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4편의 윤곽은 창세기 1장에 있는 창조의 날들의 윤곽을 따른다. 그 시편은 창조의 날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지는 않지만, 그날들의 사건들의 순서를 따른다. 그 시편은 그날들로부터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한 기대를 이용한다. 그 시편은 그것들의 잠재력, 기능 그리고 혜택을 기대한다. 여기에 사용된 시적인 언어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엄청난 가능성을 제공한다. (508.3)
 첫째 날에 창조된 요소는 땅을 덮은 빛이었다. 그러나 시편 104:2에서 빛으로 덮인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찬란한 영광으로부터 창조의 빛이 나온다. 시편 104편은 창조의 첫째 날에 있었던 빛의 근원에 대한 다년간의 의문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하나님 자신을 둘러쌓던 빛이 땅에 빛을 제공했다(1. A. 3을 보라). 창세기 1장 창조의 둘째 날에 궁창이 분리되었다. 시편 104:3-4은 바로 그 요소에 관해 말한다. 하나님은 “[대기의]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 그 “휘장”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둘러싼다. 주께서는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대기권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기도 하셨다. (508.4)
 창조주간의 셋째 날 뭍(마른 땅)의 출현은 창세기 1장에서 꽤 사실적인 방식으로 언급되어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단순히 말씀하셨으며 그대로 이루어졌다. 시편 104편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섰던 물을 “견책”하셨다. 6절은, 하나님이 뭍을 생기게 하시기 전 물로 덮인 땅으로 시작한다. 이 부분은 9절에서, 그분은 이전처럼 땅이 물로 덮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끝난다. 노아 홍수나 태고의 홍수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의 중심은 산들의 융기나 계곡들의 침강을 묘사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땅을 형성하셨다. (508.5)
 하나님이 앞서 뭍을 생기게 하시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분은 또 다시 바다가 땅을 덮도록 허용하시지 않는 한편 여전히 땅에 물을 대신다.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땅 그 자체를 위해 필요한 급수가 10-13절에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은 물을 점점 더 높게 만드신다. 계곡에 있는 샘들이 들의 짐승들에게 마실 물을 준다 더 높은 곳에서는 새들이 나무들에 깃들인다. 마침내 높은 산들의 꼭대기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작동하게 하신 천연계의 사이클에 의해 물이 공급된다. (508.6)
 14절에서 시작하여 식물들의 창조와 음식으로의 그들의 용도가 점점 더 상승하는 강도로 물과 같은 패턴을 따라서 묘사되어 있다. 제공된 음식은 가축들이 먹으며 사람들이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노동하는 평지 위에서 시작한다. 그 지역으로부터 남녀들의 삶에 각각 그 자리가 있는 포도와 곡류와 올리브가 나온다. 그 위에 장엄한 나무들, 심지어 높은 산들에 있는 거대한 나무들, 레바논의 백향목들도 나온다(16절). 이것들도 한 목적을 성취하는데, 새들이 그 둥지를 그곳에 짓기 때문이다. 교목 한계선 위에도 생명체가 있는데, 산악 염소들은 가장 높은 산들의 절벽에서 뛰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셋째 날에 창조된 뭍으로부터 생긴다. (508.7)
 시편 104편은 그 다음으로 하늘의 발광체들을 다루지만, 그 순서는 창세기 1:14-19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창세기 1장은 가장 큰 궤도로 시작하여 보다 작은 광명으로 줄어들며 그런후가장 작은 광명들로 간다. 시편 104편은 저녁이 와서 해가 진 후 나타난 달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후 그것은 밤에 있는 동물들의 활동에 관해 말한다. 야간 사냥 후 동물들은 쉬기 위해서 그들의 굴로 기어들어가고, 땅의 새로운 점유자가 등장한다. 사람들이 일어나 들판에서 일하기 위해 햇빛 속에 나간다. 그와 같이 시간 요소들의 순서는 저녁과 아침, 달과 해, 밤에 일하는 사자들과 낮에 일하는 사람들인데, 이 모든 것이 창세기 1장의 시간의 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에 의해 확립된 것이다. (509.1)
 다섯째 날에는, 둘째 날에 분리된 궁창에 위로는 새들이 아래로는 물고기들이 산다. 이 시편에서 바다는 생명체로 충만한데(25절), 창세기에서도 언급된 거대한 리워야단도 있다. 새들은 여기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셋째 날에 창조된 나무들과 관련하여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섯째 날에 바다에 생명체가 주어졌듯이, 그 바다 위에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가 나타난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물고기가 아니라 배를 타고 바다 위를 여행하는 인간이다. (509.2)
 창세기 1장에 의하면, 먼저 동물들, 그 후 사람이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 사람은 창조의 최고의 성취로 간주된다. 말하기 이상하지만, 그들은 시편 104편의 여섯째 날 이야기에 직접 언급조차 없다. 왜냐하면 이 시편은 땅 위의 생명체의 유지를 위해 제공된 것들을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화한 목자 또는 동물원의 사육사처럼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피조물들을 먹이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28절). (509.3)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음으로써 사람의 창조를 완성하셨다. 그 최종적인 행위가 이 시편에 다루어져 있지만 다른 순서로 되어 있다(28-30절). 여기서 우리는 그 호흡이 취함을 입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29절). 그런 후에야 이 시편은 생명을 위한 창조적인 영을 보내심에 관해 말한다(30절). 생명의 호흡을 내쉬는 것은 인류의 끝이나 그 종(種)의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의 호흡을 새로 불어넣으신다 그래서 생명이 다음 세대에 일어난다. 죄와 죽음의 저주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계속된다. 그분의 백성은 대적을 이길 것이다. (509.4)
 창세기에서 창조주간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일곱째 날을 묘사한다. 시편은 비슷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 안식일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라고 시인한다. 우리는 창조를 기념하여 그분을 존경한다. 그것은 시편 104:31에 첫째로 언급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를 끝내셨을 때, 그분은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다. 시편 104편에서 그분은 당신의 작품들을 기뻐하셨다(31절). 그러나 보다 더 어떤 것이 일어난다. 그분이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분이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32절). 이것은 신적 현현(顯現), 즉 하나님의 개인적인 임재의 현시(顯示)에 대한 묘사이다. 이것이 주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가까이 하셔서 당신 자신을 알리시는 안식일에 일어나는 것이다. 정중한 경외에 감명을 받아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509.5)
 그 예배가 다음 두 절에 묘사되어 있다.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와 명예와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33절). 이것은 한 번만의 사건이 아니다. 시편 기자는 생명이 계속하는 동안 이 행동을 계속하기로 약속한다. 주님께 대한 찬양이 계속해서 시편 기자의 입술에 있다. 침묵은 예배의 다른 부분이다. 34절에서 시편 기자는 주님께 대한 묵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묻는다. 마지막으로 예배에 대한 이 묵상은 기쁨으로 끝난다(35절). (509.6)
 시편 19편의 전반부와 창조의 넷째 날은 상당히 유사성을 보여 준다. 두 이야기는 주된 행위자로서의 해와 관련되어 있다. 시편 19편에서 해는 매일 땅을 따뜻하게 하는 기능적인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 시편의 절반은 때로는 고대 가나안 족속의 태양 찬미로 간주되었다. 그 해석은 시적 의인화를 신학적 신격화와 혼동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적 의인화를 보고 있다. (510.1)
 이 시편의 첫 네 절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수공품에 의해 누가 찬양을 받는지 말한다. 해나 별들이 아니라 그것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찬양을 받는다(1절). 하나님께 대한 이 명백한 찬양은, 하나님의 수공품이 언제나 하늘에서 명백하므로 밤낮으로 계속된다. 특별한 강조가 밤하늘에 주어진다. 별들은 완전히 침묵하지만, 그것들은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볼수 있는 그 자신들의 말을 여전히 한다. 그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권능 있고 장엄하신지 보여 준다. (510.2)
 시편 19편에서 순서는 보다 작은물체들(1-4절의 별들)로부터 보다 큰 물체(4-6절의 해)까지다 해도 창조주에 관해서 말하지만 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다 해는 더 잘보인다. 그 영향은보다 더 직접적으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해는 만물에 그 열기를 발한다. 그 열기로부터 아무것도 숨은 것이 없다(6절).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치신 하나님의 일이다. 해는 장사나 강한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장사 “같다.” 그 의인화는 해의 기능을 끌어내는 비교에 의지한다. 말 없는 말을 갖고 있는 별들과 복사열을 갖고 있는 해는 참하나님의 설비일 뿐 아니라 그분의 지혜를 나타내기도 한다. (510.3)
 이 시편의 후반부인 7-14절은 전혀 다른 주제로 보이는 하나님의 율법, 즉 토라를 다룬다. 야훼의 그 가르침은 신자들을 위한 도움이요 위로이므로 칭송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편의 후반부가 매우 다르다고 보고 그것을 시편 119편처럼 율법을 찬양하는 독립적인 시편으로 간주했지만, 그 경우가 아니다. 이 시편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명백한 사상의 발전이 있다. 이 시편의 전반부는 소위 일반계시, 천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묘사한다. 후반부는 소위 특별계시, 하나님의 발해진 말씀과 기록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묘사한다. (510.4)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이 이 시편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다르다. 전반부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은 창세기 1장에서처럼 엘로힘이다. 후반부에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은 창세기 2장에서처럼 야훼이다. 따라서 전반부의 천연계를 통한 일반계시로부터 후반부의 특별계시로 움직이는 것은, 또한 하나님을 말하는 일반계시로부터 한 분의 인격적인 참하나님 야훼를 말하는 특별 계시로 움직이는 것이다. (510.5)
 이 시편의 특별한 강조는 인간의 창조에 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이름 야훼와그의 칭호, “우리 주”(아도네누)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온 땅”을 위해 특히 창조에서 그분이 하신 일로 알려진 바이다. (5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