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마지막 절기이다(레 23:33-43; 민 29:12-38). 이 절기는 팔레스타인 외부로부터 엄청난 참석자를 끌어들였다. 이 절기의 중요성에 대한 여론 때문에 예수의 형제들은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열망하고 있었을 것이다(요 7:2-5). 이는 절기 중 가장 기쁨이 충만한 때였다. 대속죄일도 지나갔다. 죄들은 모두 고백되어 용서를 받았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절기의 주요 주제는 기쁨과 감사였다. (192.1)
 이 절기는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방황의 시기(레 23:43)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물과 빛을 제공하신 것을 함께 기념했다(출 13:21-22; 17:1-7). 그러므로 초막절 동안 밤에는 큰 기름 주발이 성전 기둥 위에 놓여져서 연중 어느 날보다 더 밝게 성전 뜰을 비추었다. 축제의 절정은 횃불을 들고 가는 행렬이었는데, 이때 빛을 밝히는 일을 더 밝고 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빛은 예수 시대에 이 절기의 또 다른 주요 주제가 되었다. (192.2)
 이 절기의 또 하나의 주제는 순례의 개념,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영원한 거처가 없다는 사상이다. 이는 그들이 이 땅에서는 순례자요 나그네라는 것이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종려 가지들로 초막들을 만들어, 이 절기 동안 그 안에서 살았다(집이 있을 경우, 자신의 집 옥상이나 뒤뜰에 장막을 세웠다). 이와 같은 출애굽에 대한 회고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물과 음식을 공급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필요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절기 동안 비가 내리면 다가오는 한 해의 길조로 받아들여졌다. (192.3)
 그러므로 초막절의 절정은 “비의 춤”(“rain dance”)이었다. 이 예식에서 제사장은 큰 무리를 이끌고 성전을 나서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 기혼 샘에 이르러 이사야 12:3의 말씀으로 찬양을 불렀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물 한 통을 채운 후 제사장은 성전으로 돌아와 열다섯 개로 된 층계를 올라갔다. 계단 한 개를 올라갈 때마다 제사장은 열다섯 개의 순례의 시편(시 120-134) 중의 하나를 낭독하였다. (192.4)
 성전 뜰의 바닥에는 한 쌍의 물두멍이 있었다. 두 물두멍으로부터 나온 관이 바닥 아래로 서로 연결되어 기드론 골짜기까지 이르렀다. 기혼 샘에서 떠온 물이 물두멍 중 하나에 부어지는 동안 포도주 한 통을 다른 물두멍에 부었다. 물과 포도주가 사해까지 계속 흘러갔을 것이다. 이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유대 광야의 비옥함을 회복케 하고 사해의 물을 신선한 물로 바꿀 것이라는 하나님의 미래 왕국에 대한 구약의 약속을 상기시켜 준다(겔 47; 슥 14:8). (193.1)
 절기에 참석하여, 특히 물(요 7:37-39)과 빛(8:12; 9:5)을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유대주의의 거대한 체제를 자기 자신으로 대체시키셨다. 구약에서 초막절과 연관된 종말 시대 사건들은 예수의 인격(person)과 가르침 속에서 실체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가 이 복음서에서 매우 규칙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른바 유대교의 대체(代替)(replacement—of—Judaism)를 계속하고 있다. (193.2)
 문단의 세부 사항
 “유대인”(7:1)이란 단어는 전체 민족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통치권자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26, 32, 45절). 이 때문에 복음서에서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유대인을 발견할 수 있다(13절). 그러므로 현대의 독자들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한 진술에서 반 셈족주의의 논리를 추론해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유대인”은 이 복음서의 저자에 의하여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율법 학자들(doctors of the law)로 구성된 통치 계층을 묘사하는 함축적인 묘사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193.3)
 갈릴리에서의 일들은 잘 진척되지 못하고 있었다(6:60-71). 예수의 형제들은 그가 유대에서 이적을 행한다면 그의 목적은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2-4절). 이 권면은 두 가지 면에서 모순이었다. 첫째, 그의 형제들은 그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를 믿지 않았다(5절)! 둘째, 예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그를 떠나갔다(6:60-66)! (193.4)
 예수께서는 그들의 운동에 문제될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그들의 행동의 타이밍(timing)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반응하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의 문제에 달려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형제들과 논쟁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삶과 가르침이 사회에 아무런 도전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실수가 예수의 사역을 어설프게 끝마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는 하나님이 그를 위해 세워놓으신 그 계획을 그의 가족들이 주도하지 못하게 하셨다(6-9절; 참고 2:3-5). (194.1)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응하셨다. 그 결과 10절에서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할 바로 “그 때”(8절)가 이르러왔음을 하나님이 그에게 분명히 보여주셨다. (194.2)
 초막절은 8일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절기의 중간”(14절)은 절기의 넷째 또는 다섯째 날을 의미한다. 이때 예수께서 성전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가르치기를 시도하신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삶의 주요 문제들에 대하며 통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랍비들의 말을 끝없이 인용하여 열거하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주제들에 접근하지 않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15절). 오히려 그는 그의 아버지가 가장 훌륭한 랍비 학교를 소유하고 계신다고 주장했다(16절). 그는 권위 있는 사람들을 인용함으로 자신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진지한 목적을 가지고 그의 가르침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된 것임을 인정할 것이다(17, 18절).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즐겨 행하려는 자들은, 그것이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든지 간에, 예수께서 자신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음을 직관적(直觀的)으로 알게 될 것이다. (194.3)
 유대인들이 그의 가르침에 의문을 발한 이유(21-24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그의 행위를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해석한 요한복음 5장의 이유와 동일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심으로써 그들의 반발에 대응하셨다(19절). 그들은 그분이 넷째 계명을 어겼다고 비난했으나 그들 스스로는 그를 죽이려 함으로써 여섯째 계명을 범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신체의 단 한 부분에만 관계되는 어린아이의 할례를 위해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넷째 계명을 무시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인간의 전 존재와 상관되는 것이었다(22, 23절). (195.1)
 25절에서 주제가 안식일의 치유에서 예수의 메시야 자격으로 옮겨지는데, 이는 제4 복음의 많은 부분에서 중대한 쟁점이 되고 있다. 예수의 반대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자가당착(自家撞着)의 함정에 빠지고 있다. 첫째, 그들이 그를 거절한 까닭은, 메시야가 어디서 올지를 아무도 모를 것이지만 그들은 그가 어디서(갈릴리—41, 52절) 왔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는 베들레헴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를 부적격자로 여겼다(42절). 그러나 이 복음서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사실에 있어서 예수께서 갈릴리가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 예수의 반대자들은 그들이 예수께서 어디로부터 오셨는지 정말 모른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다(9:29; 8:14, 19). (195.2)
 이러한 사건들이 포함된 것을 보면 예수의 근원 문제가 제2 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마태는, 구약은 메시야가 베들레헴과 갈릴리 모두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마 2:6, 23), 요한은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마태의 주장을 재천명함으로써 예수의 반대자들의 주장들을 물리치려고 하기보다는, 예수의 참된 근원은 그 어느 장소에도 있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보다 고차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근원은 하늘이라는 것이다(1:1-11, 14; 7:16, 28, 29, 33; 8:16, 18, 23). (195.3)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도, 아마도 물을 성전의 배수구에 붓는 예식이 진행될 즈음에 예수께서는 일어나셔서 대체(代替, replacement) 주제에 대한 장엄한 진술을 하심으로써 그 모든 진행을 멈추게 하셨다. 즉 백성들은 축제에서 영적 물을 추구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축제의 물로 대체(replace)하셨다. 너무 목말라 예수께 나아오는 자는 마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마시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소생케 하는 원천이 될 것이다(7:37, 38). (196.1)
 이 장은 하속들이 예수께 손대는 일을 계속 실패함으로 인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좌절로써 끝나고 있다(45-52절; 또한 26, 30, 44절을 보라). 이 짧은 구절은 아이러니(irony)로 가득 차 있다. 지도자들이 관원이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자마자 관원이자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50, 51절). 그들은 예수가 율법을 범한다고 비난했으나 그들 중에 한 율법사가 율법에 대한 그들 자신의 충실성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명백한 오류로써 응수한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52절). 사실은 요나도 분명히 갈릴리 출신이고, 아마도 나홈과 엘리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복음서가 진행됨에 따라 예수를 반대하는 지도급 인사들은 점점 혼란스러워져서 이 복음서가 나타내려고 하는 자명한 진리에 대해 점진적으로 마음을 닫는다. (196.2)
 그러므로 이 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지도자와 군중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반면에(1, 25, 32절), 군중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12, 13, 20, 25-27, 31, 40-43절). 지도자들은 아무도 그를 믿지 않고 있으며, 군중들이 예수께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그들을 무식(無識)장이로 비웃고 있다(48, 49절). (196.3)
 문단의 주요 주제
 예수의 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