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9편에서 별들은 말을 하지 않는 말을 발했다. 여기서 말은 했고 들린다. 왜냐하면 그 말은 땅 위의 피조물들에 의해 발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총명한 자로부터가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입으로부터 나온다(2절). 심지어 보잘 것 없는자들도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분의 지혜와 위대함을 볼 수 있다.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보면 인간의 상대적인 중요성 또는 중요성의 부족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3-4절). (510.7)
 시편 기자가 밤하늘을 볼 때 그는 별의 광휘와 비교하여 인간의 하찮음을 곰곰이 생각할 뿐이다. 시편 기자의 수사학적 의문에 대한답변은 놀라움이다. 보이는 모든 것들과 비교하여 인간이 하찮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대신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5절;히 2:7에는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로 되어 있음). 6-8절은 인간이 통치하는 모든 요소들, 즉 새들, 동물들 그리고 물고기들을 언급한다. 이 통치에 관해 요약된 진술문이 먼저 주어진다(6절).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그 다음 두절은 인간의 통치 하에 있는 땅의 생물계를 나열한다. 시편 8:5-8은, 창세기 1:26-27에 있는 인간 창조에 대한 재진술 또는 부연 설명이다. 인간은 여전히 동물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소유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그것을 항상 현명하게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511.1)
 E. 선지서
 1. 아모스
 아모스의 잘 알려져 있는 세 개의 창조주 찬미는 4:13, 5:8, 9:5-6에 있다. 여기서 아모스는 악하고 반역하는 인류와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당신의 심판을 수행하시기 위해 천연계의 요소들을 사용하신다고 언급한다. (511.2)
 첫 번째 창조주 찬미(4:13)의 시작은 산들의 조성을 묘사한다. 그 그림은 창조주간의 셋째 날에 있었던 하나님의 활동들과부합한다. 인간의 마음을 형성하신 하나님은 또한 인간의 생각을 아신다. 이 앎은 그 선지자의 기별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의 동기에 대한 그분의 지식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아침을 흑암으로 바꾸는 것은 낮과 밤의 연속뿐 아니라 야훼의 날도 언급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의 날은 그들에게 빛의 날이고 그 원수들에게는 흑암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아모스는 역으로 선포했다(암 5:18-20). 이와같이 하나님은, 하루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야기하는 해와 달의 물리적인 운동들뿐 아니라 인간들과 국가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주관했다. (511.3)
 땅의 높은 곳들을 밟는 것에 대한 언급은 신적 현현에 대한 보편적인 구약 언어이다. 비록 세부 사항들은 이 찬미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은 심판하기 위해 오신다. (511.4)
 두 번째 창조주 찬미(암 5:8-9)에서 별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묘사되어 있다.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라는 중복되고 도치된 표현은 낮과 밤의 진행을 지적하지만 동시에 심판과 야훼의 날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511.5)
 바다의 물에 대한 언급은 창조주간의 둘째 날과 셋째 날의 사건을 회상시킨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하나님은 그 물을 다르게 사용하신다. 그것은 여전히 그분의 통제 하에 있으나 지금은 파괴를 위해 사용된다. 그것은 홍수의 물이지만,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지역적으로 파괴적인 심판의 홍수이다. 야훼는 천연계를 주관하는 주권자이시며 그 세력을 통제하신다. 그것은 창조 시에 그분의 목적에 이바지했으며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심지어 심판과 파멸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511.6)
 신적 현현의 언어는 세 번째 창조주 찬미(암 9:5-6)에 훨씬 더 강하게 나온다. 심판의 국면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이 접근은 천연계의 세력에 역사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그들은 심판으로 인해 통곡한다. (511.7)
 이 본문은 나일강의 홍수나 다른 어떤 강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를 묘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신적 현현으로 땅 위를 지나실 때,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묘사이다. 첫 번째 찬미는 단순히 산들을 하나님이 밟으시는 것을 언급했지만, 이 세 번째 찬미에서 하나님은 땅을 만지시고 땅은 녹는다. 일단 땅이 녹았을 때, 그것은 강의 파도처럼 움직인다. (511.8)
 2. 이사야
 이사야의 이 예언적인 진술에서 창조에 관한 주된 진술은 참하나님과 거짓 신들 사이의 많은 대조점을 묘사한다. 이사야 40:18-20은, 우상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조롱한다. 야훼가 창조주이심은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25절)라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도입된다. 그 답변은 어떤 신도 야훼와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일단의 증거는 그분이 하늘의 군대인 별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26절). 그러한 지식과 행위는 인간과 다른 신들의 천연계적인 능력을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은 별들의 수효뿐 아니라 그들의 이름도 아신다. 그분은 별 무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주관하시며 유지하기도 하신다. (512.1)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의 두 차원이 여기에 나타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는 영원 전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또한 그분이 창조주이심은 땅 끝까지 확장된다. 심지어 땅의 궁극적인 한계에서도 그분이 창조하시지 않은 것은 없다. (512.2)
 이사야 40:26-28이 끝나는 음조는, 이사야가 나중에 창조주 하나님의 다른 활동들을 도입하기 위해 사용하는 열쇠가 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보여 주는 이 서론적 진술들은 이사야 42:5, 44:24, 45:12, 18 그리고 48:12, 13에 있다. 이 창조 진술들은 각각 다른 예언을 소개한다. 우리는 어떤 신학적인 관계를 그 서론과 후속의 예언 사이에서 볼 수 있다. 창조는 과거에 일어났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명시했다. 예언은 미래에까지 확장되며,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예언된 사건들이 일어날 미래에 여전히 명시될 것이다. (512.3)
 이사야 40:26-28에 있는 주된 창조주 진술은 차후의 모든 공식들에 선행한다. 환언하면, 모든 서론적 진술들은 그 주된 진술을 가리키거나 그것에서 도출된다. 예언들을 주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주된 두 차이점, 즉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과 그분이 만드신 세상에 일어날 일들을 그분은 아신다는 것이 참하나님을 고대 세계의 모든 가짜 신들과 구별한다. (512.4)
 b. 이사야 65-66장:재창조
 이사야 65:1766:22로 하나님의 창조력에 대한 새로운 면이 소개된다. 영감 받은 선지자는 여기서 지구가 회복될 때를 미리 본다:“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 예언은 원래 옛 예루살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사 65:18, 19). 이것은 전개될 것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상태들이었다. 그러나 그 예언은 해당하는 믿음의 반응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원래의 약속은, 요한계시록 21-22장의 예언들에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새롭게 된 땅과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512.5)
 이 개념은 이사야 66:22-23에서 반복되고 확장되어, 원래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평행을 제공한다. 창세기 1:1이 옛 하늘과 옛 땅의 창조를 언급했듯이, 이사야 65:17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언급한다. 이사야 66:22이사야 65:17에 이미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사야 66:23은 그 반복에 새로운 한 개념이 추가되어 있는데, 그것은 활동들과 함께 언급된 사람들이다. 한 형태의 활동이 지목되어 언급되는데, 그것은 예배이다. 인간이 그들의 창조주 앞에 나타나는 것이 에덴에서 시간과 관련되어 있었듯이, 그 예배도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여섯째 날, 즉 금요일에 창조되었으므로, 땅에서 그들의 첫 번째 온전한 하루는 일곱째 날 안식일이었다. 동일한 형태의 활동이 새 땅에 예상된다. 창조에 관한 두 평행 진술들이 창세기 1장2장에 있듯이, 재창조에 관한 두 평행 진술들이 이사야 65장과 66장에도있다. (5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