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히브리서 제 I 부 예수의 탁월성 (1:1-4) 제1장 더 좋은 계시 (1:1-4)
 성경에서 아들을 이보다 더 높여 묘사한 곳은 없다. 우리 주님의 참되고 영원한 성육신 이전의 신성을 선언함에 있어서 본 구절들과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성경절은 오직 세 곳뿐이다: 요한복음 1:1-2; 골로새서 1:15-17; 그리고 요한계시록 1:5, 17-18. 여기서 우리는, 고금을 통하여 아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라고 하거나 시간의 어느 경점에서 하나님의 신분으로 높여졌다고 제안하려 하는 소리들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을 찾는다. (43.5)
 우리의 구원은 이러한 단언들과 그것들이 선언하는 사실에 걸려 있다. 오늘날, 수세기를 통하여 그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person)은 남녀들의 도전 거리이다. 그는 우리의 눈길을 끄시며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우리는 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종교사(宗敎史)의 모든 연구들, 모든 심리학적 분석들, 그리고 철학적 담화들을 다한 후에도 이 질문은 여전히 변함없으며 우리의 응답을 요구한다. (44.1)
 믿는 우리는 이렇게 확언한다: 나사렛 예수는 그가 주장하시는 그대로의 분이시다. 그는 착한 사람, 선생,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 그 이상이시다. 유대인의 메시야 그 이상이다. 그렇다! 그보다 더욱 더하신 분-그는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히, 진실로, 그는 하나님이시다! (44.2)
 하지만 아들이라는 용어는 성육신 그 이상을 가리킨다. 그는 아들이 되시지 않았다. 그는 아들, 곧 영원한 아들이시다. 아들은 높임을 받은 신분과 기능을 시사한다. (44.3)
 예수님은 자주 이 용어를 자신에 대하여 사용하셨다. “인자”는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신 자기 명칭이기는 하지만, 아들이라는 말—곧 그 말 자체—로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셨다. 예를 들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44.4)
 아버지와 아들의 용어법(用語法)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시간과 기원에 연결시킨다: 아들들은 그 존재를 아버지에게서 찾으며, 아버지는 시간적으로 앞선다. 그러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서, 그리고 아버지를 통하여 기원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성경의 언어는 공유된 존재(shared being), 동등성, 거룩한 본질을 가리킨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하셨을 때, 그들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다(요 5:18)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위가 거슬렸다. (44.5)
 예수님의 영원한 선재성(先在性)과 신성(神性)에 대한 엘렌 화잇의 진술들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본래의, 빌려 오지 않은, 파생되지 않은 생명”(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530)이 있다는 그녀의 진술이 고전적으로 인용되어 온 것인 반면에, 다음의 말씀도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45.1)
아들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나타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그[하나님]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선언하신다. . . .
(45.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재(先在)하시고 자존(自存)하시는 아들이시다. . .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선재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마음을 영원한 시대 이전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는 영원하신 아버지와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았던 때가 결코 없었다고 우리에게 확언하신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그의 음성을 들었던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 . . 그는 영원한, 자존하시는 아들이시다. . . .
(45.3)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의 그의 인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반면에, 그의 선재성에 대하여도 명확히 말하고 있다. 말씀이 거룩한 존재로서, 곧 당신의 아버지와 연합되시고 하나 되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존재하셨다 (엘렌 G. 화잇, 복음 전도, 614, 615).
(45.4)
 엘렌 화잇은 영원한 아들 되심에 대하여 확언하는 동시에, 성육신이 그를 다른 모습의 아들이 되게 했다고 시사하고 있다: “그가 인간의 아들로 계신 동안, 그는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이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출생에 의하여 인류와 연합된 자로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서셨다” (엘렌 G. 화잇, 가려뽑은 기별, 1:227). (45.5)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아들의 사역은 그의 위격만큼이나 영광스러운 것이다. 히브리서 1:1-4를 연구할 때, 우리는 그의 경력에 상응하는 세 국면의 그의 사역을 보게 된다—성육신 이전의 그의 활동들, 성육신 동안의 활동들, 그리고 성육신 이후의 활동들. (46.1)
 성육신 이전: 아들은 우주를 창조하셨고 만물을 유지하신다. 우리의 세상과 별들의 하늘들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며, 우연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거룩한 지성(Mind)이 그것들을 만드셨으며, 거룩한 손이 그것들을 운행시키신다. 그리고 그 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손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아들에게나 우리에게 낯선 곳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다. (46.2)
 성육신 동안: 세상에서의 아들의 모든 사역 과정은 한 구절로 요약된다-“그가 . . . 죄를 정결케 하셨다.” 산상 설교나 비유, 기적이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치료하는 일, 시험이나 제자들의 양육,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일, 등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사도는 동산에서 인류를 하나님의 뜻에서 돌이키게 했고 오늘날 남녀들의 고통과 아픔의 배후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를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다룬다. (46.3)
 성육신 이후: 아들은 하늘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좌정(坐定)하셨다. 즉, 그는 다스리신다. 좌정은 죄를 정결케 하는 그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완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그는 존귀의 자리에서 통치하신다. (46.4)
 그러나 그는 만유의 후사이신데, 그것은 마침내 만유가 그에게로 돌아올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원하신 아들로서의 그의 위격(位格)으로 말미암아 그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다. 그의 창조주 되심과 그의 유지시키시는 능력 때문에 그는 만유를 다스릴 권리를 가지신다—그러나 현재는 교회만이 그를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만유의 후사이시기 때문에, 온 우주는 마침내 그에게로 와서 그를 섬기며 경배하게 될 것이다. (46.5)
 우리는 아들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약간 달리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측면에서 볼 수 있다. (46.6)
 선지자로서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신다. 우리가 보아 왔듯이,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그분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더 이상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교통(交通)이 없다. 이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신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가 이 땅에서 떠나시기 직전, 빌립이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들이 . . .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47.1)
 제사장으로서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 그는 수천의 소나 염소보다도 더 큰 능력을 지닌 희생 제물, 곧 자신을 드리신다. 그는 단번에 우리의 죄를 다루신다. (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