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4부 거룩한 열성 제18장 성소는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사 없이 간단히 용서하실 수 없을까? 왜 희생 제사가 필요한가? (124.1)
 우리는 용서가 당연히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데 너무 익숙하다. 우리는 용서는 쉽고 남을 칭찬하는 것처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용서는 하나님조차도 힘든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즉 ‘용서’는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124.2)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라고 기도하실때 가지셨던 용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는 구절을 찾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의 의무를 다함에 있어 용서의 대가를 간과하지 말아야 하며, 용서가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반응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124.3)
 미국 켄터키 히스 고등학교에서 마이클 카네일이라는 14살 소년이 같은 반의 여학생 세 명을 총으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124.4)
 하지만 살아남은 친구들은 곧바로 “마이크, 우리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현수막을 내어 걸었다. 데니스 프레거는 “자기 위안을 위한 무의식적인 용서의 원칙”의 사례라고 평가했다. (125.1)
용서는 비록 하나님에 의한 것일지라도 죄인의 회개 여부에 달려있으며 오직 죄인이 돌이킴으로 주어질 수 있다. 눅 17:34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니라.” (이 성경절은 1997년 12월 15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기고되었던 것으로 1998년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38페이지에 용서가 죄일때라는 기사에서 재인용하였다.)
(125.2)
 프레거는 현수막을 내건 학생들이 떠맡은 정신적인 고통의 값을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르며 프레거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학생들이 마이크를 용서한 것이 의미 없고 무의식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프레거의 이야기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며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125.3)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셨던 방법으로 용서해야만 한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들이거나 아니거나 그리고 용서를 구하든 아니든 신중하고 의식적이고 의미 있는 선택인 것이다. (125.4)
 용서는 단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그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 당사자 사이의 거래이다. (125.5)
 죄를 범한 사람은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들일 때까지 용서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용서는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성소에서 계속적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죄인은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때만 “용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레 4:31, 35). (126.1)
 만약 당신이 진정한 용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창세기의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요셉이 바로의 임명을 받아 애굽 두 번째 치리자의 자리에 있을 때에 그의 형제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애굽에 왔다. 요셉은 자신의 신원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고 형제들을 용서하기 전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시험했다. 요셉은 형제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지”“태연히 앉아 음식을 먹다가”, 죽는 것보다 못한 노예로 팔아버렸던(창 37:23~27) 때와 같은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126.2)
 요셉에게 용서는 힘들었다. 형제들은 요셉에게 했던 잘못의 회개와 마음의 변화를 통해 요셉이 준비한 품성시험을 통과했기에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러냈다. (126.3)
 우리는 이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이란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남아있는 시므온을 포기하므로 요셉의 시험(창 42:18~24)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의 은잔을 훔친 죄로 베냐민이 요셉의 종으로 남아야한다는 데 동의했더라면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창 44:1~17)? 그래도 요셉이 그들을 용서했을까? 아마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126.4)
 베냐민을 풀어 달라 간청하는 유다의 말은 형제들이 회개하고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요셉이 가장 잘 깨닫도록 했다. 유다는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마쳤다. (127.1)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 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창 44:33~34).
(127.2)
 그리고 이 말이 요셉의 마음을 녹였다. (127.3)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나이까?(창 45:1~3)
(127.4)
 필립 얀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127.5)
 “마침내 그 은혜가 요셉을 관통하였을 때, 그 비통과 사랑의 소리가 온 궁전에 메아리쳤다. 이게 무슨 통탄의 소리인가? 왕의 장관이 심히 편찮으신가? 하지만 요셉에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것은 용서하는 사람의 소리였다. 모든 용서의 행위 뒤에는 배반당했던 상처와 그리고 배반을 경험한 사람의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 있다”(놀라운 하나님의 은혜[Grand Rapids: Zondervan, 1997], 85). (127.6)
 요셉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 후 형제들에게 입 맞추며 우는 것으로 자신의 용서를 표현했다(창 15:4~5). 요셉은 형제들이 용서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1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