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에 대한 성경의 설명(창 3; 4; 6장)은 세상에서 죄와 죽음의 전파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 두 개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타락에 대한 인류 최초의 경험은 그의 심판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질문에서 표현된다. “네가 어디 있느냐”(3:9)라는 질문은 개인적인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개인들과 관련된 것이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심판 역시 동일하게 개인적인(개인적인 사형 선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선 죄인에게 선고된 것으로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그러나 죄와 죽음은 개인에게만 머물 수 없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어서 “타락”하였거나 결함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387.6)
 창세기 4장은 첫 인간가족의 일상 삶을 묘사하고, 곧바로 죄와 죽음이 어떻게 형제가 형제를 죽임으로 수평적으로 퍼졌는지를 보여 준다. 죄와 죽음은 그의 두 번째 심판 후에 주어진 두 번째 질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제 사회적 차원을 드러낸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라는 질문은 사회적이며 또한 소규모 사회 집단의 직계 구성원들인 가족과 관련된 것이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절)는 심판은 사회와 관련된 것인데, 그것은 가장 기초 수준인 직계 가족을 붕괴시켰다. (388.1)
 창세기 4:23은 자신의 아내들 앞에서 부르는 라멕의 오만방자한 노래를 기록하는데, 그것은 한 젊은이가 사소한 잘못에 대한 처벌로 살해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생명은 싸구려가 되고 죽음은 만연해졌다. 죄와 죽음이 전 인류, 곧 온 세상을 침공했다(창 6:1-8). 오랜 세월 후에 선지자는 죽음의 보편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야훼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6, 7). (388.2)
 죄의 결과들은 수평적 확장에 만족하지 않고 깊이와 높이에 있어서 수직적으로도 확대되고, 이와 더불어 죽음이 이르러온다 요람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삶은 죄에 감염되었고, 죽음의 저주에 지배당하고 있다(시 51:3-5). 사회 전체가 황폐와 죽음이 백성과 땅 그리고 시설들을 위협하는 악화된 방식으로(사 1:6) 죄와 죽음으로부터 고통당한다(7-9절;참조 죄론 IV. A-K). (388.3)
 죽음의 원인에 대해 질문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한 최초의 피조물의 반역, 곧 인간이 그것을 경험하기 전에 있었던 최초의 불법의 비밀(살후 2:7)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죄의 원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최초의 유혹과 타락에 대한 인간 경험뿐 아니라, 인간 가족과 우리의 세상에 끼친 그 영향력으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한다. 이 질문들의 첫 번째 것에 대한 대답은 철학적이고 역사적이다 죽음은 시간적으로는 창조 이전의 시간 속에, 공간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에 위치할 수 있는 근원을 가졌다(사 14:12-14). (388.4)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죽음이 죄에 빠진 타락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계속적인 반역이라는 인간 경험 안에도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사 1:2-6). 따라서 우리는 죽음의 원인이 하나님의 옛 대적이 빛 대신 어둠을 선택했을 때 발생한 것으로 보지만, 인류 역시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성경은 이 경험을, 은혜로부터의 타락이자 생명나무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임재로부터의 추방으로 묘사한다(창 3:22-24). (388.5)
 최초의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무죄하고 완벽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6, 27), 죄를 향한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상에 출생한 결과로, 이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모든 인류가 공유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 죽음에 참여하게 되었다(롬 5: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진 거울이 모습을 비쳐주듯이 타락한 인류도 여전히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진 않더라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반영할 수 있다. 성경은 타락 이야기(창 3장)에 최초의 구속의 보증(15절)—그의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을 포함시킴으로써 이미 이 어려운 개념을 확인하였다. 그동안 세상은 영적 전쟁의 배경, 곧 인류의 지속적인 존속을 위한 생명과 죽음 사이의 투쟁의 장이 되었다(14-19절). 따라서 은혜로부터의 타락, 곧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것이 전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엡 4:18; 롬 5:1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두에게 값없이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덕분에 손상된 형상이 회복되고 결국 영생으로 향하게 된다(롬 5:15-21;참조 구원론 I-IV; 대쟁투 II. E). (388.6)
 C. 죽은 자들의 상태
 죄와 죽음이 온 세상에 만연하게 된 것은 죽음을 현재적이고 일상적인 인간 경험으로 만들었다. 달갑지 않은 손님이 자주 방문하는 것처럼, 죽음은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을 요구하기 위해 우리 가족들을 대담하게 찾아온다. 이것은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한 질문들을 불러일으키고,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일치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상실을 애도하고 죽은 이들을 흙으로 돌려보내는 비통한 일을 해야 하는 유족들을 남겨둔다. (389.1)
 1. 매장과 무덤
 성경은 장례와 매장에 대한 빈약한 정보만 담고 있다. 특정한 풍습들 중 죽은 자들의 눈을 감겨주는 일반적 관습(창 46:4)을 주목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죽음이 잠과 유사함을 가리키기 위함일 것이다(I. C. 4). 가족은 몸을 끌어안고(50:1), 또 아마도 지체 없이 매장을 위해 준비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시신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389.2)
 시신은 수의를 입히거나 베로 감싼 채 매장됐다(마 27:59; 요 11:44). 군인들은 그들의 무기들과 함께 매장될 수 있었다(겔 32:27). 그리고 적어도 신약 시대에는 장례 의복에 향유들이 추가되었다(요 19:39, 40). 야곱과 요셉의 두 경우에서만 언급된 방부 처리(창 50:2, 26)는 애굽의 관습(3절)을 따른 것 같다. 요셉의 경우 관의 사용(26절)도 애굽의 풍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의 경우에서처럼 화장(삼상 31:12)은 일반적인 관습이 아니었던 것 같다(대상 10:12은 사울의 화장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암 2:1은 왕의 무덤에서 뼈들을 불태우는 것을 비난한다). (389.3)
 일반적으로 몸은 지하의 구덩이나 무덤(수 24:32)에 매장되는데, 아마도 그것은 자연 바위 동굴이나 깎은 동굴(창 23:8, 9; 50:5; 마 27:60) 혹은 사람이 만든 일종의 장례용 내실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왕상 14:31). 무덤(케베르)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히브리어 단어는 단순히 땅 속에 파이거나 깎인 구덩이를 의미하는데, 헬라어 단어(므네메이온)는 묘비, 비문 혹은 심지어 죽은 자들이 안치된 내실을 포함하는 구조물을 가리키는 기념물의 개념을 내포한다. 후대와 일반적으로 신약 시대에 와서 납골당(돌이나 점토로 된 작은 용기)에 뼈를 안치하는 2차 매장이 시행되었다. (389.4)
 가난한 사람들이 평범한 무덤에 매장되었던 것(왕하 23:6; 렘 26:23)에 반해 부자들은 아마도 기념적인 묘비(삼하 18:18)까지 갖춘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무덤들(사 22:16)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무덤들은 가족에게 속했기 때문에 죽는 자들은 자기 조상들의 무덤에 매장되려는 그들의 소망을 표현할 수 있었다(창 49:29-33; 삿 8:32; 삼하 19:37). 결과적으로 큰 무덤들은 옛날 유해들이 비워지고 그 후 재사용 될 수 있었다. (389.5)
 죽은 이들을 위한 애도에는 매장 활동이 수반되었고, 그것은 옷을 찢고(창 37:34), 굵은 베옷을 입고(삼하 3:31), 머리에 흙을 뿌리고(수 7:6), 또한 큰 소리로 우는 것(눅 8:52)을 포함했다. 종종 고통, 슬픔 그리고 상실을 표현하기 위해 짧거나 긴 장송곡이 작곡될 수도 있었다(삼하 1:17-27; 렘 22:18). 당연히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규정된 장례식을 전반적으로 간소화하고 매장과 관련된 의식에 드는 비용을 크게 절감하도록 도와준다(창 23:2; 37:34; 신 34:8; 삼상 25:1; 렘 22:18; 마 9:23; 눅 23:55-24:1). 고대 장례식과 연관된 기타 의례들은 성경에서 금지되었다(레 19:27, 28: 신 14:1). 시체를 만지는 것은 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었고(민 5:2; 19:11-19), 추가적인 금지사항들이 제사장들에게 적용되었다(레 21:1-4; 10-12). (389.6)
 분명하게 성경은 생명과 죽음 사이, 산자와 죽은자 사이에 확실한 선을 긋는다. 양쪽은 분리되었고 둘 사이에는 접촉이 없으며, 또한 그 선을 넘으려는 시도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장례와 매장은 삶을 기억하고 그 상실을 애도하면서 시체를 안치하는 데 있어서 질서정연하고 정중할뿐아니라 간결한 절차이다. (389.7)
 2. 죽음의 영역
 성경은 죽은 자들의 장례식 후 그들 대해 할 말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인간 본질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죽은 이들이 몸의 생명으로부터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오직 생명의 전적 상실을 표현하는 언어적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매장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390.1)
 따라서 그것은 죽은 이들을 이제 무덤의 묘실에서 그들의 선조들과 합류하거나 쉬는 이들로서 세상을 막 떠난 자들로 묘사한다(창 15:15; 왕상 14:31). 잠언 2:185:5은 무덤으로 향하는 길을 죽음을 향하는 내리막길, 곧 셔을(스올)로 가는 길로 묘사한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죽음이 잠복하고 있는 방의 장면을 관찰한다(7:27; 9:18). 도시처럼 그것은 죽은 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들을 가지고 있다(욥 38:17; 사 38:10). 그것은 침울, 어둠, 그늘(욥 10:21, 22; 시 143:3), 흙(시 7:5; 창 3:19) 그리고 침묵(시 94:17; 115:17)으로 특징지어 지고, 구더기가 있는 곳(사 14:11)이다. (390.2)
 몇 가지 전문 용어가 죽음의 영역을 묘사한다. 폐허, 무가치한 장소라는 의미로 추정되는 셔올은 무덤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다(창 37:35; 왕상 2:6; 잠1:12). 죽음에 가까이 있는 이들, 곧 그것의 탐욕스런 욕구에 의해 삼켜지거나(사 5:14; 합 2:5) 그 올가미에 걸려들려는 이들(삼하 22:6; 시 18:5)은 그 문들 혹은 입 근처에 산다(사 38:10).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셔올과 유사한 표현들로는 에레츠 타흐티트(“지하세계”[겔 31:14])와 아밧돈(“파멸의 장소”[욥 26:6; 시 88:11; 잠 15:11]) 그리고 샤하트(“구덩이”[사 38:17; 시 16:10]) 등이 있다. (3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