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벨라르
 전혀 다른종류의 또다른답이 프랑스의 수도승이며 12세기 전반 가장 예리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아벨라르에 의해 주어졌다. 아벨라르는 배상금(속전)의 개념이나 속죄의 개념뿐 아니라 특히 안셀무스의 배상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속죄의 도덕적 영향 이론이라고 일컬어진 이론을 제안했다. 이 견해는 법적인 측면으로 많이 치우친 안셀무스의 주장에 대한 평형추가 되었으며, 그의 로마서 주석과 〈그리스도교 신학 요강(Epitome of Christian Theology)〉에서 발견된다. 아벨라르는 그의 해설에서 값, 희생, 공로 같은 전통적인 개념을 사용했으나 그를 사로잡고 그의 사상의 중심이 된 개념은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일깨워준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이었다. 아벨라르는 하나님의 무죄하신 아들의 죽음이 어떻게 아버지를 그토록 기쁘시게 해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화목을 이룰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 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과 행동으로 가르치려고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죽기까지 인내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하셔서 우리 안에 참된 사랑을 낳으시고, 그 사랑이 그를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참게 한다는 것이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는 예수의 말씀과 조화시켜 볼때, 우리의 구속은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우리 안에 불어 넣어진 최고의 사랑 즉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자유를 주는 사랑이다. 그 결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한 마디로 칭의란 십자가로 맢미암아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불붙이는 것이다(Abelard Commentary on Romans 3. 26; 5. 5). 이처럼 사랑은 하나님의 구속의 동기며 방법이요 결과이다. 아벨라르는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이론도 제공하지 않고, 다만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이 믿음의 구심점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하신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관한 그의 이해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죄인과 함께 고난을 겪으셨다고 말한 자신의 말에 걸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Reid 11). (366.1)
 D. 종교개혁 사상과 가톨릭의 반동
 1. 루터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추구하던 마르틴 루터는 그것을 위하여 수도 생활의 엄격함을 더 강화했지만, 해결책을 찾은 것은 로마서 1:17“하나님의 의”의 의미를 발견하였을 때였다. 그는 이 계시가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올비로 서게 하고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에서 온 것임을 발견했을 때 그는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수동적인 용기(用器)로서의 죄인은 자신에게 어떤 의도 없으므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앞에 자신을 서게 해주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의를 받는다. 이 의 혹은 칭의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선을 그의 영혼 안으로 주입한다기보다는 죄인의 신분이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생애와 속죄하는 십자가의 죽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순종에 기초를 두고 있다. (366.2)
 이것은 성경과 조화를 이루며,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며, 이 실제는 믿음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믿음이 사람을 그리스도와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원죄는 이생에서 뿌리 뽑을 수 없고 인간의 의지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속박 아래 있으므로 믿음은 그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일하신다. 이것은 예정의 개념을 동반하며, 루터는 강한 예정론자였다. 그는 칭의를 완성된 사건(죄인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음)으로, 그것과 동시에 신자의 내면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주도하는 사건으로도 말할 수 있었다(McKim 91, 92). 후자의 일은 이 죽을 몸이 부활의 날에 변화될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남아 있어서(simul Justus et peccator), 의로운(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시에 죄인이다(여전히 불완전함과 죄된 행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선행은 믿음의 열매로, 또한 칭의의 증거로 믿음에 뒤따라온다. (367.1)
 2. 칼뱅
 장 칼뱅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관한 루터의 개혁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연합함과 동시에 칭의와 성화 두 실체가 신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했고, 이로써 칭의와 성화 사이는 더 밀접하게 되었다(Cavin Institutes 3. 16. 1). 그 결과로 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의미하는 바는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선물은 그리스도와 이루는 하나의 연합에 속한 부분들이다 칼뱅의 가르침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 진술에 나타난 대로 그가 이중 예정을 강력하게 옹호했다는 것이다. “예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의미하는데, 그것에 의해 하나님은 각 개인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바를 그 자신의 마음속에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기반 위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예정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예정되었다.”(Institutes 3. 21. 5). 구원에 대한 예정에서 나온 한 가지 결과는 예정이 최후 구원에 관한총체적인 보증을 의미했다는것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따라 예정된 자는 잃어버림을당할수 없었다. (367.2)
 3. 트렌트 공의회
 트렌트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에 이르기까지 25회기에 걸쳐서 만났다. 교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 대한 개혁에 관심이 있었지만, 공의회를 구성했던 감독들과 신학자들은(루터의 주장에 반응하여) 칭의에 관하여 자신들이 말한 것이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저작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Jedin 2:171). 외부에서 오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을 통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의 칭의 교리에 대하여 그들이 제시한 답은 공의회의 판결 제7장에 나온다. 여기서 공의회는 공로와 상관없이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에 대하여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동의하고 협력함으로써 칭의가 효력이 발생하도록 재촉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들을 맡긴다. 이에 하나님의 성령은 활동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수동적인 것이 아닌 것(종교개혁 사상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임)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롭게 되려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선행적 은혜가 준비해 놓은 것을 따를 때 칭의가 오며, 그것은 죄의 용서에서 끝나지 않고 내면의 자아가 성화되고 새로워지는 일을 포함한다. 여기서 칭의는 본질적으로 성화를 일컫는 것인데,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었다. 칭의의 형식적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고, 우리 마음에(개혁자들의 주장처럼) 믿음뿐 아니라 소망과 사랑을 심어줌으로써 우리 자신의 내면을 진정으로 정의롭게 만든다(Grensted 173-177; Toon 68, 69). 더 나아가 공의회는 아담의 타락 후에 자유의지가 전적으로 상실되었다거나, 의롭게 된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확신해야 한다거나, 또 그 사람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고 은혜를 잃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을 파문하였다. (367.3)
 여기서 우리는 많은 중요한 강조점들을 본다. 즉 종교개혁 사상에서처럼 성화로 이끄는 칭의 대신 성화로서의 칭의, 비본유적인 것으로서의 칭의보다는 본유적인 것으로서의 칭의, 전가된(imputed) 칭의보다는 주입된(infused) 칭의, 의롭다고 선언된 칭의보다는 의롭게 만드는 칭의, 수동적이기보다는 행동하는 자와 협력하는 자로서의 사람, 하나님 쪽과 관련된 속죄뿐 아니라 인간 쪽과 관련된 속죄(사람이 그것에 의하여 변화되는 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떤 죄를 짓든지 상관없이 언제나 구원받는다는 견해에 대한 거절 등이다. (368.1)
 E.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감리교
 1 .야코부스아르미니우스
 칼뱅주의의 예정론 가르침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에게서 가장 강하게 나왔다.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그 초점을 하나님의 선고의 순서에 맞추면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선택과 영벌(永罰)을 먼저 선고하시고, 그 후에 그 선고가 유효하게 하도록 타락을 허용하신 것인가(원죄 전 예정론), 아니면 그가 예지하시고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그 후에 구원을 가져오기 위하여 선택을 선고하셨는가?(원죄 후 예정설). 아르미니우스는 원죄 전 예정론을 옹호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것을 반대하기로 하고 칼뱅주의에 반하여 인간 안에 있는 자유를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주의의 예정론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고 비난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독단적인 선고에 기초를 두지 않고 인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그 기초를 두었다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다음 요소를 포함하는 다섯 가지 조항으로 발전되었다(Bettenson 376, 377).(1)하나님은 영원 전에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다.(2)예수는 모두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나, 이 구원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유효하다.(3)인간은 죄 때문에 본질적으로든 자유의지를 행사함으로든 선을 행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 이것은 오직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4)중생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는 선을 행하거나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5)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탄과 죄와 세상과 자신들의 육체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으나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잃을수 있는지 그 여부에 대해서는 더 연구해야 한다. (368.2)
 2 . 존 웨슬리
 18세기에 살았던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그가 속해 있던 영국성공회가 그랬던 것처럼 아르미니우스주의였다. 구원에 관한 그의 생각은 속죄에 관한 견해가 그 원천이었다. 웨슬리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처럼 형벌 대속적 희생 이론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달래고 그의 공의를 충족시킴으로 하나님이 그의 거룩함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 때문에 칭의와 성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칭의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죄 사함과 죄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을 포함하였다. 전자는 과거를 덮었고, 후자는 현재 하나님과 맺는 새로운 관계와 관련이 있었다. 그는 전가된 의를 강조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것이 율법폐기론으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칭의를 동반하지만 칭의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출생, 즉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변화는 칭의에서 성화로 옮겨가는 과도기이다. 사람은 성화를 통하여 죄의 권세와 뿌리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다. 성화는 그 결과물로서 심지어 이생에서조차도 신자의 완전 즉 온전한 성화를 이룬다. 웨슬리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 완전에 관한 평해(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에서 완전이 아닌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12. 2). 그것은 지식의 완전함, 실수, 연약함과 유혹에서 벗어남, 혹은 계속 자라날 필요가 없음이 아니다. 이처럼 웨슬리에게 완전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실제이며, “완전하게 된 완전”이 아니라 “완전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었다(Collins 118, 119). 웨슬리는 완전을 자부심, 고집, 악한 기질과 악한 생각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12). 그에게 “완전한 성화”“죄를 배제한 사랑, 마음을 채우는 사랑, 전반적인 영혼의 능력을 취하는 것”이었다(Wesley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1. 9). (368.3)
 웨슬리의 완전은 두 종류의 죄, 즉 하나님의 율법을 고의로 범하는 일과 관련한 “고유의 죄”와 인간의 무지와 연약함에서 오는 “비(非)고유의 죄”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피할 수 있으나 둘째는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완전은 상대적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절대적인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 유용하다(Ward 471, 472; Williams 179). 결과적으로 웨슬리가 볼 때 용서가 필요하지 않거나 그리스도께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하게 된 사람은 없다(참조 Williams 177). (36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