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나님은 결코 피곤해서 쉬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쉬신 이유는 창조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이며, 인간에게 그분 자신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인 인간을 그분의 안식 속으로 초청하신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예배 경험 속에서 인간은 안식일마다 자기 본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갱신하는 축복을 체험한 다. 주일제도는 자연현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이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이다. 안식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지성적인 존재인 인간 뿐이다. 안식일은 각 날을 종결짓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는 공식 어구가 없이 계속해서 열린 채로 남아 있다. 창조 시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안식의 체험은 죄로 인해 심령의 안식을 상실한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열려져 있다. 창조 때의 안식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이들에게 현세에서 체험 가능한 실제이며 미래의 영원한 왕국, 새 창조의 때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시 95:11; 히 3:11; 4:4, 9, 10). 하나님의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은 궁극적인 회복의 때인 재창조를 기대케 하는 역할을 한다. (86.2)
 ‘바라’(בָּרָא, Bärä’, ‘창조하다’)는 창조기사 밖에서는 두 곳에서 네 번 더 사용되었다. 아담의 ‘톨레도트’창세기 5:1-2과 노아홍수가 기술된 창세기 6:7이다. (87.1)
 (5) 창 5:1-2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87.2)
 창세기 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열 명의 족장을 계보 속에 등장시키고 있다. 계보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죄악 세상에서도 여전히 실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창 1:28). 또한 아담의 계보는 창세기 3:15의 원복음 속에 있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될 때를 향해서 구속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각의 원시 부조들의 운명은 죽음으로 끝나고 있지만 계보의 서문은 하나님의 창조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살인광 라멕으로 끝나는 사악한 가인의 족보와 대조되는 아담의 족보는 하나님의 창조의 때로의 회귀, 재창조의 시대를 가져 올 메시아를 고대하게 한다. 그러나 생명의 씨앗인 ‘여자의 후손’이 오기 전에 온 인류는 자멸의 길에 빠지게 되고, 인류를 위한 유일의 희망은 또 다른 아담인 노아에게서 발견된다.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위기 속에서도 꾸준히 관철이 된다. (87.3)
 (6) 창 6: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조주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신다. 인간이 심판을 받음에 따라 창조 시에 인간에게 종속된 생물들도 동일한 심판에 참여하게 되었다. (88.1)
 2) ‘아사’(עָשָׂה, `äSâ, 만들다, 행하다)
 ‘아사’(עָשָׂה, `äSâ, ‘만들다, 행하다’)는 구약 성경에서 ‘아마르’(אָמַר, ´ämar) ‘말하다’‘하야’(הָיהָ, häyâ) ‘있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동사이다.(2,627회) 총 사용 빈도수 중 육분의 일은 ‘야훼’를 주어로 하는 신학적 용법에 해당한다. 사용범위가 매우 폭 넓기 때문에 문맥을 통해 뉘앙스를 파악할 수 밖에 없으며 창조 기사 속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아사’(עָשָׂה, `äSâ) (‘만들다’)는 창세기 뿐 아니라 구약의 다른 책들 속에서 창조의 전 영역과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가장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19 (88.2)
 창세기 1장‘하나님이 가라사대’ 다음에 ‘하나님이 ∙∙∙ 만드시고’를 하나님의 창조 양식으로 삼고 있다(창 1:6-7, 14-16, 24-25, 26). 하나님의 의도가 현실화되는 모습을 ‘아사’ 동사가 표현한다. 말씀에 의한 창조와 행동에 의한 창조는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시편 33:6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과 행동 사이에는 인식할 수 있는 차이가 없다.20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נַעֲשׂ֑וּ, na`ášû)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89.1)
 3) ‘와요메르’(וַיֹּאמֶר, wayyö´mer, 가라사대)21
 창세기 1장에서 가장 크게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열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물은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열 개의 창조명령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다.22 숫자 10은 성경에서 ‘충분함’ 혹은 ‘충만함’을 뜻한다.23 이 숫자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십계명이다. (89.2)
 이것은 도덕법인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처럼 만물을 다스리는 자연법이 동일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만 백성에게 주어진 것을 암시하고 있다. 도덕법과 자연법은 동일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선한 법으로 이 세상의 질서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90.1)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법을 제정하시는 분이다. 창조적 말씀이 발해질 때마다 지정된 사물이 존재케 되었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든든히 서게 되었다.24 천연계는 고도의 지적인 설계자이신 창조주가 계심을 증거한다. (90.2)
 지적인 설계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평가자이시다. 일곱 번에 걸쳐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평가를 받았다.25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축복’이다. 히브리어 ‘바라크’(בָּרַךְ, bärak) ‘축복하다’는 세 번 사용이 되었다(창 1:22, 28; 2:3). 세 번 반복된 행동은 행동 패턴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축복하시기를 좋아하는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셋은 ‘최종’‘완전’의 의미를 지닌다.26 생물과 인간은 하나님께 충만한 삶의 축복을 받았고, 제 칠일을 축복하심으로 축복의 시대를 온전히 성취하셨다(창 1:22, 28; 2:3). 말씀이 발해질 때마다 새로운 피조물이 출현하여 생기가 넘치는 새로운 축복의 날을 열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생명과 축복의 시대를 계속해서 열어주신다. (90.3)
 4) ‘야차르’(יעָר, yäcar, 모양짓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וַיִיצֶר, wayyîcer, 창 2:7) 본문에 등장하는 ‘야차르’‘형성하다, 모양짓다(shape, form)’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분사형인 ‘요체르’(ירֹצֵר, yôcër)는 깎거나 주형하거나 조각한 인공물을 생산하는 사람이며 성경에서는 ‘토기장이’를 가리킨다.27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과 짐승을 지으셨다(창 2:7-8, 19). 하나님은 창조와 관련해서 산들을 형성하셨고(암 4:13) 마른 땅(יבֶּ֫שֶׁח, yaBBešet, ‘육지’)을 지으셨고(시 95:5), 물 속의 악어(לִוְיָתָן, liwyätän, ‘바다) (괴물’)도 지으셨다.(시 104:26)28 (91.1)
 위의 예들을 볼 때 ‘야차르’는 창조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라 창조의 특별한 행동에 제한되어 사용된 것이다.29 (91.2)
 토기장이가 자기의 계획에 따라 진흙으로 갖가지 그릇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창조시에 하나님은 동일한 재료인 ‘아다마’(אֲדָמָה, ´ádämâ) ‘흙’으로 인간과 동물을 만드셨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해야 한다.30 (92.1)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여 그분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그들이 질항아리처럼 천한 존재로 타락하였다(애 4:2). 인간은 그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길 때 최고의 가치를 얻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뜻에 굴복하는 이들을 최상의 작품으로 만들어 주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을 빼놓으면 동물과 차이가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죽음의 문제를 놓고 볼 때 인간이나 짐승이나 차이가 없다(시 49:12, 20; 전 3:19; 9:4). (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