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3 부 바울과 안식일 제 2장 골로새서 2장 16절의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바울에 의하면 결혼도 아담의 때로부터 그리스도와 그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특별한 관계에 대한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 “동산”(요 19:41)에서 자신의 옆구리를 열었을 때(요한복음 19장 34절창세기 2장 21-24절을 비교하라) 첫째 신부 하와의 창조가 뜻하는 상징성은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인간의 결혼제도가 철폐된 것이 아니다(엡 5:28-33). (316.3)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안식일이 철폐되었다고 꼭 집어 말하지도 않았다. 누구든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울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먹고 마시는 일 자체를 철폐시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바울은 누구도 먹고 마시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바울은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거론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금욕주의적인 금식을 이야기했던 것이다(2:20-23). 안식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제의적 신앙으로서의 안식일 준수나 천사 숭배와 관련된 안식일 준수를 비판했던 것이다. (317.1)
 바울은 연례적인 성일과 월별적인 성일과 주례적인 성일들을 논란했으나 성일이나 절기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았다. 그가 여기서 문제 삼은 것은 거룩한 절기의 준수를 자기 차별화의 표시로 삼으려고 하고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잘못된 동기였다. 사실상 바울이 공격한 것은 나쁜 종교 자체였다. 골로새서 2장 16절“폄론치 못하게 하라”의 희랍어 동사 “크리노”“명하다, 재판하다, 결정하다”이다. RSV(영어 개역 표준 성경)에서는 “판결하다”로 번역했다. 18절도 비슷한 권고로 시작한다. “누구든지 . . .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20-21절에서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살라”는 골로새 이단들의 교훈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식의 이러한 교훈들은 “육체를 쫓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고” 대신에 그들의 금욕적인 엄격함에 있어서 지혜를 나타내 보일 뿐이다. 바울은 “인간적인 가르침과 교훈”일 뿐인 이 금욕적인 규칙들을 경고하고 있다(23절). (317.2)
 TE.V(Todays English Version)에서는 16, 20, 22, 23절에서 모두 “다스리다”란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골로새서 2장 16절의 문제는 예배와 음식 습관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사람의 제도와 규정들을 제정하여 신자들을 독재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칙에 맹종하기로 거부했던 것과 같은 정신의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 문제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마 12장). (318.1)
 골로새서 2장 16절의 문맥은 2장 11절로부터 3장 11절까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부분을 요약하면 “너희는 너희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로써 너희는 죄와 율법과 문화와 모든 민족적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심지어는 (다른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악한 정사들과 권능들도 너희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자유를 즐기고 그 어떤 인간적 전통과 규칙들이 너희 생활 방식과 예배 방식을 재단하거나 독재하지 못하도록 하라. 심지어는 전형적인(예표적인) 이스라엘 예배의 가장 높은 요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제는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할례당이나 무할례당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골로새서 3장 11절; 2장 11절 이하의 전체 구절과 에베소서 2장 1절 이후를 비교할 것)는 것이다.” (318.2)
 골로새서 이야기 전체의 열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모든 담을 헐어버린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권능에 대한 강조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부채의 멍에를 취소시키고, 동시에 십자가는 유대 민족과 세계의 다른 민족을 갈라놓은 유대교의 제의적 요소들을 철폐시켰다는 것이다. (318.3)
 골로새서의 쌍둥이 서신이라 할 수 있는 에베소서(같은 때에 같은 저자가 같은 장소에서 썼다)가 선언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가 되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만 화평을 이룬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이룩한 놀라운 평화의 성취 위에 확고히 서야 한다. 때문에 인간적인 이단들이 개인적인 단련을 위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의적 규칙이나 금식의 규칙에 얽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러한 규칙들을 통하여 이단적인 인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319.1)
 표면상으로는 천사 숭배 같은 제의적인 경건이 사람들에게 겸손의 연습 같이 보이지만 사실상은 거짓된 겸손이다(골 2:23). 그것들은 육체적 교만의 열매이다. 그들은 자신이 마치 천사적 권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듯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과 행위는 우리가 영적 건강과 성장을 위해 마땅히 의존해야 할 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고 갈라놓는 담벽과 같은 것으로서의 율법은 십자가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도덕적 율법은 그 의무가 독립적인 것이고 또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존중되는 것이다(롬 2:14). 그리스도는 율법의 분리 기능을 폐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자체는 폐하지 않았다. 골로새서 2장 14절 이하와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는 유대 율법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그 성취는 그 율법의 도덕적 요구와 그 처벌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율법의 독립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법적 성격은 전혀 손상됨이 없이 보존되었다. (319.2)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6절은 제의와 규칙의 짐을 지우고 있는 유대교적 안식일의 성취를 말하고 있을 뿐 에덴에서 출발된 근원적인 안식일은 전혀 다치고 있지 않다. 유대교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세세한 규칙들 중의 어느 것 하나도 그리스도교 시대에 와서 그 구속력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시대보다도 훨씬 앞서 에덴에서 출발한 십계명의 도덕적 원칙들만은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위해 그 대속적인 안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319.3)
 그리스도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안식일에 대해 유대교의 자세한 규칙들의 어느 하나도 지지하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 에덴에서 제정된 안식일의 근원적이고 폭넓은 원칙과 정신을 강조했다(마 12, 막 2). 그렇다면 바울이 왜 안식일을 그림자라 하였는가. 바울은 그 시대의 종교적 특징이 되고 있었던 희생적 제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5장 25-32절에서 결혼에 대하여 바울이 주장한 것 이상으로 바울의 골로새서에서 안식일에 대해 해로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320.1)
 에덴의 안식일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림자가 아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명령이다. 첫째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마지막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와 종말 사이의 만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320.2)
 그런데 골로새서 2장 17절“장래 일의 그림자”(ακὶα των μελλόυτων)라는 표현을 거짓 주장자들(errorists)의 상투적인 말로 볼 수도 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다” 했을 때 “이것들”이란 바로 16절에 있는 “먹고 마시는 일”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18절“겸손”의 특징인 21절“맛보지도 말라”는 주장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즉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관련된 폄론(심판)은 14절20절에 나오는 규칙들과 또 22절에 있는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과 분리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23절에서도 “이것들” 곧 규칙들과 사람의 가르침은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골로새 교회의 이단적인 가르침의 핵심들로 지적되고 있다. (320.3)
 이와같이 골로새서 2장 16-23절 전체가 미묘하게 통일된 주장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의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것들” 곧 규칙들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대하여 이미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으로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는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가지고 마치 그리스도의 인이라도 되는 듯이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규칙들은 지혜의 모양을 가지고 있을 뿐 실상은 육체를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절23절에서 “겸손”이라고 언급했듯이 여기에서도 저자는 그의 적대자들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21.1)
 골로새서 2장 14절: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문서
 구약과 유대 문헌에 골로새서 2장 14절과 유사한 표현의 사례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의 행동을 다 기록한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 천사들이 모든 사람의 죄를 그 책에 기록한다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BC 1세기의 익명으로 된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이 책에 대하여 의문의 증서(cheirographon)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321.2)
 여기에서 이 책은 모든 선견자의 죄들을 열거하고 있고 기소하는 천사가 이 기록책을 들고 있다. 선견자는 그 죄의 기록을 지워달라고 간청한다. 그런데 그 선견자의 선한 행실을 기록한 책도 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바 “우리를 거스리는”이라는 표현(골 2:14)은 악한 일을 기록한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321.3)
 만약에 골로새서 2장 14절의 의문의 증서(cheirographon)의 배경에 하늘 법정의 대 심문관이 제시하는 기소의 책의 개념이 놓여 있다면 이 속박은 사람이 서명한 채무 증서가 아니라 악한 영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기소의 증서라는 주장이 유력해지는 것이다. (322.1)
 그 다음으로 이 문서의 “법률적 요구”는 모세의 법과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히려 의문의 증서가 사람들에게 주장하는 법률적 요구는 천사의 기소의 토대가 되고 있는 금욕주의적인 계율(dogmata)을 뜻할 수 있다. 즉 사람은 육욕적이며 비영적이고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다 등의 기소일 것이다. 이른바 영지주의자들이 인류에 대하여 비난하는 상투적 고소가 이것들일 것이다. (322.2)
 이 선생들은 사람들에게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주는 듯이 금욕적이고 종교적인 짐을 지우려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바울의 주장대로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만든, 사람의 명령이고 사람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사야서 29장 13절에 있는 논쟁적인 구절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성경절은 마가복음 7장 7절(마 15:9)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를 논박하실 때 인용되었다. 구원에 필수적인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규칙들(dogmata)들이야말로 모두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그것들은 실재 자체가 아니다. (322.3)
 그림자와 형상, 몸과 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