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미국에서도 교회와 국가 사이에 결정적인 경계선을 긋는 것은 어려웠다. 수백 년간 국가가 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패턴이 너무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어서 그것을 떨쳐내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다. 미국 독립 혁명이 수백 년의 흐름과 관행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위대한 “미국의 시도”는 교회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따라서 교회들은 그들의 활동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국가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가 그들 스스로의 재원에 의존하게 되자 사도 시대의 모델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새로운 상황은 변장된 축복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촉발된 자원하는 헌물만이 그들이 취해야 할 노선임이 분명했지만, 당시 지도자들에게는 기댈 수 있는 역사도, 전통도, 과거의 경험도 없었다. (760.5)
 혁신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무가치한 것들이었다. 교회 좌석 임대, 바자회, 저녁 파티, 도박, 복권과 같은 것들이 시도되었다. 어떤 성직자들은 이런 새로운 방법들을 비난하면서.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옛 방식보다 더 나은 게 없다고 꼬집었다. (760.6)
 미국 교회는 재정적 측면만을 거의 전적으로 강조하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의 청지기직분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교회 역사가들은 주로 미국의 청지기 운동이 시작된 시점을 1800년대 후반으로 보고 있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그 운동은 해외 선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 탄력을 받았다. 그 후에 이론과 실제를 묶는 노력과 신학적 근거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지역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훈련 프로그램과 전략들이 실행되었고, 다양한 수준의 성공도 이루어졌다. 1920년에는 일단의 청지기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29개 교파가 ‘미국 청지기협의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뉴욕에 모였다. (7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