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12:1“증인들”—은 아마도 11장의 영웅들일 것이다. 그들이 하늘에 가서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11:39는 우리에게 그들이 아직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실한 생애의 묵묵한 증언은 우리에게 하나의 귀감(龜鑑)이 된다. 우리 모두는 살아야 할 하나의 생명, 위대해지기 위한 하나의 호기(好機), 모든 탁월함을 계발시키고 모든 재능을 개선할 하나의 기회를 갖고 있다. 그들은 뙤약볕 아래서 그들의 날을 보냈고 경주를 잘 하였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다. (250.2)
 그리고 예수—그가 거기에 계신다. 그는 결승선에 서 계신다. 그의 눈은 우리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시고, 그의 목소리는 우리를 격려하신다. 그는 친히 그 코스를 달리셨고 승리로 끝내셨다. 이제 그는 경주하고 있는 우리를 도우신다. 이와 같이 그는 믿음의 주(author, 창시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온전케 하는 자(perfecter, 완성자)이시다. 우리는 그와 함께 시작하여 그와 함께 끝낸다. 우리의 구원은 모두 그에게서 나며 오직 그에게서만 온다. (250.3)
 우리는 그가 행하신 일을 결코 할 수 없다.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오셔서 그가 옛적에 호숫가에서 어부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던 것같이 우리를 부르신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가 시작하신 치료와 가르침과 설교의 일을 수행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달리신 삶의 코스를 추적하면서 그를 따라간다. (250.4)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신 바로 그 일을 결코 할 수가 없다. 그와 우리 사이에 질적인 간격이 있을 것이며 언제나 있을 것이 확실하다. 그는 우리의 구세주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우리는 예배자들이다. 그는 희생 제물이시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죄인들이다. (251.1)
 2절은 번역에 있어서 하나의 흥미 있는 대안(代案)을 제시한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는 헬라어의 전치사 안티(anti)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그것의 영어 대응어(對應語)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와 수치를 견디신 것은 그가 그 후에 뒤따를 그 너머에 있는 즐거움을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 대신에, 그는 고난 당하고 죽으시기 위하여 땅에 오셨으며, 그가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하여 조롱 당하고 경멸당하며 거절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251.2)
 나는 이 대안의 번역을 선호한다. 나는 이것이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앞서의 서술들—2:9-10의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강조와 5:7-8의 겟세마네에 대한 생생한 묘사—과 가장 잘 부합되며 그것을 반향한다고 생각한다. 사도는 그 묘사들 중 어느 것에서도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그의 죽음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소망으로 유지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그의 경험들의 실제성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만을 보고 있다. (251.3)
 우리가 12:2안티를 어떻게 번역하기로 하든지 간에, 그 구절의 핵심은 밝게 빛난다: “우리의 눈을 예수께 고정시키자.” 우리는 이 요청을 이 설교의 초반에서 이미 들였다: “그대의 생각을 예수께 고정시키라”(3: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제 그것이 다시 등장한다. 이 초청과 도전은 책버팀들(bookends)과도 같이, 히브리서의 권면의 얼개를 형성한다. (251.4)
 그대의 생각을 고정시키라—다른 사람들에게가 아니다. 비록 그들의 신실함이 훌륭한 귀감이 될지라도. 과거에다 고정시키지도 말라. 그대 자신에게 고정시키지도 말라. 오직 예수님께 고정시키라. (251.5)
 브리티쉬 컬럼비아(British Columbia)의 뱅쿠버(Vancouver)에서 개최된 1954년의 영국 제국 경기 대회(British Empire Games)는 히브리서 12:1-2에 대한 한 뛰어난 예증을 제공해 준다. 거기서 벌어진 마일 경주(mile race)는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경주들 중의 하나—아마도 가장 위대한 경주—로 간주될 것이다. 그것은 1마일 경주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두 사람—로저 배니스터(Roger Bannister)와 존 랜디(John Landy)—을 대항시켰다. (251.6)
 그의 평상시에 하는 방식을 따라 랜디는 빨리 출발하였다. 대부분의 주자들과는 달리, 랜디의 방식은 그 무리의 선두로 일찌감치 나가서 순전히 그의 체격의 힘으로써, 결승선으로 마지막 돌진을 위해 힘을 저장할 다른 주자들보다 오래 견디는 것이었다. 그 경주는 분명히 배니스터와 랜디 사이의 경주였다. 얼마 있지 않아 다른 주자들은 뒤쳐지고 있었다—랜디가 앞서고 배니스터가 그보다 훨씬 뒤쳐진 채. (252.1)
 매 4분의 1마일의 끝에 시간들이 공표되었고, 각 발표 때마다 스탠드는 진동했다. 랜디와 배니스터는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분명히 세계 신기록을 수립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 테이프를 끊을 것인가? (252.2)
 그리하여 주자들은 마지막 한 바퀴, 마지막 4분의 1마일에 도달하였다. 랜디가 그 경주 내내 그렇게 해 왔듯이, 그가 배니스터에 앞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결승 테이프가 쳐져 있었고, 어렴풋이 점점 더 가까이 보이고 있었다. 그의 뒤 어딘가에서 배니스터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귀청이 터질 듯한 함성 소리가 스탠드들에서 일어났다. 랜디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배니스터가 랜디를 따라잡기 위하여 그의 마지막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결승 테이프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랜디는 배니스터가 그의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자기를 따라붙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어디쯤 달려오고 있는 것일까? (252.3)
 결승점 직전에서, 랜디는 배니스터가 어디쯤에서 달려오고 있는지를 보려고 머리를 돌렸다. 심리적 순간을 포착한 배니스터는 다른 편으로 랜디를 지나치며 자신을 내던졌고, 그리하여 가까스로 그를 제치고 결승점에 다다랐다. (252.4)
 뱅쿠버에 세워진 한 동상이 그 순간을 기념하고 있다. 그것은 한 경주자가 테이프를 끊는 반면, 다른 한 경주자는 바로 그 뒤에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12:1-2“우리의 눈을 예수께 고정시키자”는 교훈을 얼마나 절실하게 묘사하는 것인가! (253.1)
 신실함에 대한 이 권고의 나머지 부분인 4-13절은 히브리서를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에 의하여 징계를 받고 있는 자녀들의 배경 속에다 두고 있다. 이 구절은 독자들이 이미 그들의 믿음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있다는 강한 암시를 주고 있다. 우리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7절), 그리고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11절)라는 말을 읽는다. 4절은, “피 흘리기까지”라는 고난에 대한 언급과 함께, 앞에 있는 시련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죽음까지도 초래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253.2)
 그들은 고난으로 인해 놀라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을 기대해야 한다—이것이 토론 전체를 통해 흐르는 요점이다. 구약 본문 잠언 3:11-12는 이 사상을 전달하고 있으며 여기에 제시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수중에 있는 시련과 고난은 긍정적인 기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심을—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며, 불법적인 자녀들이 아니라 합법적인 자녀들임을—보여 주며,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시련들을 사용하셔서 “의의 평강의 열매”(11절)를 맺게 하심을 보여 준다. (253.3)
 5-11절에서 “징계”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 파이데이아(paideia)인데, 이것은 교육학(pedagogy)이라는 말과 같은, 교육을 가리키는 영어 용어들의 배후에 놓여 있는 말이다. 징계(discipline)는, 그것이 꼭 어떤 부정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훈련으로 이해된다면, 헬라어의 의미를 정확히 반영한다. 불행히도 우리의 시대에 징계는 그것이 가혹함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호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신병 훈련소에서 군인들을 신체적, 심리적 한계점까지 밀어붙이는 해병대 훈련 하사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의 긍정적인 의미를, 학자들이 자신들의 전공 영역을 “discipline (학문 분야)”로 지칭할 때, 그들의 학문의 무대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 (253.4)
 그리스도인들은 징계에 대한 성경적 사상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매를 아끼라. 그러면 아이를 망쳐 놓는다”라는 낡은 경구(警句)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큰 녀석이 작은 녀석에게 그의 화를 터뜨릴 때 너무 자주 남용된다. 우리가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의식(意識)이요, 성숙과 깊이로 성장하는 의식이요, 임무에 전념하는 의식이며, 성경적 징계가 함축하는바 즉각적인 만족을 제쳐놓는 것이다. (253.5)
 우리는 이 구절이 우리 시대와 각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질문들 중의 하나인 고통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왜 나쁜 일들이 선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가? 왜 나쁜 사람들은 영구히 그것을 가지는 것 같은가? 왜 하나님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음의 캠프에서 죽게 하셨는가? 이 질문은 헤아릴 수 없는 유대인들을 무신론자가 되게 하였고, 수백만의 비유대인들로 의아심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매일 밤 텔레비젼 화면에 쏟아지는 영상들을 본다—아프리카 나라들의 앙상한 아이들, 발칸 반도의 대량 학살, 도시들의 거리에서의 폭력—그리고 우리는 왜 하나님이 그것에 대하여 뭔가를 하시지 않는가 하고 의아해 한다. (254.1)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정론(神正論, theodicy)—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하여 추론된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적 대답, 곧 우리 자신의 고통 속에서 있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하나의 대답을 발견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얻는 모습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섬세하게 돌봐 주시는 친절하고 자비한 아버지이시다. 그는 악의 창시자가 아니다. 고통은 다른 근원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지어 악을 취하여 그것을 선한 목적으로 돌려놓으실 수도 있다—만약 우리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도록 한다면 말이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미와 평화와 신뢰의 삶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 (2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