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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의 성령, 자유의 성령
 사람들은 안식일 신앙을 하나님의 명령과 사람의 순종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안식일 신앙 인식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주종관계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사람의 몫은 순종뿐이다. 인생은 잔소리 말고 불평 불만 없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해야만 하는 종속적 존재일 뿐이다. (84.1)
 이같은 하나님과 사람을 명령과 순종의 관계에서만 파악하는 안식일 신앙 인식에서는 사람이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적극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발적인 존재가 아니다. 항상 종속적이고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태도에서도 속 다르고 겉 다르기 쉬운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가 참다운 존재인가. 이러한 존재가 과연 행복할까? 이러한 생활에 보람이 있을까? 이러한 삶에 활기가 가득할까?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의 표정이 밝을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가 이런 존재의 이러한 삶을 부러워하고 소망할까? 누구가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안식일 신앙을 환영하고 소중히 생각할까? 이러한 신앙에 미래가 있을까? (84.2)
 물론 바람직한 안식일 신앙 생활에도 명령과 순종이 있다. 진리와 정의의 명령이 있고 이에 대한 순종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 아들이 있고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사람 아들의 순종이 있다. 천국 같은 삶의 본질과 천국의 시민 같은 사람의 삶에는 진리와 정의에 대한 순종과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7:17)라는 아들의 고백이 있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는 아들의 소원이 있다. 내 뜻과 달라도 아버지의 뜻이므로 받들고자 하고 아버지의 뜻이 진리이므로 받들고자 하는 정신 곧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 되게 하옵소서” 하는 정신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다. 아버지의 분부를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받드는 정신이 하늘 나라의 정신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훌륭한 사람의 훌륭한 삶에는 순종이 있다. 사람은 순종으로 갈 때가 높은 곳으로 갈 때이다. 순종이 천국의 앞잡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두려움으로 순종하고 기쁨으로 순종할 때 아들의 삶의 본질은 천국의 차원으로 높아지고 깊어진다. 좋아진다. 순종으로써 아들의 삶은 천국으로 올라간다. 안식일은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는 순종의 길이다. (84.3)
 그러나 사람 아들이 살아야 할 천국은 명령과 복종만 있는 군대같은 나라가 아니다. 안식일의 세계에는 명령하고 순종하는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명령하고 순종하는 관계만으로 세상 나라가 천국이 되고 보통 날이 안식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 아들이 살아야 할 안식일의 삶에는 명령과 복종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아들은 복종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천국 같은 삶과 참 사람의 삶에는 명령과 순종 말고 오히려 항의하고 반대함으로써 높아지고 깊어지는 삶의 차원도 있다. 그리하여 서양에서 개신교회 신자를 프로테스탄츠(Protestants)라 부른다. 그들은 항의하고 저항하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항의하는 영, 저항하는 영이 성령이었던 것이다. 이 경우에는 복종하게 하는 영이 악령이다. 이집트의 종노릇에 굴종케 하는 영, 출애굽을 두려워하고 출애굽을 후회하게 하는 영이 악령이다. 그리고 사람을 바벨론에 주저 앉게 하는 영, 탈출과 저항을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악령이다. 그 반대로 “바벨론에서 나오라”하는 영이 성령이다. (85.1)
 그러면 안식일의 영은 어떤 영인가. 사람에게 찬성도 할 수 있고 반대도 할 수 있는 자유의 정신을 진작시키는 영이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 대하여 “예”하고 거짓과 불의와 약탈에 대하여 “아니라” 하게 하는 영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영이시며 동시에 “악령에게 저항하라” 하고 “바벨론에서 나오라” 하시는 영이시다. 안식일의 영은 자유의 성령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자유케 하는 성령의 날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신앙을 신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반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자유의 존재이며 하나님께 반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유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고 바라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녀들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녀들이다.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녀들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녀들이다. 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녀들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녀들이다. (86.1)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하나님에게도 명령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명령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천국 같은 삶과 하나님 같은 삶에는 명령하는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명령만 할 수 있어서 하늘나라가 아니고 내가 명령만 할 수 있어서 하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차원에서도 하늘이 열리고 하늘 같은 크기로 사람이 성장하기도 한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을 호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의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실 뿐만 아니라 높은 하늘로부터 낮은 땅 위로 내려오사 우리의 눈높이에서 우리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간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거룩한 사랑의 봉사로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버지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깨우치는 하나님이시다. (86.2)
 안식일 하나님의 눈높이 사랑과 안식일 자녀의 주체적 사랑
 안식일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다(계 3:20).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고 하셨다(아 5:2). 안식일의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호소하기 위하여 밤새도록 밤이슬을 머리에 가득히 맞아가면서 우리의 방문을 두드리는 분이시다. “나로 더불어 먹고 즐기자” 하여 사람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시다. 어제도 두드리시고 오늘도 두드리시는 분이시다. 안식일에는 더욱 각별한 뜻으로 더욱 특별한 사랑을 위해 곧 하나님의 안식으로 초청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오” 하시는 분이시다. (87.1)
 그렇다. 명령하고 순종하는 관계만이 안식일 안에 있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다. 안식일에는 하나님이 명령하고 사람이 순종하는 삶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에서도 명령하고 순종하는 삶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안식일 신앙이 뜻하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이 명령하고 사람이 순종하는 삶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명령하시는 모습만이 안식일의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다. 안식일의 하나님의 사랑에는 눈높이의 사랑이란 것이 있다. 사람의 눈높이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안식일의 하나님이다. (87.2)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은 사람의 관계를 일방적인 관계로 국한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의 관계를 쌍방적인 관계로 확장하고 심화하고 고양한다. 안식일은 사랑의 율법이다. 안식일의 율법은 사랑하는 자가 종이 되는 율법이다. 사랑을 명령으로 강요하지 않고 사랑의 봉사로 사랑을 호소하는 법이 안식일의 법이다. 사랑과 봉사로 사람을 감동시켜 사람의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 안식일의 법이다. (88.1)
 이와 같은 안식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도 예외가 아니다. 이같은 안식일의 사랑에서는 하나님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은 예외가 아니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델이시다. 하나님이 안식일 관계와 안식일 사랑의 모델이시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사람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명령하실 수 있지만 그 대신에 사랑을 호소하고 간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자리로 내려와 사람의 눈높이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람 아들을 감동시키고 신랑의 사랑으로 사람 신부를 감동시키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안식일의 사람은 하나님께 반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자유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와 기쁨으로 화답한다. 하나님께 순종한다. (88.2)
 그래서 안식일에 서 있는 사람 아들의 모습은 둘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고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이 그 하나라면 하나님의 구애를 받고 있는 신부와 여왕의 모습이 그 두 번째이다. 신부와 여왕은 상대에게 “예”“아니오”를 할 수 있는 존엄한 자유의 주체이다. 안식일의 신자들은 안식일 나라의 신부와 여왕 같은 자유의 주체이다. “예” 밖에 할 수 없는 종속적 존재가 아니라 구애자에게 “예”“아니오”를 선택할 수 있는 평등한 주체이다. 주권적 하나님에게 “예”“아니오”를 선택해 대답할 수 있는 자유의 주체이다.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하나님을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몇 년씩이고 문 밖에 세워둘 수 있는 주권적 존재이다. 안식일 안에서 사람은 종이 아니고 주인이다(막 2:28). (88.3)
 사람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높이신 안식일의 하나님
 그러나 안식일의 자녀들은 자신의 능력과 본성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의 신부와 여왕 같은 “안식일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미모와 재주와 선량함과 성실과 강력함으로 하나님에게 “예”“아니오”를 할 수 있는 주권적 존재가 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예”“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신부와 여왕 같은 존재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구애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랑을 명령하지 않고 사랑을 호소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 밖에서 문 두드리는 구애자의 처지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쉬워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아쉬운 존재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89.1)
 왜 그러셨는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랑을 아쉬워하는 하나님의 이 사랑 때문에 사람의 위상은 하늘만큼 높아지고 바다 같이 깊어지고 태산 같이 크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을 이같이 대단한 존재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안식일의 하나님이시다. (89.2)
 안식일은 하나님과 사람을 이러한 관계에서 파악하게 하는 날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명령하고 순종하는 주종관계에서만 파악하게 하는 날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람 아들과 사람 신부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사람 아들과 사람 신부가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의 파트너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파악하게 하는 날이 안식일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람은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크고 소중하고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주는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의 사람은 하나님에게 신부 같고 여왕 같은 존재이다. 안식일의 사람은 하나님에게 “예” 밖에 할 수 없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아니요” 라고도 할 수 있는 선택과 결단의 주체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니요” 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감동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에 열렬하게 “예”로 대답하는 사랑스럽고 진실한 신부요 여왕이다.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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