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인간을 가리키는 용어와 정의들
 죽음에 대한 성경의 독특한 이해는 그 용어에 분명하게 표현돼 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고찰하고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들과 표현들을 연구함으로써 분명해질 것이다. (380.1)
 1. 구약에서 죽음을 가리키는 단어들
 “죽다”를 의미하는 어근 mwt와 거기서 파생된 명사들(마웨트, 트무타, 마모트)은 구약에서 대략 1,000회 등장한다. mwt가 공통적인 셈어 어근으로 우가릿 문헌과 이집트어 상응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지만 적절한 어원을 찾을 순 없다. 동사적 기본 의미는 단순히 “죽다”인데, 가끔 동물들과 관련되고(창 33:13) 또 아주 드물게는 식물의 생명(욥 14:8)과도 관련되지만 주로 사람들과 관련된다. 재물(창 47:19)이나 지혜를 잃는 것(욥 12:2)에 그 단어를 적용하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용례가 오늘날에는 흔하지만(예를 들어, deadpan[무표정한], dead bolt [데드볼트], deadweight [무거운 짐]) 성경에는 매우 드물게 나온다. “그의 마음이 죽었다”(삼상 25:37, 〈개역한글판〉에는 “그가 낙담하여”로 되어 있음)라는 독특한 표현은 나발 입장에서 볼 때 용기를 잃는 것(낙담)을 가리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실제로 심장 기능이 정지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는데, 구약적인 상징에서 뇌사를 나타낼 것이다. 말하자면 나발은 발작을 일으켰다. 즉 성경이 표현하는 것처럼 그는 “돌과같이 되었”다. 이것은 “한 열흘후에 야훼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말한 38절을 설명할수도 있다. (380.2)
 관련된 어근 gw‘(“죽다”)는 mwt와 평행어로 등장하지만(욥 3:11; 14:10),죽음을 어떤 손실이나 불행에 따른 생명의 종결(참조 슥 13:8; 시 88:15)로 가리킬 수도 있다. 히브리어 동사 형태인 필펠과 히필 어간에서 mwt는 “죽이다” “죽음에 처하게 하다”로 번역된다. 여기서 그것은 하라그(“죽이다”, “도륙하다”), 라차(“죽이다”, “살해하다”) 그리고 나카(“투쟁하다”[strive], “강타하다”[smite]) 같은 다른 관련 동사와 함께 나온다. (381.1)
 명사 형태인 마웨트(“죽음”)는 단순히 생명의 반대라는 의미이며, 생명의 끝을 나타낸다(신 30:19; 잠 18:21; 렘 8:3). 결국, 구약은 죽음과 죽는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여 말한다. 예컨대 “기운이 진하여”(창 25:8),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창 49:33),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왕상 2:10) 등이다 (381.2)
 “죽음의 영역”을 뜻하는 히브리어 셔올이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황폐하다”, “가치가 떨어지다”를 뜻하는 샤아와 관련된 것일 수 있으며, 지하세계(사 14:9; 시 139:8), 죽음의 영역(시 18:5; 호 13:14), 만족함이 없는 무덤(잠 27:20) 그리고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배와 정상적인 삶의 과정(사 38:1; 시 6:5)의 부재를 가리킨다. (381.3)
 구약 전체에서 죽음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단 한가지 이해, 즉 생명 및 그 표출과 기능의 완전한 종결을 가리킨다. (381.4)
 2. 신약에서 죽음을 가리키는 단어들
 싸나토스(“죽음”), 쓰네토스(“죽을 수밖에 없는”), 싸나토오(“죽이다”), 쓰네스코(“죽다”)란 단어들과 그 파생어들은 성경 외 문헌에서 폭넓은 용법을 지닌 흔한 헬라어 단어들이다. 그들은 죽음 그리고 생명의 확실한 종결을 의미하지만, 고전 헬라어 용법에 따르면 인간 존재의 종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고전 용례에서 죽음은 육체에만 영향을 끼치지, 사망시 육체에서 해방되어 이후에도 생존한다고 믿었던 영혼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동일한 단어들에 대한 신약 용법은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낸다. 그런 용례들은 “죽음”(dying, being dead)을 모든 사람의 두려운 최후이자 무서운 운명인 생명의 종결로 언급한다(고전 15:54, 55; 히 2:15; 계 6:8). 따라서 고전 용법과 대조적으로 신약에서 죽음은 결코 영웅적인 용어로 묘사되지 않는데, 심지어 그리스도의 죽음(마 26:36-46)에서도 그렇다. 오히려 죽음은 항상 생명과 사람들의 원수, 진실로 최후의 원수(고전 15:26)를 상징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한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역으로의 자연적 전이가 결코 아니다(TDNT 3:15). (381.5)
 네크로스(“죽음”, “죽은 자 혹은 시체”)와 네크로오(“처형하다” 혹은 “죽이다”)라는 단어는 이런 죽음의 의미를 확증한다. 죽는다는 것(네크로스)은 살아 있는 것과 구별되는 것(막 12:27)으로서 생명의 부재를 의미하며(행 28:6; 롬 7:8), 따라서 상징적 의미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불행하며 잃어버림을 당한 것을 뜻한다(눅 15:24, 32; 히 6:1; 9:14; 계 3:1). 죽은 자들은 생명으로부터 “해방되어” 더 나은 존재로 들어가는 대신, 사실상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의 권세에 의해 정복된 것이다(계 20:11-15). (381.6)
 죽음을 가리키는 신약의 독특한 표현들은 평화로운 코이마오(“잠”[요 11:11])를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예컨대 아폴뤼미(“파괴하다”, “진멸하다”[마 21:41]), 파라디도미(“내어주다”[롬 4:25]), 멜로 텔류탄(“죽게 되다”[눅 7:2]), 에스카토스 에코(“최후를 맞다”[막 5:25]) 등 죽음의 부정적 개념을 강조한다. (381.7)
 신약의 용어에서도 죽음은 생명의 종결이자 하나님과 인류의 원수로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죽음과 죽는 것에 대한 성경 전체의 용어는 죽음에 대한 한결같은 이해, 곧 전인적 인간의 전 존재의 종결을 묘사하는 데 집중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의 용어들은 삶과 죽음에 있어서 인간 본질에 대한 성경의 묘사들을 확증한다. (381.8)
 3. 생명과 죽음의 본질
 용어와 정의들에 비추어 볼 때, 생명과 죽음에 있어서 인간 본질에 대한 성경적 묘사는 새롭고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기능적 관점에서 죽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반대말이다. 생명이 무엇이든, 죽음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은 인간 존재에 대한 성경의 첫 공식에서 분명히 표현된 것으로 드러난다. “야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인간의 생명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수 있다. 땅의 티끌(아파르민 하아다마)+생기(니쉬마트 하이임)=생령(네페쉬 하이야). (382.1)
 각각의 용어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땅의 티끌(흙, 아다마)은 인류(아담)의 물질적 실체가 “먼지” 혹은 흙 자체(아다마)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류는 고유의 생명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현세적이고 필멸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땅의 티끌로부터 만들어진 몸은이 티끌 형태가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신성한 물질 혹은 생명을 주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는 호흡(느샤마)을 추가하셨는데, 그것은 종종 영(spirit)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티끌로 만들어진 생명이 없고 텅 빈 형태에 부어진 독립적 물질이 아니라, 단순히 티끌을 산 존재로 변화시킨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로써 성경은 생기가 독자적 생존이 가능한 성분처럼 몸에 추가된 제2의 본질이 아닌, 흙으로 된 몸을 생령(네페쉬 하이야)으로 변화시킨 하나님으로부터 온 역동적인 능력을 상징한다고 가리킨다. 네페쉬의 어원적 의미들 중 하나는 “열린 목구멍”인데, 그것을 통해 사람은 숨쉬고 먹고 말한다. 이것은 “활기찬”, “살아있는”, “활동적인” 등의 파생적 의미들로 이끈다. 〈제임스왕역〉은 네페쉬“영혼”(soul)으로 번역하지만, 이 단어는 전인적이고 살아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다른 경우에 “영혼”(네페쉬)은 뭔가를 만질 수 있고(레 7:21), 종으로 거래될 수도 있고(레 22:11), 음식을 먹을 수 있거나(레 17:15) 혹은 특정 음식을 갈망할 수도 있다(신 12:20). (382.2)
 인간 생명의 이 공식이 거꾸로 되면, 죽음에서처럼 생기는 생령(산 존재)에게서 없어지고 그것을 부여한 하나님께로 돌아가 땅의 티끌만 남게 됨으로써 창조의 과정은 취소된다. 사실상 이것은 죽음의 순간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성경의 방식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기운이 진하여 죽어”(창 25:8).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왕상 17:17).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14, 15).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382.3)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 성경적 공식은 한 사람에 대한 생존자들의 기억 외에는 사망 후 뭔가가 잔존한다는 모든 가능성을 거부한다. 조상 숭배, 곧 조상들의 영이 사후에 생존하고 생존자들은 그들을 봉양하고, 달래고, 또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신념이 세상의 수많은 전통 사회에서 아무리 실재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만에 불과하다. 영이 아니라 단지 조상들에 대한 생존자들의 기억만이 사후에도 남는 것이다. 제대로 산 생애에 대한 기억, 인정받은 성취들 그리고 죽은 자들의 인격적 특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도 간직되고, 죽음 이후에도 물려줄수 있는한사람의 최고의 유산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불멸성, 조상 숭배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에 대한 성경의 거부는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의 존재를 약화시키거나 박탈한 채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에 대한 기억, 곧 그들이 한 일들과 그들이 가르친 교훈들과 그들이 발전시킨 품성으로 우리를 풍성하게 한다(참조 창조1. B.3). (382.4)
 4. 전인론과 인간의 본질
 성경 전체에 분명히 표현된 인간 생명의 공식은 인간 본질에 대한 전인적 이해로 이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살아있는 육체로 보았지 육체를 가진 영혼으로 보지 않았다.”(Robinson 70). 인간의 본질은, 병들거나 건강할 때, 출생 시나 사망 시를 막론하고 각각 다른 부분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이해되거나 취급될 수 있는 부분들의 결합체가 아니다. “심신 상관성 질병”“전인 돌봄”과 같은 최근의 표현들은 인간 본질의 이러한 이해에 대한 인식, 곧 인간 존재가 통일체이고, 따라서 그렇게 취급받아야 함을 나타낸다. (3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