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창조가 처음으로 심사숙고된 창세기 1:26의 시작에 있는 동사는 1인칭 복수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이다. 이것은 시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이야기의 산문 부분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야기에 있는 이 복수를 단순히 문학적인 특징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 그것은 문법적으로 의미 심장하며, 따라서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인간의 남성 형태와 여성 형태가 창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명했다. 원래 창조되었을 때, 둘 다 그들의 창조주의 바로 그대로의 형상을 갖고 있었다. 타락에 의해 손상되고 왜곡된 동등권이 여기에 있었다(참조인간론1.C) (501.1)
 12.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교 시에 걸쳐 신학자들의 주된 언급들을 이끌어냈다(사람 I. B; 죄 1을 보라). 이 언급들이 둔 강조점은 창조 시에 인간에 부여된 이성적인 힘과 선택의 자유에 있었다. 스콜라 신학은 이것에 타락 이전의 도덕적인 의의 상태를 포함시켰다.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 신학자들은 후자의 성질에 강조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이 논의의 다른 부분은, 타락과 죄가 어느 범위까지 이 본래의 상태를 소멸시키거나 손상시켰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그 본래의 상태와 거듭난 그리스도교인들이, 하나님과 그들이 갖는 영적 체험에서 고양되는 그 상태를 또한 구별했다. 일반적으로 후자는, 창조 시에 누렸던 본래의 상태와 아주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다. (501.2)
 창세기 1:27에서 “형상”에 대해 사용된 단어는 히브리어 및 고대의 동족 언어들에서 잘 알려진 첼렘이다. 그것은 주로 신전들에 배치된 신의 형상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신들의 외모와 기능들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경은 이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독특하다. 고대 세계에서 신들은 인간의 형상들로 만들어진 반면,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501.3)
 현대인들은 이 용어의 육체적인 면을 회피해 왔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상과 그것의 좋았던 것들에 대해 그들이 가졌던 개념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이것은 창조 이야기에 나타나 있는데, 거기에는 매일의 창조 후에 그 창조 활동의 작품들이 “좋았더라”고 선언되었으며 모든 것이다. 끝난 후에는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되었다. 물질세계와 그 거주자들에 대한 이 견해는독특하게 히브리적이었다. (501.4)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음은 육체적인 유사점을 포함한다는 것이 여기서 사용된 원래의 단어에 의해 전달되는 개념의 한 부분이다. 이 유사점은 하나님처럼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을 또한 암시한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순결하고 죄가 없었다. 비록 범죄로 말미암아 이 상태를 곧 잃어버렸지만, 그들은 그 범위까지 도덕적으로 하나님과 같았다. 하나님과의 유사점은 또한 감정의 영역까지 미친다. 하나님은 감정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의 냉혹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떨어져 있는 신이 아니다. 그분은 당신의 피조물들과 접촉하시며 함께 하시고 활동적이신 하나님이다. 타락 후의 성경 이야기는 당신의 타락한 피조물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구약에서 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피조물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양과 형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들은 그들의 창조주에게 있는 그 면들도 반영하는 것이 당연하다. (501.5)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이성적인 면을 강조한 철학자들은 올바른 점을 주장했다. 우리는 또한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부여받은 선택의 자유와관련되어 있다고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면들에 그 형상의 육체적인 면도 추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그러한 면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우리가 현재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여전히 어떤 면에서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전인적인 견해가 구약에 있다면, 육체적인 존재와 함께 하는 감정적인 삶도 강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은 이성적인 능력, 선택의 자유,(나중에 타락에 의해 손상된) 원래의 도덕적 순결성, 육체적인 외관 그리고 정서적인 삶의 면에서 그분과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결국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종합적인 유사점을 받았음을 뜻한다. (501.6)
 13. 사람과 동물의 음식
 이 점에서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의 관계가 부상한다. 셋째 날에 하나님은 초목, 즉 풀과 나무들을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육상 동물들이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을 때, 이것들은 이미 존재했다. 이 모든 피조물들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들 중의 하나는 그들의 유지를 위한 음식이었다. 이것을 그들의 창조주께서는 심지어 그들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예비하셨다. (502.1)
 창조주간에 아담과 하와에게 배정된 본래의 음식물은“온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창 1:29)를 포함했다. 동물들에게는 “모든 푸른 풀”(30절)이 주어졌다. 아담과 하와만 그들의 창조된 본래의 상태에서 채식주의자였던 것이 아니고 짐승들도 그러했다. 따라서 타락 이전에는 동물의 포식에 대한 여지가 없다. 이 원래의 음식물에 나타난 지혜가 현대에 입증 되었다. 종합적인 그룹을 대상으로 이 주제들에 대해 행한 과학적인 연구들은, 평균적으로 채식을 하는 미국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일반적인 인구에서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7년 더 산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연구들이 계속됨에 따라서 그 평균적인 수치는 증가했다. 이와 같이 원래의 식사를 배정하는데 나타난 창조주의 지혜는 현대 과학에 의해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 에게 무엇이 최선의 음식인지 확실히 아신다. (502.2)
 14. 제7일의 안식일 창조
 창세기 1:312:1-4의 분리는 성경의 모든 다른 분리들처럼 그 책이 처음으로 기록된 지 수 세기 후에 이루어졌다. 일곱째 날에 대한 기록은 다른 엿새에 대한 기록과 맞는다. 그것은 이 날을 “일곱째 날”이라고 이 본문에서 세 번이나 언급한 사실로부터 명백하다. “안식일”이라는 이름은 여기에 사용되지 않지만 동사 샤바트는 그 원래 어근의 의미 “멈추다/끝내다”를 갖고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날에 당신의 일을 “멈추셨다/끝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이 어떻게 그 이름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안식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끝내셨던 날이며, 그후그 사실을 반영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끝냈던 날이다. 이 날에 하나님이 쉬셨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창조 활동을 멈추셨다.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이 쉼이 필요 없었으나 그분의 신적인 쉼은우리를 위한모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적인 쉼이다. (502.3)
 창세기 2:1-4에 있는 두 번째 하나님의 활동은 이 특별한 날을 축복하는 활동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여섯째 날에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창 1:28)뿐 아니라 다섯째 날에 창조하신 새와 물고기들도 이미 축복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창조된 사물들에 주어졌으나 날에게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시간의 한 단위에 선포되었으나 시간의 그 단위에 창조된 사물들에게는 아니었다. (502.4)
 하나님의 축복이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제칠일에 주어졌다. 짐승들과 사람들에 대한 축복은 특히 생물학적인 풍요와 관계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안식일에 대한 축복은 영적인 풍요의 의도가 있었다. 짐승들은 이 날에 부여된 그 축복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담과하와는 이해할수 있었다. 그 첫 부부는 창조주께로부터 직접 그분이 제칠일에 선포하신 그 특별한 축복에 관해 배웠다. (502.5)
 창세기 1:28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부여된 또 다른 축복은 동물계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안식일도 어떤 통치권을 나타내지만 피조물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통치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에 대한 그분의 통치권을 나타낸다. 따라서 안식일은 창조를 기념할 뿐 아니라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 책임은 나중에 보다 자세히 넷째 계명에 언급되었다. 거기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의 문 안에 있는 짐승들조차 그날에 쉬도록했다(출 20:10). 그들은 사람들과 같이 영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을 인정하고 지킬 수 없었지만 여전히 그날의 육체적인 쉼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503.1)
 하나님은 제칠일에 쉬셨다, 즉 “멈추셨다.” 게다가 그날을 축복하셨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그날을 구별하셨다 즉, 거룩한 용도를 위해 그날을 따로 두셨다 “거룩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다쉬는 여기서 사역형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거나 거룩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성막을 거룩하게 하셨다(레 21:23). 따라서 그것은 “성소”(동일한 어근으로부터 파생된 코데쉬 또는 믹다쉬)로 알려지게 되었다. 출애굽기 40:9에서 성막은 봉헌되었고 거룩하게 되었다. “봉헌하다”“거룩한”은 둘 다 어근 카다쉬(qãdaš)에서 왔다. 성소가 거룩하게 되어 거룩한공간이 되었듯이, 안식일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그분의 인간 피조물의 용도를 위하여 구별된 거룩한 시간이 되었다. (503.2)
 창조 시에 안식일의 성별은 안식일이 전적으로 유대인 특유의 것이냐 아니면 온 인류에게 속한 것이냐하는 이슈에 중요하다. 이 모든 활동이 인류의 첫 구성원들이 땅 위에 놓였던 창조주간의 끝에 일어났기 때문에, 안식일이 그들에게 주어졌음이 명백하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들로서의 그들을 위해 구별되었고 봉헌되었다(참조 안식일 I-IV) (503.3)
 두 번째의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 2:5에서 시작한다. 비평적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장은 다른 문학적인 자료로부터 온 것으로 구획한다. 이 입장은 반복적인 평행대구의 법칙으로 상호 관련된 이 두 장들의 관계의 성격을 오해한다. 구약 전체를 통하여 그리고 특히 운문에서 평행대구는 기본적인 문학 기법이다. 이런 종류의 반복에 대한 최상의 예는 욥기에 있는데, 거기에는 논쟁들이 운문으로 제시되어 있다. 욥의 친구들은 아홉 개의 속 단락으로 나누어진 세 개의 주된 논쟁 사이클을 지난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지막 세 개의 강화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답변하신다. 고대의 독자들에게 그 반복적인 평행대구는 이야기가 그 절정에 이를 때 그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높인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서 창조라는 주제가 중요하다면 창조에 대한 평행 진술들을 찾게 될것으로 우리는 기대할수 있다. (503.4)
 1. 주제의 유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