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혹은 “죽음의 영역”(눅 10:15; 행 2:27, 31; 계1:18; 20:13, 14)으로 번역된 신약의 용어 하데스는 구약의 용어 셔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90.4)
 하데스가 사망 시 불의한 자들을 기다리는 형벌의 중간 장소를 의미한다는 대중적 신념은 팔레스타인 탈무드에서 발견되는 유명한 유대인 설화와 유사한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대한 배경이 될 수 있다(눅 16:19-31; 참조 Jeremias 183-187). 설화는 화려한 장례식 후 하데스에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부자 세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반면, 그의 죽음이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던 가난한 학자는 낙원에 도착해 있다고 말한다. 설화의 초점은 정결을 위한 중간 장소로 인식된 하데스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 설화를 각색하여 하데스에 관한 그 결론을 뒤집어엎으시고, 한 사람의 운명이 사망시 봉인되기 전 현재의 삶에서의 도덕적 책임을 말하는 비유로 그것을 바꾸셨다. 연옥에서처럼 하데스에서 잘못을 수정할 두 번째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원래 이야기에서 발견된 대중적 신념을 파기함으로써, 예수는 셔올의 의미, 곧 “무덤”으로서의 하데스에 대한 본래의 성경적 이해를 회복하셨다. 예수는 연옥교리에 대해 알지 못하셨다. (390.5)
 불의한 자들에 대한 형벌로서의 죽음에 대한 강조는 게헨나(헬라어 게엔나, 히브리어 게힌놈)라는 용어의 생동감 넘치는 추가적인 표현에서 주어진다. 쓰레기 처리와 몰렉 숭배를 위해 사용된 고대 예루살렘의 남쪽 계곡(왕하 23:10; 렘 7:31, 32)을 가리키는 그곳은 죽음 및 형벌과관련되었고, 신약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옥”으으로 번역된다(마 5:22, 29, 30; 23:15; 막9:43-47; 약 3:6). 하지만 여기서 그것은 장소만큼이나 운명, 곧 불의가 초래할 죽음을 의미한다. (390.6)
 이렇게 죽음의 영역은 무덤, 셔올, 하데스, 게엔나 그리고 지옥 등과 같이 다양하게 불린다. 이 용어들은 각각 단순히 죽은 자들이 매장되는 무덤을 의미한다. 성격상 무덤, 곧 죽음의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에 정반대되는 곳(시 139:8)이자 죽은 자들이 회귀할 수 없는 곳을 의미한다(욥 17:11-16). 사람은 홀로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부활을 제외하고는 그곳으로부터 돌아올수 없다. (390.7)
 3. 죽은 자들의 상황
 성경은 생생한 시적 형태로 죽음의 영역을 묘사한다. 죽은 바벨론의 왕이 무덤, 곧 셔올에 도착할 때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사 14:9)라고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한 이런 성경적 묘사는 향나무와 백향목(8절), 구더기의 침상과 지렁이의 담요에 대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이다. 죽음의 상태에 대한 이런 이미지들은 사망 시 모든 일상의 생명 과정들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중지한다는 결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죽으면 일이 멈추고, 그에 따라 보상도 멈춘다(전 9:5). 사랑 미움 그리고 질투는 물론 생애의 사건들에 참여하는 것도 사라진다(6절). 생각, 지식 그리고 지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5, 10절). 죽은자들은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시 146:4),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시 6:5; 전 9:5), 죽음 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없다(시 88:10, 11; 115:17; 사 38:18). (391.1)
 4. 잠으로서의 죽음
 위에서 언급된 죽은 자들의 상태를 말하는 모든 상징적 묘사 대신 성경은 죽음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잠이라는 은유를 선호한다(신 31:16; 왕상 2:10; 욥14:12; 단 12:2; 마 9:24; 27:51, 52; 요 11:11; 행 7:60; 고전 15:18, 51; 살전 4:13). 성경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이 적절한 은유는 나사로의 부활 소식에서 예수의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예수께서 행하신 가장 놀라운 기적, 곧 육체가 부패하기 시작한 이의 부활을 전하는 그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교훈적이다. 예수는 우선 교사이고, 다음으로 기적을 행하는자이다. 그는 자신의 괴로워하는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능력, 자신의 죽음과 부활 죽음의 본질 그리고 부활의 소망에 대해 가르치신다(요 11:1-44). (391.2)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예수는 우선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알려주시고, 그 결과 그들은 나사로가 틀림없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쁘게 말한다. 그들이 나사로가 사실상 죽었음을 깨달았을 때,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라고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예수는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다가올 부활의 기적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면서도 나사로의 죽음이 그의 가까운 친구들에게 가져올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처음에는 부드러운 잠의 이미지를 채용한 것이 틀림없다. 명백히 무의식 가운데 있는 잠의 상태는 죽음의 상태를 잘 묘사한다. 더군다나 잠은 일반적으로 깨어남을 동반하는데, 이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생생하게 상징한다(23절). (391.3)
 나사로의 부활은 요한복음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대적들 사이에 전선(戰線)을 긋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진술하셨고(40-42절), 반면 그의 대적들은 그를 죽이려고 결정했다(53절). (391.4)
 죄의 자연적인 결과인 죽음은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이 되었다. 죽음의 종국은 넷째 날 부패된 몸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생명은 남아있지 않고, 존재는 끝장났다. 그러나 나사로는 하나님에 의해 깨워지길 기다리면서 잠자고 있다. 따라서 죽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잠의 은유는 죽음의 종국과 부활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리킨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대단히 중요한근간을 이룬다. (391.5)
 죽음의 상태에 대한 모든 성경적 은유들 중 잠의 은유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존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은 자들에 대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 은유는 생각, 계획, 사랑, 소망, 믿음 같은 모든 정상적인 정신적 기능들이 사라지는 무의식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으로 죽는 경험을 묘사한다(전 9:5, 6, 10; 시 88:3-7). 잠의 은유는 죽음의 성경적 이해는 물론 깨어나는 것과 유사한 사건인 부활의 개념 모두를 잘 설명한다(살전 4:15-18). (391.6)
 D. 접신과 강신술
 사후 존재에 대한 신념은 고전 헬라 저술들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그것은 고대 근동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사울과 엔돌의 신접한 여인 이야기(삼상 28:3-19)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한 용도로 안장된 도기(陶器)를 포함하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무덤은이 신념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전혀 일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개념을 단호하게 정죄한다. 그러므로 접신, 강신술 혹은 무당의 도움을 통해서 죽은 자들과 소통하려는 시도들은 단호히 싸워야할 미신으로 정죄된다(출 22:18; 레 19:31:20:6, 27; 신 18:9-131; 사8:19, 20). (392.1)
 사울과 엔돌의 여인에 관한 독특한 이야기는 무당을 통해서 죽은 선지자 사무엘과 소통하려는 왕의 필사적인 시도에 대해 말한다. 그 이야기는 사울이 이때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고(삼상 19:9-17; 28:3-10), 그가 꿈, 우림 그리고 살아있는 선지자들에게서 답을 얻을 수 없어서(삼상 28:6) 죽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시도했음을 분명히 한다. 분명히 그는 무당이었던 엔돌의 여인과만 얘기했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엔돌의 여인만이 뭔가를 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아니라 단지 사울만이 유령으로 나타난 사무엘을 알아보았다고 주장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는 동안 사울은 그녀의 간략한 묘사에 기초해서, 겉옷을 걸친 노인처럼 보이며 여인이 “신”(god)으로 묘사한, 땅으로부터 올라온 그 유령을 자신이 찾고 있던 자, 곧 사무엘(11-14절)과 동일시하였다. 요컨대, 이 이야기는 죽은 선지자의 실재적인 임재에 대해 증언하지 않는다. (392.2)
 더욱 중요한 점은 사울이 사무엘이 아직 생존했을 동안 그 선지자에게 들은 종전의 보고들로부터 그가 이미 안 것을 제외하면 이 경험에서 안 것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17절;참조 삼상 15:23, 27, 28). 그 메시지를 사울은 두려워했고 뒤집고 싶었다. 이 이야기에서 사악한 요소는 영적 매개를 통해서, 다른 데서는 얻을수 없는 정보를죽은자들로부터 얻을수 있다는 거짓 사상에 놓여있다. 죽은 사람을 흉내 내는 시도는 거짓되고 쓸모 없으며 영매에 의해 도움 받은 마귀의 대리자들의 일로 구약에서 분명하게 정죄되고 있다. 죽은자들로부터 어떤 정보도 얻을수 없는데, 그 이유는 사실상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전 9:5, 6). (392.3)
 이 근본적 원리에 비추어, 이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한 몇 가지 독특한 성경적 묘사를 제시할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가 죽음 후 인간 존재의 상실을 묘사하는 은유적 언어를 다루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 및 인간과 더불어 살고 소통하기에 불가능한 것으로 특징지어진 저승(르파임)으로 죽은 자들의 땅을 말한다(시 88:10; 잠2:18, 19; 21:16; 사 26:14). 르파임“저승”이라는 용어는 영혼(네페쉬) 혹은 영(루아흐)과 같은 단어들이 전달하는 존재의 속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 단어는 어디에서도 정상적인 인간 존재의 삶과 결부 된 방식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를 묘사하지 않는다 죽음, 즉 르파임의 상태는 모든 의식의 부재를 암시한다. 사실 르파임은, 모종의 추정된 최소한의 삶을 누리는 유령들이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해 알려진 모든 특성을 전달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전 9:5). 그들은 말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고(시 6:5; 88:11; 115:17), 그들의 생각과 계획은 사라지고(146:4),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도 못하며(욥 7:21) 소망도 없다(사 38:18). (392.4)
 E. 죽음을 다루는 독특한 신약 본문들
 신약의 몇몇 구절은 생명과 죽음에 관한 전반적인 성경적 이해에 비추어 독특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하지만 중요한 증거들을 간단하게 검토해 보면, 영혼의 비불멸성에 대한 성경적 개념과 근본적으로 조화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 본문들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원하면 독자들은 주석서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3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