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히브리서 제 I 부 예수의 탁월성 (1:1-4) 제1장 더 좋은 계시 (1:1-4)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사람을 가르치실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에녹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와 교통하려고 가까이 오시는 때에 우리 마음은 우리 속에서 때때로 불타게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이 그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바로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뿐만 아니라 능력도 받을 것이다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668).
(40.1)
 말씀하시는 하나님—새 천년기의 입구에 서 있는 인류에게 이것은 얼마나 놀랍고도 혁명적인 사상인가! 카프카, 헤밍웨이, 러슬, 사르트르—이들의 목소리들이 20세기를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인간의 존재를 “더러운 농담”(헤밍웨이), 무의미(카프카와 사르트르), 또는 “굴하지 않는 절망의 플래트폼 위에 세워진 것”(러슬)으로 묘사하였다. (40.2)
 그러나 믿는 우리는 달리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안다. 아니, 우리는 그것을 차가운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알기 때문이다. (40.3)
 성경의 다른 두 책만이 히브리서처럼 극적인 팡파르로 시작한다. 하나는 그 첫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창세기인데, 그것은 독자들을 창조하시는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40.4)
 다른 하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로 시작하는 요한복음이다. 이 말씀들은 우리를 창세기 1:1 이전, 곧 태초 중의 태초로, 모든 시작들 이전의 시작으로, 우리의 세계의 창조 너머로, 우리의 마음이 뻗칠 수 있는 한 먼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태초”에 계신 하나님! 그 모든 것 이전에 계시고,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 (40.5)
 그리고 흥미롭게도 태초에 하나님 곁에 말씀(Word)이 계신다. 하나님이 어떠하시면 말씀도 그러하시다. (41.1)
 히브리서 1:1-4창세기 1장요한복음 1장의 이러한 사상들을 사로잡아(비록 요한복음은 히브리서보다 늦게 기록된 것 같지만) 그것들을 함께 묶는다. 세 구절에 있어서 첫째 전제—하나님—는 동일하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신비로우신 “말씀(Word)”을 상기시키는 하나님의 활동이 창조하는 일보다는 오히려 말씀하는 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41.2)
 그러나 하나님의 전달 수단에 대한 사도의 집념은 하나님의 말씀의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에 대한 확인을 넘어서고 있다. 그의 논의는, 요한의 표현을 빌리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 때(요 1:14)의 정점 또는 절정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말(speech)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서 1:1-4에 나오는 아들의 역할과 기능을 생각하게 한다. (41.3)
 아들을 통한 완결
 히브리서의 첫 두 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는데, 조목조목 서로 상응(相應)하면서 옛 계시와 새 계시와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41.4)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가 말씀해 오셨다
우리의 조상들에게 우리에게
옛적에 이 마지막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아들로 말미암아
(41.5)
 오직 한 구절만이 대응하는 말이 없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원문에서는 그 대응어의 생략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사도가 그 말들을 책의 맨 처음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실제 어구(語句)의 표현은 폴뤼메로스 카이 폴뤼트로포스(polumerōs kai polutropōs)이다-막 소개되려고 하는 사상들의 흐름과 일치되게 장엄하고 낭랑한 울림을 지닌 헬라어 단어들. (「제임스왕역」은 극적인 시작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지나간 여러 시대에 각양한 모양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42.1)
 이러한 구조—“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히브리서의 맨 처음에 놓고 그 다음에 대응하는 아무런 말을 제공하지 않는—는 옛 계시와 새 계시 사이의 강한 대조를 제시하는 것이다. 옛 계시가 단편적으로 온 것에 비해, 새 계시는 완결로써 이르러 온다. 전자는 부분적인 것으로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이지만, 후자는 온전하고 완벽하다. (42.2)
 왜냐하면 새 계시는 아들로 말미암아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대한 묘사가 이 지점을 향하여 내달았고, 아들이 소개되면서 그가 중앙 무대로 나오신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1:1-4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긴 문장에 대한 호기심 어린 사실을 주시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어(主語)이고 그 책이 그분으로 시작하지만, 아들이 등장하자마자 그 문장의 나머지와 그밖의 대부분이 아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미 제시하였듯이, 그 패턴이 책 전체에 계속된다. (42.3)
 “아들 안에서(in Son)”—원문이 문자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아들 되심의 (質, quality)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 사상을 “아들이신 한 분으로 말미암아” 또는 “아들의 신분을 지닌 한 분으로 말마암아”라는 말로써 더 뚜렷이 나타낸다. 바울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이르러 온 단편적인 계시와 아들이 가져오는 충만한 계시를 대조시키고 있다. (42.4)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아들이라는 용어가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매번 그 이름은 그의 위격(位格, person)의 중요성과 탁월성을 가리키면서 상당한 무게를 싣고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라는 말에는 그가 완결을 지닌 계시이며(1:2), 천사들보다 탁월하시며(1:5-14), 새롭고 더 나은 제사장직을 위한 자격을 지니시며(5:4-6; 7:28), 그리고 우리가 멸시하지 않도록 경고 받은 한 분(6:6; 10:29)이라는 사실,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 아들은 2:10-18에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형제가 되신다. (43.1)
 히브리서 1:1-4는 아들에 관하여 세 가지의 놀라운 단언들을 하고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광채”로 번역된 아파우가스마(apaugasma)는 빛의 섬광, 찬란한 광선, 빛을 내비췸, 등의 의미를 제시한다. 여러 역본들은 그 것을 “광휘(effulgence, 「새영어성경」),” “광채(brightness, 「제임스왕역」),” “반사(reflection, 「개정표준역」),” 그리고 “빛남(radiance, 「필립스역」),” 등으로 번역한다. 이러한 묘사는 아들이 영원토록 비추시는 영광의 영역으로 우리를 들어올린다. 그는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그는 빛 중의 빛이시다. (43.2)
 그는 또한 하나님의 존재의 모습 바로 그 자체(exact representa- tion)이시다. 여기 비유가 인(印)과 밀랍 위에 찍힌 상(像)으로 바뀐다. 이 말은 특성(character)이라는 말이 나온 것과 어원이 동일하며,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의 도장(圖章, stamp)이시라고 말해 준다. 하나님이 어떠하시면 그 아들도 그러하시다. (43.3)
 그러나 아들의 영광과 신성에 대한 확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들은 하나님의 광채와 하나님의 본질이시다.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광채와 본질“이시지(being)” 그렇게 되신(became)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아들은 빛 중의 빛이시다. 영원토록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영원토록 그는 그러하셨다. 영원토록 그는 그러하실 것이다. (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