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4부 거룩한 열성 제18장 성소는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준다
 요셉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들을 찾으셨다(창 3:8-9).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부조들에게, 성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128.2)
 자신을 기꺼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를 용서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지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애쓰지 않으셨을 것이다. (128.3)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하여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회개의 첫 단계조차 밟아보지 못할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5:31).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전에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기다리신다면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바 되었을 것이다. (128.4)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셉에게 그의 형제들이 회개를 보인 이후에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용서가 힘들다면 하물며 하나님에게 회개의 필요를 깨닫기도 전에 용서하시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128.5)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128.6)
 우리는 그분을 대항하여 반역하므로 위대하고 세심한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왔다. 오히려 우리에게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우리가 겪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큰 반역의 고통을 겪으실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랑이 고통을 정복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눈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129.1)
 만일 하나님께서 이미 인류의 죄 때문에 고통을 겪으셨다면 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더하셨을까? 그 고난을 피할 수 없으셨던 것일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는 것을 냉정하게 거절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위한 열망을 포기해서 하나님 자신을 보호하셨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은 자신이 선포하신 것처럼 궁극적인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요일 4:8). (129.2)
 사랑은 공의와 자비를 모두 포함한다. 공의를 희생시키며 자비로운 것은 사랑을 타협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해 우리를 용서함으로 자비를 베푸실 때 하나님의 공의를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공의는 우리의 죽음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죽으심으로 그 요구를 성취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129.3)
 우리가 깨뜨린 율법은 사랑이다(마 22:36~40). 하지만 그 사랑은 또한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필코 우리를 구원하도록 애쓰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129.4)
 우리는 사사기 10:16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하여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을 보고만 계실수 없으셨다”(새번역).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 없으셨다! 즉각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야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130.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그분은 주기로 선택하셨다. 자신을 주신 것은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납부가 아니었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주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분께서 주심은 그분의 선택된 본성의 발로(發露)였다. (130.2)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된 인간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지 보여주셨다. 여기에 그 이야기가 있다. (130.3)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테처럼 두르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며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주위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기 위해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든 입고 심판의 왕 앞에 나왔다, 왕? 그렇다, 그는 왕이었지만 보좌도 없었고 소수의 사람만이 그분이 왕이신 것을 알았다. 그의 주변에는 호위병 대신에 몇 명의 어부들만이 함께 있을 뿐이었다. (130.4)
 여인은 자의로 왕 앞에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죄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고결한 몸가짐의 사람들에 의해 끌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지른 그녀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했던 것만큼이나 왕 앞에 그녀를 끌고 올 기회를 얻게 된 것에 기뻐하는 것처럼보였다. (130.5)
 “우리가 이 여자를 잡았습니다. 우리가요. 그것도 현장에서. 간음의 현장에서요. 선생님, 우리가 이 몹쓸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세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아주 확실하게 해주었습니다. 모세의 명령은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우리가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31.1)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통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분이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은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었다. 만약 모세의 법을 따라 돌로 그 여인을 치라고 한다면 불법적으로 사형을 가하는 것 때문에 그들은 로마 당국에 그분을 넘겨줄 것이었다.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한다면 모세의 법에 반대하여 말하는 것이 되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유대인의 신뢰를 잃게될 것이었다. (131.2)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오로지 두 개 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양자택일할 수밖에 만들었다. 영악했다. (131.3)
 모세의 법은 간음죄를 지은 두 사람 모두를 벌하도록 하고 있기에(신 22:22)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사건의 상세한 것에 대해 질문하시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 여자가 정말로 간음을 저질렀는지, 현재 결혼은 했는지, 혹은 간음의 상대자는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간음을 저지르는데 둘이 필요하고 모세의 법은 여자만이 아닌 둘 모두를 정죄했다. 그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었고, 예수께서도 그 여자가 정말로 간음한 것을 알고 계셨다. 그녀의 상대자는 도망칠 수 있도록 허락되었을 것이다. (131.4)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을 하던지 덫에 걸리셨다.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허리를 굽혀 예루살렘 땅바닥을 덮은 석회암 흙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132.1)
 “선생님, 우리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심각한 사건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허리를 펴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요 8:7) (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