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를 걸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도 바울의 태도를 표현한 빌립보서 1:21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평화로운 죽음을 언급하는 예들은 죽음보다는 생전에 성취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며, 따라서 그것들을 죽음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396.2)
 노년기의 죽음을 말하는 성경의 견해에 관한 보다 더 분명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노화가 삶에 가져오는 파괴에 집중하도록 한다. 여기서 심지어 가치 있는 삶을 마친 후의 죽음일지라도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음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396.3)
 이 본문은 또한 생명의 종결을 향해 나아가면서 나타나곤 하는 무활동의 문제에 대해 경고한다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구절은 전도서 12장일 것인데, 그것은 한 노인의 슬픈 고백이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기억하라”(1절). 이어지는 구절들은 노년기에 찾아올 수 있는 지혜와 평온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의 경험을 개탄한다. 슬픈 사실은 삶이 신속하고 비통한 끝에 도달하고 되돌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5절). (396.4)
 이렇게 생명이 점점 쇠락해 가면서 죽음이 견딜 만하거나 심지어 환영받는 탈출처럼 보이는 시간이 다가올 수 있지만, 성경에 따르면 그 전체 과정은 바람직하지도 견딜 만한 것도 아니다. 사실 노화 그 자체는 밀려들어오는 죽음의 침략적인 형태인데, 그것은 죄의 저주에 속하고 또한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전 12:1-7).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가특별히 요구되는 시간을 상징한다(시 71:18). 애굽에서 자신의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둘러싸인 야곱의 슬픈 죽음의 장면은 어떻게 노년이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부터 부조들을 가로막는지 보여 준다. 실제로 그것은 삶에 있어서 슬프고 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 곧 어떻게든 극복되어야할무엇으로 구성된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창 48:21).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창 49:29). (396.5)
 자기 아들들에게 자신을 애굽에 내버려두지 말라고 부탁한 야곱의 호소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성경의 반대 예증을볼수 있는데, 성경은 장수와 부유한 삶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생명에 대한 받아들일 수 없는 답변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족장의 요청은 죽음조차 좌절시킬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소망 곧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고정된 소망을 제시한다. (396.6)
 3. 파멸로서의 죽음
 죽음이 언제나 긴 삶의 끝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중간에 대담하게 끼어들어 두려움과 공포를 초래할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의 무시무시한 경험으로서 그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사실상 모세, 다윗 그리고 사도 바울 같은 가장 용감한 성경의 인물들도 죽음 앞에서 항상 영웅적인 것은 아니었다. 변덕스런 사울 왕과 여러 번 대치하던 동안 다윗이 한번은 자신의 친구 요나단에게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 20:3)고 외쳤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것 외에는죽음을구하지 않을 것이었다(눅 22:42). (397.1)
 그러한 죽음의 공포, 특히 삶의 이른 침입자로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성경 전체의 성격을 보여 주고 죽음에 대한 특별한 성경적 이해를 강조한다. 이런 이해는 다른 차원으로 지속되는 존재로 이어지는 현재의 삶에 대한 자연적인 끝 혹은 불가피한 끝이기 때문에 위인들이 그것을 용감하게 직면할 수 있다고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죽음은 모든 생명의 끝, 하나님의 부재, 완전한 어둠을 가리킨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부활의 소망이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으로 남는다. 그것은 홀로 남겨진다는 두려움인데, 죽는다는 것이 홀로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죄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는 두려움이다. 죄인들을 위해 그런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어떤 인간도 소망 없이 죽음을 직면할 필요가 없음을 보증하셨다. (397.2)
 그렇다면 적기이든 때이른 죽음이든, 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둘러싸이든 홀로이든,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죽음에 직면한 사람이 종종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죽음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야훼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 18:5, 6). 반대로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면 죽음의 두려움은 극복된다. “내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4). (397.3)
 성경적 배경에서 죽음의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생명을 위협하는 경험들은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것들과 유사하다. 질병, 전쟁, 자연 재해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심각한 질병은 죽음과 관련 되었고 두려움을 초래했다. 급히 조달한 재료로 엘리사의 사환들 중 한 사람이 준비한 독이든 음식은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왕하 4:40)라는 외침을 초래했고, 모두가 먹기를 멈추었다. 히스기야의 위험한 질병은 그를 죽음으로 위협했고, 그를 두렵게 했으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야훼께 기도하여∙∙∙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2, 3). (397.4)
 전쟁은 젊은이들에게는 때 이른 죽음을 안겨주고 생존한 과부들, 고아들, 부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성경은 전쟁이 진영 양편의 병사들에게 생명의 무자비한 낭비를 초래하는 고통을 준다는 것을 특별하게 인식하고 있다(삼하 2:12-17). 그러나 고통은 전장으로부터 전해지는 죽음의 소식을 받은 이들에 똑같이 크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18:33). (397.5)
 오늘날처럼 성경 시대에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던 자연재해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종종 “하나님의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요나와 함께 다시 스로가기 위해 승선했던 선원들은 폭풍을 두려워했다(욘 1:5). 사실 성난 바다는 종종 죽음의 공포에 대한 원인으로 언급되는데, 그것은 뜨거운 사막도 마찬가지다(사 43:1, 2, 16-20). (397.6)
 생명에 대한 이런 위협들은 심지어 성경의 가장 위대한 위인들조차 때 이른 죽음의 망령을 불러일으켰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몰았다. 예를 들어, 상상할 수 없는 재난들을 직면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려는 유혹을 받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도록 자신의 친구들에 의해 부추김을 받았음에도(욥 15:1-6; 18),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도(욥 1:22),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 대신 그의 개인적 고통이 가장 극심했던 순간에(19:1-22) 자신의 삶을 괴롭히는 모든 재난보다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확신했다. 욥은 죽음을 심히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을 더 신뢰했다(23-27절). (397.7)
 4. 형벌로서의 죽음
 성경은 죽음을 죄에 대한 형벌로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이런 이해는 창세기 2:17을 상기시킨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다시 한번 우리는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출 21:12)와 같이 사형을 주장하는 언약법에서 이 사상과 마주친다. 땅 위의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다른 평야 도시들의 멸망은 죽음에 의한 하나님의 형벌을 싱징했다(창 6:6, 7; 19:15-28; 벧후 3:6, 7;유 6, 7). (398.1)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의 역사에서 우리는 죄 있는 백성들에게 임한 그러한 사형에 대해 읽는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 15:3). 선지자들도 역시 중대하고 회개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모욕했던 개인들에 대해 유사한 형벌을 선언한다(암 7:16, 17).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 베드로는 음모를 꾸민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즉사하도록 했다(행 5:1-11). (398.2)
 성경이 죄인들에게 그렇게 심한 형벌을 선언하고 또 하나님의 품성과 완전히 대조되는 형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사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행동이 그분의 품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제시한다 “대저 야훼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을 이루시리니 그 공이 기이할 것임이라”(사 28:21). 하나님께서 그분의 우주에서 가장 덜 선호하시는 죽은 그분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것 곧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당신의 도구가 된다. (398.3)
 그러한 관점은 죽음을 인간의 형벌로 말하는 성경의 모든 언급을 지배하고 있다. 죽음의 형벌은 호감가는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생명을 보호하고 사회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해 고안된 불가피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울의 선택 이야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사형에 대한 제한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인간 재판관들에게 쉽게 이르러 오지 않는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사람을죽이지 못하리니 야훼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삼상 11:12, 13). 불행히도 사울 왕은 자신의 통치 후기엔 그렇게 관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극형을 시도했다(삼상 14:36-46).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외에 아마도 복수하기 위해서(삼하 3:27) 혹은 개인적 욕심 때문에(왕상 21:8:14) 혹은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에 대한 완전한 오해의 결과 같은 이유 등에서 사형을 남용하는 일이 너무 쉽게 일어난다. (398.4)
 죽음에 대한이 모든경험은아담을통해 전 인류에게 부과된 죄의 삯에 대한 다른 측면들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에녹, 엘리야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 있는 성도들과 같이 승천을 경험하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 죽음은 의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이르러 온다(창 5:24; 왕하 2:11; 살전 4:17). 그것은 인간 가족과 하나님 사이의 두려운 분리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마귀에 의한 공포의 통치 곧 죄의 모든 결과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들은 죽음에 대한 예상이 너무 분명한 것을 직시하고는 “우리는죽음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지만(사 28:15), 그 약속이 폐하여질 것(18절)이라고 말하면서 그것과 타협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컨대, 죽음의 권세와 통치는 죽음과 타협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어떤 인간적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새로운 창조적 행위인 부활을 통해 이 죽음의 통치를 깨트리고 생명에 대한 그것의 지배권을 멸하실 수 있다. (398.5)
 5. 둘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