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용어는 이 통일체적 견해와 시종일관 조화된다. 따라서 히브리어 단어 바사르(“육신”[시 38:3]), 헬라어 단어 소마(“몸”[롬 7:24])와 사르크스(“육신”[갈 4:13,〈제임스왕역〉])는 사람의 한 부분 곧 영혼에 대적하는 것으로서 몸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성이라는 특정 관점에서 바라본 전인을 묘사한다. 이와 유사하게 히브리어 용어 네페쉬(“영혼” 혹은 “존재”[창 2:7]와 헬라어 프쉬케(“영혼” 혹은 “생명”[롬 16:4])도 한 사람의 전존재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사망 시 끝나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적 생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본질을 묘사하는 다른 용어들—히브리어 루아흐(“영”[사 19:3]), 헬라어 프뉴마(“영”[고전 7:34]), 히브리어 레브(“마음”, “정신”[시 90:12])—은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전인]를 가리키기데 사용되었다(참조 인간론 I. E. 1-3). (383.2)
 성경은 인간의 본질을 통일체로 이해하기 때문에 죽음이 영혼으로부터 육체를 분리함으로써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영혼 불멸성)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은 생명 전체를 완전한 종결로 이끈다. 인간 생명의 어떤 기능도 죽음 이후까지 생존하지 않는다. 인간 본질에 대한 이런 통일체적 이해는 건강 관리, 사회봉사, 교육 그리고 필요한 이들을 위해 제공되는 기타 봉사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특정한 문제를 위한 치유 혹은 보살핌을 시도 할 때, 전체로서의 인간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육체적 질환과 정신적 질환은 상호 밀접히 관련돼 있다. 정신, 마음 그리고 몸은 참된 교육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영적 및 정신적 문제는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 본질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우리 사회가 직면하는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광범위한 결과들을 낳는다. (383.3)
 5. 죽음과 삶의 기억
 죽은 자들의 삶에 대한 다른 이들의 기억은 죽음 이후까지 살아남는 인간 존재의 한 양상이다. 현재적 삶의 모든 양상은 사망 시 그 끝에 도달하지만, 제대로 산 삶의 기억은 죽은 이들을 위한 물질적 기념물이 아니라 생존한 자들의 마음속에 일정기간 동안 유지된 산 기억 속에서 머무르고, 또 하나님의 마음속에 영원히 보존된다(사 49:15; 느 13:14, 22, 31). 그러므로 하나님께 충실히 살다 죽은 이들의 개성과 품성의 기억은 그들을 쓰러트린 죽음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마지막 날에 침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보존될 것인데, 그때 하나님은 빼앗겼던 생명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고전 15:54-57). 생존자들에 의해 기억되고 하나님의 마음속에 보존된 죽은 이들의 품성은 이 땅에서의 삶과 부활한 삶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383.4)
 6. 부활을 기다림
 성인이나 죄인을 막론하고 누구도 사망 시 구원 혹은 파멸이라는 최후의 보상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부활을 기다려야만 한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자가 다 그의 음성을들을 때가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참조 단 12:2). 죽음은 진실로 살면서 행한 것에 따르는 모두의 운명을 봉인하지만 죽은 당사자들은 말하자면 적신이자 발가벗겨지게 되는데, 이는 잠자는 것처럼 부활과 심판 그리고 그들 각자의 보상을 기다리면서 인간 행위들에 대해 의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후 5:1-4, 10; 히 9:27).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 혹은 사망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불멸의 몸, 불멸성(고전 15:52-54) 그리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살전 4:17)로 이끌 생명의 부활 혹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한 이들을 위한 파멸과 영원한 멸절을 가져오는 죽음의 부활(마 25:31-46; 계 20장) 둘 중 하나의 부활로 귀결된다. (383.5)
 불멸성은 하나님 한분께만 속한 것이다(딤전 6:15, 16). 어떤 인간도 조건적인 불멸을 제외하고는(창 2:17) 이 선물을 소유할 수 없고, 죽음이 세상을 다스리는 한 누구도 그것을 주장할 수 없다(롬 5:12).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성을 밝히 보여 주셨다(딤후 1:10). 이 세상 끝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은 죽음을 멸절함으로써 당신의 성도들에게 불멸성을 부여하실 것이다(참조 고전 15:51-55;부활 I-III). (384.1)
 B. 죽음:그 기원, 대행자들 그리고 영향
 지금까지 죽음에 대한 용어, 생명과 죽음의 정의들, 생명에서부터 죽음으로의 전이(轉移)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죽음의 기원과 대리자와 영향으로 주의를 돌려보자. 죽음의 원인,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대리자들 그리고 세상에 만연한 죽음의 실존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는가? (384.2)
 1. 죽음의 원인
 성경은 죽음의 기원을 죄의 탓으로 돌린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개인적 수준에서 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법이다(시 51:4; 눅 15:21). 그것은 하나님의 반대편이자(사 1:2-6) 그의 품성으로부터의 이탈을 나타내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롬 3:23)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원인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맞섬으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참조 인간론 II. A, B; 죄론 III. A, B). (384.3)
 성경에 따르면, 죽음의 개념에 대한 최초의 소개는 창조 후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다.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 17). “정녕 죽으리라”(히브리어 모트 타무트)는 표현은 강조 형태인데, 이는 불순종이라는 범죄의 결과로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384.4)
 창세기 2장의 이 본문은 비록 하나님과 죽음 사이의 어떤 인과관계를 암시하진 않지만 하나님, 죄인, 죽음을 밀접하게 관련짓는다. 그러나 창조 이야기에서 이미 죽음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성경은 죽음이 결코 생명으로부터 동떨어져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는 유혹자의 거짓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이 오기 때문에 무적의 것임을 암시하지만, 이와 달리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바로 그 생명의 뒤꿈치를 따를 가능성을 지녔다고 가르친다. 사실상 죽음은 생명의 상대 혹은 반대로 간주될 수 있다. 심지어 인류에게 최초로 죄와죽음을 초래한 유혹자(뱀)도 본래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살아 있는 피조물들 중 하나였지만(창 3:1) 후에는 죽음의 대리자가 되었다. (384.5)
 만약 우리가 죽음의 기원에 대해 더 깊이 조사하고자 하면, 고대의 어떤 종교들에 의해 제시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의 반대쪽 끝에서가 아니라,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보좌 가까운 곳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활동들을 취소하거나 뒤엎으려고 하는 악의 권세가 존재한다. 성경은 생명의 하나님의 상대자, 곧 모트(시리아), 네르갈(메소포타미아), 오시리스(이집트), 하데스(그리스) 같은 신들처럼 우주의 반대쪽 끝에서 지하세계를 통치하는 죽음의 “신”의 독립적 존재를 어디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창세기 1-3장 배후에 놓여 있다. (384.6)
 요한일서 3:4, 8에 따르면, 죄인들은 불법의 사람들로서 “태초부터” 범죄 한 마귀에게 그들의 충성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원칙과 지도하심에 맞서고 반대하는 개인들이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지지자들이 용, 옛 뱀, 사탄, 꾀는 자로도 언급되는 마귀의 암흑 세력과 싸우는 하늘의 전쟁에서 일어났다(계 12:7-9). 마귀는 비록 패배하였지만(“땅으로 내어 쫓기니”[9절]) “죽음의 세력”(히 2:14), 곧 죄와 죽음에 의해 보증된 세력으로 등장했다. (384.7)
 무법, 죄, 죽음의 시작에서부터 마귀의 활동들을 추적하는 이 복합적 상황의 국면들은 구약에서 더 자세히 밝혀진다.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 하나로서 빛나는 계명성(사 14:12)이었던 루시퍼는 하나님의 하늘보좌를 찬탈하려는 시도(13-15절)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죽음으로 내던져지는 교만한 바벨론 왕(4절)으로 상징된다. 이와 사하게, 하나님의 완전한 피조물들 중 하나를 상징하는 두로 왕(겔 28:2)은 불명예스런 죽음을 당하기 위해 구덩이로 던져지는데(8, 16-19절), 이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감히 스스로 신성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6, 13, 14절). 죄와 그로 인한 죽음은 불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운 곳에 있는 그분 자신의 피조물들 중 하나에게서 유래되었다 죄는 창조주의 면전에서 피조물의 교만과 오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피조물인 루시퍼가 마귀가 되었다. (384.8)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이탈한 이 타락에 이어 뱀(창 3:1)과 사탄(욥 1:6) 같은 호칭을 가지고 활동하는 마귀는 성공적으로 우리의 첫 조상을 속였고, 죄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한 권리를 확보했다. 마귀는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일시적 권한을 주장했지만, 욥이 정확히 이해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그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었다(욥 1:21; 19:13-27). (384.9)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 자신의 보좌 가까이 있는 존재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추적하지만, 죄와 죽음이 조금이라도 신성의 한 부분임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유일신 사상은 성경에서 절대적이다. 본성이 악하거나 선하거나 간에 다른 어떤 신도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유일하신 하나님과는 겨루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도 두 충돌하는 본성, 곧 선하고 생명의 근원이 되는 한 본성과 악마적이고 죽음의 근원이 되는 다른 하나의 본성을 소유하지 않으신다. 성경도 세상에서의 세력과 지도력을 위해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하여 충돌하는 두 신적 능력이 투쟁하는 이원론적 개념을 제안하지 않는다. 위협적인 악의 세력을 달래는 것을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려고 고안된 예식은 예배의식 어디에도 없다. (384.10)
 죄와 죽음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원되었지만 결코 하나님 자신 곧 신적 존재에게서가 아니라 피조물 곧 빗나간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 하나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도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을 죽음을 초래한 장본인이라고 비난할수 없다.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들 중 하나에 의해 시작된 죄를 경시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스스로 큰 대가를 치르시고 그분은 몸소 그것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신다. (384.11)
 하나님의 면전에서보다 더 강렬하게 생명과 죽음 사이의 투쟁이 휘몰아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다. 요한계시록 12:7-9은 이 문제에 대해 실제로 전쟁이 하늘에서 일어났고,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되고 심판 때까지 감금된 마귀와 다른 악한 존재들의 패배(벧후 2:4)를 낳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수행된 죄와 죽음을 이기려는 싸움은 그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그것에 깊이 휘말리게 했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아들의 죽음까지 초래했다(롬 5:6-11). (38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