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히브리서 제 I 부 예수의 탁월성 (1:1-4) 제1장 더 좋은 계시 (1:1-4)
 다른 어떤 것도 말해지기 전의 하나님. 만유(萬有) 위에 계시고 만유 너머에 계신 하나님. 만유 안에, 만유를 통하여, 만유에게 향한 하나님. 여기서 우리의 생각이 시작되며,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생각도 그분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36.3)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그분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말했듯이, 우리가 그분 안에서 쉼을 발견하기까지는 쉼이 없다. 믿는 우리는 그분을 친구(Friend)—형제보다 더 밀착된, 우리의 가장 참된 동무(Companion)—로 알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벧전 1:8) 그분 안에서 기뻐한다. (36.4)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직 증명할 수 없다. 여러 세기 동안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존재의 본질로부터, 또는 설계의 증거들에서, 또는 우리의 존재의 도덕적 측면에서 추론하면서 합리적인 논쟁을 벌여 왔다. 이 모든 논쟁들이 도움은 되나 어느 하나도 이것의 결말을 쾌히 내릴 수는 없다. 무신론자도 그의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물고 물릴 뿐이다. (36.5)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시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사도는 후에 우리에게 말 할 것이다(11:6).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안에서 계속 자라 가게 되는 방법이다—믿음으로.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36.6)
 하나님은 인간이 “증명”하기엔 너무나 크신 분이다. 과학적인 실험에 의하여 검증되기엔 너무 크신 분이다. 논리적인 것이나 합리적인 것으로 논하기에는 너무 크신 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셨고, 유지시키시는 지성(the Mind)이시며, 우리의 지성(mind)이 희미하게 반향하는 그 지성이시다. 어떠한 인간의 지성도 하나님의 지성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없다. (37.1)
 그러나 믿는 우리는 사방에서 그분의 발자국들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은 그분의 세상이며,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만사가, 특별히 비극적이고 추한 일들이 그러하듯이, 왜 그 모양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반면, 그분의 손길 안에서는 우리가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37.2)
 하나님이 히브리서의 처음이요 주요 전제(前提)가 되시듯이, 그분은 이 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배경이시다. 또한 이미지를 바꾸어 표현해서, 아들이 각광을 받는 인물, 즉 협주곡을 위한 독창자(獨唱者)라면, 하나님은 화음을 이루어 주는 관현악의 지휘자(指揮者)이시다. 우리는 하나님(God)이라는 칭호를 이 책에서 67번이나 발견한다. 반면에, (Lord)라는 말은 12번 언급되었다. 이러한 용례들은 사도가 사용한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아버지(Father)라는 말은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다. (37.3)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심을 배우게 된다(3:4). 그는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원하시며(2:10), 모세를 봉사하도록 부르시며 (3:2-5), 아론을 대제사장직에 임명하시며(5:4), 그리고 예수를 새 반차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신다(5:5).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의 말씀으로 지으셨다(11:3). 그분은 인간에게 약속들을 주시며, 우리의 장래를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맹세를 더하신다(6:17-18).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를 가져오시며(6:7-8), 은혜를 제공하시며(4:16), 그리고 사랑의 봉사 행위를 기억하신다(6:10). 그분은 평화를 주시며(13:20), 경고하시며(13:25), 그리고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신다(5:7; 11:19). (37.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 가까이에 가시며, 그의 백성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다(8:8). 사도는 우리를 “집”이라고 부른다(3:6)—거룩한 부모에게서 사랑스런 징계를 받는 가족(12:3-11).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소멸하는 불”이시다(12:29). (37.5)
 그러나 하나님의 주요 활동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허두에서 발견하는 두 번째 가정(假定)이며, 우리는 그것을 줄곧 들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하시는”(speaking 또는 saying, 원문에 서로 다른 동사) 하나님을 발견한다—히브리서에서 전자는 14번 나오며, 후자는 22번 나와서 책 전체에서 총 36 번 나온다. (38.1)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다(1:3). 그 말씀은 아들을 천사들 보다 뛰어난 분으로 지적한다(1:5-14). 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서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하여 경고한다(3:7-15).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4:1-10). (38.2)
 “여러 부분(many times)과 여러 모양(various ways)으로”—이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히브리서 1:1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구약의 부분들(times, 시대들)을 생각해 보라—그것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며, 주기적인 하나님의 교통을 가리킨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창조가 이루어지는 방법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에서 말씀하셨고, 첫 살인자 가인에게, 의의 설교자 노아에게, 이방 땅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성난 형으로부터 도망치는 야곱에게, 모세와 말라기, 삼손과 사무엘, 다윗과 드보라, 예레미야와 예후, 그리고 에스겔과 에스더에게 말씀하셨다. 구약 전체를 통하여 그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호와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38.3)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모양들(ways, 방법들)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라. 에덴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시내 산에서는 천둥과 번개와 나팔 소리로, 실로의 성막에서는 잠자는 어린 소년을 부르심으로(삼상 3:1-14), 예레미야에게는 골수에 사무치게 함으로(렘 20:9), 이사야에게는 그가 성전에 예배하러 갈 때에(사 6:1-4), 다니엘에게는 고향을 떠난 먼 이방 땅에서(단 10:1-14), 그리고 갈멜 산의 영웅에게는 40일 후에 “세미한 음성”(왕상 19:12)으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38.4)
 하나님의 말씀은 한계가 그어지거나 예측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또는 어떻게 말씀하실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말씀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다. 그분은 선지자에게 꿈과 이상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그분은 또한 그 같은 친구가 그릇된 행동 노선으로 들어설 때에는 한 마리의 짐승—당나귀!—을 사용하셔서 꾸짖으실 수도 있다(민 22:28). (39.1)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말들(words), 즉 실제적 말(speech)이지만, 우리의 귀에 들어오는 말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돌 판에 나타날 수도 있으며, 혹은 그것이 우리의 내이(內耳)에 떨어져 우리만이 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의 양심과 자기 만족을 찌를 수도 있다. (39.2)
 히브리서 1:1-2는 하나님께서 “통하여(through)” 또는 “의하여(by)”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는 (en)인데, 문자적으로는 “안에서(in)”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말씀들에 의하여(by)뿐만 아니라 그분의 기별자들 안에서(in) 말씀하셨다. 그들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기별대로 살았다. (39.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그분의 총체적 교통(total communication)을 의미한다. 귀로 들을 수 있는 말씀들, 기록된 말씀들, 침묵의 말씀들, 그러나 살아 있는 말씀들, 등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태초부터 그분은 말씀하신다. 그분은 각 세대에게 계속 말씀하신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신다. (39.4)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확신한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님은 조용한 우주에서 우리만 암중 모색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의심하고 실망하도록 유기(遺棄)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그분은 오늘 말씀하신다. (39.5)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 진리는 성경의 가장 귀중한 사상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각 자녀가 느낄 수 있는 손길, 삶의 노변에서 들을 수 있는 음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 (39.6)
 나는 그대에게 하나님이 언제 또는 어떻게 말씀하실지 말해 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뜻에 굴복하시거나 우리의 방법에 제한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돕기 원하신다. 그는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시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괴롭히는 근심들과 곤혹들을 통하여 안내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모든 짐들을 그분에게 맡길 때, 그가 맡기도록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같이(벧전 5:7), 우리는 응답을 확실히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시간(time)에, 그분의 방법(way)대로. (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