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이 짧은 구절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말 다음에 쉼표(comma)가 찍힌 것으로 읽을 경우, 이 구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의 두 번째 강도를 당일에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도록 초청했음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보면 죽음 후에도 지속되는 영혼의 존재를 암시하게 된다. 만약 쉼표(comma)가 “오늘”이란 단어 뒤에 찍히면, 의미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 경우 예수께서는 미래에 영생으로 들어갈 것에 대한 현재적 약속을 가리키며, 따라서 “오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약속하신 셈이다. 불행하게도 최고(最古)의 헬라어 필사본들에는 구두점이 없기 때문에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맥에 비추어 이 구절을 조사해야 한다. 구절의 의도는 분명하고 단순한데,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회개한 강도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것이다. 다른 강도 역시 구출을 요청했지만, 회개와 그리스도를 인정함이 없이 그렇게 했다(39절). 이것 때문에 회개한 강도가 그를 꾸짖는다(41절). 따라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과 관련된 영원한 보상이나 형벌에 대한 토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전후의 직접적인 문맥은 세 사람이 극심한 고통을 받던 날과 관련된 구원의 주제를 다룬다. 자신의 대답에서 예수는 회개한 강도에게 구원에 대한 즉각적 확증을 허락하셨다. (393.2)
 행악자는 예수께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 반면,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낙원에 함께 있을 것(구원)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시점이 아니라 행약자의 요청과 예수의 허락의 본질이 중요한 것이다. 틀림없이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날이나 심지어 그 다음 날에 자신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실 것을 아셨지만(요 20:7), 여전히 새로 만난 친구에게 미래의 구원에 대하여 “오늘” 구원의 보증을 주길 원하셨다. 따라서 누가복음 23:43은 구원의 보증을 가르치는 것이지, 죽는 당일에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393.3)
 이 두 성경 본문은 표면상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신실한 자들을 죽음이 자신들의 주님과의 특별하고 즉각적인 관계 속으로 이끌 것이라는 입장에서 생명보다는 죽음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본문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조사는 다른 관점, 곧 성경 나머지 부분과 조화되는 입장을 드러낸다. (393.4)
 사도는 인간 존재를 세 국면으로 나눈다. 첫 번째는 육체 가운데 있는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가 살고 일하거나 옷 입혀진 지상의 장막으로 설명된다(고후 5:1: 빌 1:22, 24). 두 번째 국면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벌거벗음 곧 옷을 벗은 상태로 설명된다(고후 5:3, 4). 사도는 변화의 경험을 통해 이 단계에서 벗어나길 원하는데(고전 15:51-57; 고후 5:4), 이는 벌거벗음 곧 죽음이 자신의 사역을통해 교회에 유익을 끼칠 수 없는 곤란한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빌 1:24). 다른 곳에서 거듭거듭 바울은 죽음을 잠으로 언급하면서, 죽음이 아직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무활동의 기간으로서 교회에 유익을 끼칠 수 없는 막간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고전 15:6, 51; 살전 4:14). 세 번째 국면은 부활의 삶을 대표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집으로 설명된다(고후 5:1). 분명히 이 부활의 국면은 사도의 궁극적 열망을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를 주님께로 가까이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6, 8절;빌 1:23). (393.5)
 이 세 번째 국면은 오직 죽은 자들이 시간의 경과를 인식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수면으로써만 지상적 삶이라는 첫 번째 국면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본문이 이 두 국면을 평행시켜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빌 1:23). 죽음 자체가 아니라, 오직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나 산 자들로부터의 숭천만이 사도를 마지막 국면으로 데려갈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그가 승천을 선택할 수 있다면(물론 어떤 방식으로든지 생명이나 죽음이나 하나님의 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지만), 그래서 그의 증거와 봉사가 향상될 수만 있다면 그는 죽음(벌거벗음)을 원치 않을 것이다(고후 5:9; 빌 1:20-25). 죽음 곧 벌거 벗음의 상태에 관해 말하자면, 사도는 성경의 증인들과 합하여 죽음을 공박하고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날을 바라본다(고후 5:4;참조 부활 I. A. 2. a). (394.1)
 위에서 언급한 본문들은 죽음 이후와 하나님의 성도들의 부활 전에 모종의 삶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잠자는 자들을 데리고 오신다고 읽는다. 난해한 질문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데려오실 그 “성도들”에 관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오지 않고, 문맥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히려 그들이 무덤으로부터 일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가게 될 것이다(참조 고전 6:14; 고후 4:14). 이 구절에서 질문은 재림의 소망가운데 죽은(혹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관련된다. 그들은 살아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보다 상황이 나쁠 것인가?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 죽음을 두려워하는 산 자들에게 그들이 뒤에 버려진바 되지 않고(살전 4:15), 심지어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자신의 주의를 기울이기 이전에 재림의 소망 가운데 죽은 자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보증한다(16, 17절).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도들과 함께하시는 일은 죽은자들의 부활 이후가 될 것이고, 또 산 자들의 승천 이전이 될 것이다(참조 묵시문학 I. A. 2. A). (394.2)
 두 본문은 “영들”(spirits)과 “영혼들”(souls)에 대해 마치 그것들이 이미 죽은 인격체들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 첫 번째 것은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이란 표현에 나타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계 6:9) 제단 아래 있는“영혼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 본문들은 상징적 언어의 두 다른 용례를 예시한다. (394.3)
 첫 번째 경우에서 사도는 두 무리, 곧 시온산에 온 본래의 히브리인들(히 12:18, 19)_과 히브리서의 수신자로서 시온산에 온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22절) 사이를 구분 짓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으로 봉사하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라는 초청을 받는다(히 4:16).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교회 혹은 하늘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시온산에 모인 이들 중에는 무수한 천사, 천국에 입적된 장자, 우리의 심판자 하나님 그리고 완전케 된 의인들이 있다. 시온산에서의 첫회집(히 12:18-21)과 더불어 시온산에서의 이 두 번째 모임은 하나님의 성도들, 천사들과 사람들 그리고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 예수에 의해 중재된 새 언약을 통해 믿음으로 장자 된 자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육체가 없는 성도들이 아니라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25절)고 사도가 호소했던 생존한 사람들이었다. (394.4)
 두 번째 본문은 상징적으로 다섯 번째 인 아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한다(계 6:9-11). 그것은 무죄하게 흘린 피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시행되지 않은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의 운명에 대해 알려 준다. 도움을 위해 하늘을 혜 외쳤던 무죄한 아벨의 피처럼(창 4:10), 이 순교자들의 피는 상징적으로 자신들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돌봐주실 것을 요청한다. 말하는 피라는 이미지는 성경에서 친숙하다(참조 히 12:24). 그것은 그 피에 의해 대표되는 생명의 음성, 곧 피를 흘림으로써 취해지거나 주어진 생명의 음성을 가리킨다. 그것은(아벨과 제단 아래의 성도들의 경우) 공의와 보웅에 대해 그리고(그리스도의 경우) 은혜와 용서에 대해 말한다. 제단 아래에서부터 땅에 공의를 행사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몸에서 분리된 영혼들이 아니라 피, 곧 이 순교자들이 부당하게 빼앗긴 무죄한 생명이다. 대답은 이중적 보증으로 되돌아온다.

   첫째, 그들에게 흰 옷이 주어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으셨고,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을 둘렀으며, 또 그들이 부활에서 버려진 바 되지 않을 것임을 가리킨다(살전 4:15).

   둘째, 그들은 기다리면서(열려야 할 두 개의 인이 남아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무덤에서 좀 더 쉬도록 지시받는다(계 6:11).

 오래 전에 죽은자들이 간직했던 부활의 소망을 말하는 이 상징적 진술에서 죽은 자들은 어떤 능동적 역할도 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죽은 자들이 부활의 시간에 호명될 때까지 무덤에서 쉰다는 성경적 이해를 확증한다. (395.1)
 F. 부활과 죽음의 근절
 죽음은 단순히 인간 존재의 자연적 전이(轉移)가 아니라 생명을 지배하고 생명을 끝으로 내몰 뿐 아니라 파멸시키는 능력임을 살펴보았다. 죽음은 심지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형벌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것은 여전히 생명과 하나님의 적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최종적 근절은 부활 후가 될 것인데,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는 깨어진다. 그리하여 이것은 죽음의 세력을 끝장내고, 따라서 죽음 그 자체가 결국 뿌리 뽑힌다(참조 재림 I. G. 1-3; 부활 I, II;새 땅). (395.2)
 1. 죽음의 권세
 성경은 죽음의 권세를 묘사할 때, 이 세상에서 인정되는 하나의 존재, 지배권, 세력으로 죽음을 의인화한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죽음이 왕노릇 하였나니”(롬 5:14), 이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죽음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기(17절) 때문이다. 이 죽음의 권세는 죽음이 현 세상과 그 거주자들을 다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레미야는 희생자들에 대한 고려나 배려 없이 어디에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인간의 삶에 침투하는 권세를 지닌 대적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저 죽음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렘 9:21). 죽음은 죄(롬 5:17)와 마귀(히 2:14)를 통해 이 권세를 행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부과하는데, 이는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롬 5:12, 13). 역으로 말해 “죽는날을주장할자도 없”다(전 8:8). (395.3)
 2.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
 죽음의 세력은 죽을 병, 치명적인 사고 혹은 사형 등의 경우에서처럼 생명의 부자연적인 중단을 너무나 자주 불러일으키지만, 또한 그것은 단순히 노화의 과정을 거쳐 온 삶을 끝내게 하는데, 그것은 온건한 형태의 죽음이다. (395.4)
 175세에 “아브라함이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창 25:8). 의로운 삶에 대해 욥에게 조언하면서 엘리바스는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욥 5:26)고 약속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만나면서 야곱은 요셉에게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창 46:30)라고 말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재(再)헌신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라고 외쳤다. (395.5)
 이 구절들과 다른 구절들이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성경은 죽음을 놓임 곧 삶의 자연스런 종결로 인식할 뿐 아니라, 길고 험난한 삶의 경우에 있어서도 죽음을 환영받는 해방으로 인식한다. 성경은 사람들의 죽음을 단순히 삶의 끝으로 무덤덤하게 표현하곤 한다 이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극복해야”하기 때문에 그것과 “화해하려는” 오늘날의 태도와 조화된다. 그러나 성경은 과연 “죽음과 화해하라”고 우리를 초청하는가? (3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