 한편, 성경에는 “불변성”(immutability)을 표현하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성경의 이해(참조 III. A)에 따르면, 그분의 새롭게 하심(사 43:19; 렘 31:31; 계 21:5), 감정(출 34:14; 민 11:33; 신 4:23; 6:15), 관계(레 26:12; 슥 13:9; 계 21:3), 심지어는 그분의 돌이킴(출 32:14; 렘 18:8; 42:10) 등과 같은 역동적인 변화를 포함하는 그분의 삶에 관한 개념과 그분의 완전성이 양립할수 있음을 말한다. 요나의 전도에 대한 니느웨 사람들의 적극적인 반응 때문에(욘 3:10) 그들을 파멸하려는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성경의 하나님을 무감정한 분으로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신다는 것은 인간 존재를 위한 그분의 전반적인 목적을 변개한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그 마음을 바꾸는 것에 반응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뿐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의 요소가 아니라, 그분의 역동적인 삶과 관련되어 그분의 마음을 바꾸시는 것을 내비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또한 그분은 덜 완전한 존재에서 더 완전한 존재로 변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시 101:26, 27; 히 13:8). (142.2)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에 따르면, 전통적 신학이 하나님의 삶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역동적인 변화가 하나님의 삶과 행동의 완전한 본질에서 중심적 역할을 띤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창조된 시간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롭고 실재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을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존재의 구조를 변경하거나 발전시키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삶 안에서 실제로 역사적인 활동을 하는 것과 관련된다(빌 2:6-8). (142.3)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이란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그분의 역사적인 활동에 나타나는 “신실하심” 곧 항구여일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의 완전성을 침해하거나 더 저등한 수준의 존재에서 더 높은 수준의 존재로의 내적인 발전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역사에서 일들을 이루고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도 하신다(렘 18:8; 42:10; 욘 3:9, 10). 이와 함께 그분의 영원한 신실성(시 105:5; 117:2)은 그분이 절대 자기의 마음을 바꾸시지 않는다기 보다는 그분의 계획(사 25:1), 맹세(히 7:21), 보상(사 61:8)과 보호(시 91:14)의 약속, 인간의 선택에 따른 징계(시 119:75)를 언제나 이루신다는 점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신실성은 하나님을 인간과 구분해 주는 거룩한 특징이다(민 23:19; 삼상 15:29). 하나님의 불변성을 요지부동과 무감정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에 대한그분의 관계와 목적과 행동이 역사적으로 신실하고 항구여일함을 영원히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불변성은 성경 전체에 제시된 표상학, 성육신, 십자가, 하나님과 사탄 간의 대쟁투 같은 신학적 개념에 필요한 전제가 된다. (142.4)
 C. 사랑과 진노
 다양한 방법으로 예정(IV. B), 창(IV. C), 일반 계시(I. B), 역사적인 임재(IV. D), 섭리(IV. E)는 하나님을 그 본질이 사랑이신(요일 4:8) 관계적 존재로 드러낸다. 바로 이 때문에 그분의 진노는 그분의 본성에 이질적인 것이다(참조 사 28:21).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측면이 모두 모순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훼로라 야훼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143.1)
 1. 하나님의 사랑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다(요일 4:8, 16).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고후 13:11)과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고후 13:14; 참조 엡 2:4)을 드러낸다. 아버지(요일 3:1)와 아들(엡 3:19)과 성령(롬 15:30)은 우주를 창조하고 그것과 소통하는 행위에서 뿐 아니라, 놀랍도록 지혜롭고 심오한 구원의 계획을 고안하고 시행함으로써 그들의 내적인 사랑의 본질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인간의 관념이나 경험에서 유추해 낼 수 없다 사랑의 의미는 직접적인 계시 행위를 통해 하나님만이 정의할 수 있다. 사랑이란 관계적 실재이다 요한은 사랑의 관계적 본질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143.2)
 그러나 사랑의 관계적 구조가 내비치는 것 그 이상이 하나님의 사랑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따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났고(딛 3:4)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셨을때(살후 2:16)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가장 놀랍고 상상도 못할 나타남을 보았다(롬 8:39; 요일 4:10; 롬 5:8).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뿐 아니라(IV. C) 구속의 토대를 이룬다.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실상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 곧 비천하고 멸시받고 무가치한 사람을 위한 자기 부정과 희생의 행위임을 드러낸다.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포기하고(요 3:16; 롬 8:32; 참조 고후 5:21), 동시에 아들이 자신을 포기한 것(갈 2:20; 엡 5:2; 히 9:14)을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로 묘사한다. 바울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아들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런 근거로 그리스도의 확실한 사랑은 지식을 초월한다(엡 3:19)고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의 원천(요일 4:7)이자 모본(고전 13장)이다. (143.3)
 2. 하나님의 진노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죄인에 대한 진노를 경험하고 그것을 실행하고 영원한 불로 그들을 멸한다는 것은 그분의 본성에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사 28:21).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과 모순되거나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그분의 목적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간명한 진술로 공식화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는 것이다(창 3:15). 하나님은 사랑이고 그분의 명시적인 목적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그분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이 집요한 죄(신 9:7; 대하 36:16; 렘 7:20-34; 32:31-33; 호 12:14; 롬 2:5; 골 3:5, 6)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로 베풀어진 구원(요 3:36; 히 6:4-6)을 고집스럽게 거절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유발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 참조 왕상 8:46-51). 하나님의 진노는 회개(왕상 8:46-51; 욜 2:12-14), 고백(단 9:16-19), 변상(레 5:16; 민 5:7, 8), 중재(출 32:9-14)를 통해 피할수 있다. (143.4)
 요컨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모든 이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뜻(그분의 율법)과 용서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죄인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그분의 사랑어린 구원의 선물을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거부하고 완고하게 하나님을 반대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나훔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을 대적하는 자에게 어떻게 표출되는지 설명한다. “야훼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야훼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나 1:2). 구원의 역사가 이뤄지는 동안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이따끔 그리고 부분적으로 표출되었다(애 2:1-3;참조 행 17:30).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날에 종말론적인 절정에 달할 것이다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것이”다(말 4:1;참조 계 14:10, 19; 19:15-21; 심판 II, E; III. B.3). (144.1)
 D. 초월성
 초월성은 그것을 표현하는 특정한 단어 없이 성경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신학적인 개념이다 초월성은 기본적으로 “독립”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연구에서 그분이 우주와의 관계로부터 독립된 것을 가리킨다. (1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