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속사도 교부들
 신약에 따르면, 은혜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효력을 발생시킨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은 단번에 드려진 예수의 희생을 통하여, 인류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전적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십자가의 기별에 반응하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심판에서 벗어나 그와 올바른 관계 안에 있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은혜는 엄밀히 말해서 초월적 실재이다. 그것은 결코 사람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소유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전적으로 선물로 남는다. (362.1)
 이런 기본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속사도 교부들 안에서 급격한 변화가 이는데, 여기에는 〈디다케〉, 〈바나바 서신〉, 〈클레멘트 1, 2서〉, 〈헤르마스의 목자〉,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등이 포함된다. 2세기경에 이미 이런 저작물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빛에 반응하여 새로운 순종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부속물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이제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이기보다는 윤리 교사로서 진리의 지식을 주시는 분이며, 반면에 종교는 칭의의 결정적 원천이 되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 대신에 칭의를 제공한 하나님 앞에 보여 주는 인간의 행함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고, 복음은 새로운 율법이 된다. 예수의 인격은 예수의 교훈으로 대체되고, 믿음은 모본을 따르는 것으로 대체된다. (362.2)
 B. 속사도 교부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까지
 1. 이레나이우스
 2세기에 이레나이우스는 〈이단 반박문(Against Heresies)>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다는 성육신한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발생한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인간 존재의 모든 단계에서 인류와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아담이 불순종한 곳에서 순종하심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image)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모양(likeness)을 창조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그가 우리처럼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될 수 있다. 이 반복 이론은 에베소서 1:10에서 끌어낸 개념인데,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자신 안에서 매듭지으시고, 아담이 초래한 죽음을 되돌리시고, 사탄의 머리를 부수신다(승리자 그리스되[Christus Vitor] 모티프). (362.3)
 2. 테르툴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는 3세기 서방 교회의 신학자이며 구원과 관련된 여러 교리가 발전할 길을 닦았다. 그 중 하나가 원죄론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담 안에 모든 사람의 영혼이 잠재되어 있었으므로 아담이 타락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와 함께 타락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전이”(轉移)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영혼전이론(Traducianism)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또한 안셀무스보다 앞서 배상(satisfaction)의 개념을 가르쳤다.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 할 뿐 아니라 죄를 배상해야 한다(안셀무스는 그리스도께서 배상하셨다고 주장함). 배상은 회개, 눈물, 금식, 기도와 구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배상 없이 용서는 없다. 이처럼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의 용서를 보장하며, 한때의 고행은 영원한 형벌을 면제한다. 배상의 관점에서 선행 역시 공로를 얻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하여 가톨릭 교리의 공덕 체계(merit system) 및 고행(penance) 개념과 그 실천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강조하면서 그는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의 개념에 지지를 보탰다. (363.1)
 3. 오리게네스
 3세기 전반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초기교회의 저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 전문가였을 뿐 아니라 그의 신학 체계는 니케아 이전 가장 중요한 교회의 업적이었다. 구원에 관한 그의 가르침 가운데 두 가지 국면이 두드러진다. 첫째로, 그는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 주제를 매우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악의 세력들과 일생 투쟁하였으나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세력들을 물리쳤다. 관련된 두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악의 세력을 무력화했다고 말하는 골로새서 2:15과 사망을 포함한 모든 원수에 대하여 부활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알리는 고린도전서 15:24-28이다. 둘째로, 오리게네스는 악의 권세의 패배라는 사상에 대한 부수적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마가복음 10:45에 나오는 배상금(ransom,, “대속물”)임을 강조했다. 질문은 “누구에게 그 배상금이 지불되었는가?”였다. 오리게네스의 답변은, 그것은 하나님이 될 수 없으므로 마귀에게 지불된 것이며, 이는 예수의 영혼이 그에게 지불될 때까지 우리를 포로로 붙잡고 있는 것은 마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속았는데,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혼을 붙들고 있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Origen Commentary on Romans 2.13). 여기서 오리게네스는 11세기 안셀무스의 때까지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던 두 가지 목소리를 냈다. 즉 예수의 십자가는 마귀의 통치권 아래 있는 죄 많은 인간을 되사기 위해 마귀와 맺은 거래였다는 사상이며, 또 마귀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부터 기만을 당했다는 사상이다. 후자의 요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매우 생생하게 표현했는데, 우리 구원의 값인 십자가는 쥐덫처럼 마귀에게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써 미끼를 던져 놓았다고 하였다(Augustine Sermon 130. 2 [NPNF-16:499]). (363.2)
 4. 동방교회의 신학자들과 아타나시우스
 4세기의 아타나시우스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결과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던 동방교회 신학자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였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됨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켰고, 우리는 그와 같이 된다. 이러한 견해의 주창자들이 사용한 중요한 성경 본문은 시편 82:6(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신들”이 된다고 말함), 베드로후서 1:4(신자들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말함), 고린도전서 15: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가진 것처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말함)이다. (363.3)
 5.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상반되면서 경쟁적인 두 신학과 관련된 문제들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중대한 쟁점으로 남아 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동방교회에서 강한 지지를 받았으나 결과적으로는 동방과 서방 양쪽에서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 살아서 교회 역사 내내 반복하여 표면화되고 있다. (364.1)
 펠라기우스는 380년경 로마에 온 영국 태생의 수도승으로서 학식 있고 훌륭한 평판을 받던 사람이었다. 강한 도덕적 열정을 가진 그는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도덕적 느슨함에 놀라 그들의 윤리적 표준을 높여줄 방법을 찾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낙관적이었기 때문에 높은 도덕성을 옹호할 수 있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며, 아담의 죄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은 사람이 이 율법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그는 어떤 불가능한 명령도 내리려고 의도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그가 의로우시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이 할수 없는 어떤 일로도 그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인데, 이는 그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Pelagius Epistleto Demetrius 16). 펠라기우스는 사람이 죄의 노예라고 믿지 않았으므로 원죄의 개념을 거부했다. “우리가 칭찬을 듣거나 비난을 받게 되는 선하고 악한 모 든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미덕(virtue)이나 악덕(vice)이 없이 태어났으며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거기에 저장해 놓으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Pelagius On Free Will, in Augustine On Original Sin 2. 13 [NPNF-1 5:241]).(창조에 관한 동방교회의 견해와 부합하여) 임신 혹은 출생 시에 독립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각 사람의 영혼이 존재하게 된 이래로(즉 영혼전이론을 거부함) 아담과 기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원죄라는 방식을 통해서 그에게서 다른 사람들로 전수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타고난 영적 결함이 없는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각 개인은 독자적으로 악이나 선을 행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올바른 것을 선택할 가능성을 주셨고 각 사람은 선택의 자유를 활용한 데 대한 책임이 있다. 펠라기우스의 은혜의 교리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 개념과 일치한다. 은혜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는 타고난 창조의 은혜가 있는데, 이것은 의지와 이성이라는 하나님의 선물과 관계가 있으며 이를통해서 인간은 악을피할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계몽이라는 외적 은혜가 있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예를 들어 십계명과 산상설교와 같은 교훈을 통하여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고,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그의 뜻을 바라도록 동기를 부여하신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은혜는 사람을 죄에서 선으로 변화시키는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다. 사람이 죄를(특히 환경적인 영향을 통하여)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용서를 제공하시는데, 이것은 성인 침례에서 작용한다(유아들은 아담의 타락 전 상태에 있어서 침례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일단 침례를 받으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능력과 의무를 모두 갖는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그는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다 그가 그렇게 했는지는 그의 행함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의 심판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예정은 누가 그분을 위하여 살기로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 예지를 가리킨다(Kelly 360). (364.2)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이전에 자신의 견해를 확립했는데, 펠라기우스와는 정반대다. 그는 아담의 죄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을 잃었다고 단언했다. 인간은 아담에게서 유전된바 타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의지는 부패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선택하도록 일깨우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d)가 없다면 인간은 불가피하게 악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선행적 은혜가 있어서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인다. 이 은혜는 인간이 어떤 것을 의도하기 전에 그 의지에 자극과 영향을 준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도로 시작된다. 선행적 은혜 뒤에는 협력하는 은혜가 따르는데, 복종하도록 의지가 자극을 받게 되면 하나님은 협력하는 은혜를 통하여 사람의 의지를 도우신다. 그리고 그 후에 충만한 은혜가 이어져서 계속하여 선을 행할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효력 있는 은혜이며, 그것은 선이 실제로 효력을 내게 하는 능력이다.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가 없는 것이(Augustine On Rebuke and Grace 34-38 [NPNF-15:485-487]),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기초 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죄인들 가운데서 누가 그의 초자연적 은혜를 받아들일지를 결정하셨다. 이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며 하나님이 뜻하신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364.3)
 절충적 입장은 소위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입장인데, 그중 가장 유능한 옹호자는 마르세이유의 수도승인 요한 캇시아누스였다 반(伴)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타락의 결과 인간의 몸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의 도덕적 본성은 부패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의지를 뜻대로 사용할 능력이 부패하기는 했지만,(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펠라기우스와는 반대로, 은혜가 필요한 것은 죄가 [사람을] 도덕적으로 무능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그들은 다음 몇 가지를 주장했다.

   (1)구원의 주도는 어느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되나, 때때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주도된다.

   (2)은혜는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3)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예정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펠라기우스처럼 예정(predestination)은 미리 정함(foreordination)보다는 예지(foreknowldege)와 어울린다.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는 수십 년간 논쟁이 있었지만 그것은 교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 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극단적 견해에 대한 발전의 여지가 있는 대안을 포함하고 있어서 계속교회 안에 존재했다. (365.1)
 C. 중세 스콜라주의
 1. 안셀무스
 중세에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노선에 큰 영향을 끼친바 있는, 구원에 관한 견해를주창한두 인물이 눈에 띈다. 첫째는 11세기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였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주장뿐 아니라, 특히 그의〈쿠르 데우스 호모(Cur Deus Homo,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개진한 주장을 통해 속죄 신학에 이바지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안셀무스는 오리게네스의 때로부터 약 900년 동안 지배적이었던 배상[속전] 이론(ransom theory)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셀무스는상당히 정교한 논리로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주로서 마귀에게 어떤 법적권리에 대하여 빚을 졌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Anselm Why God Became a Man 1. 7). 그 대신에 그는 배상의 개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내놓았다. 이 새로운 견해는 안셀무스 시대의 봉건주의 배경에서 통했다. 봉건사회에서 농노의 의무는 주인의 영예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인의 영예를 배상하기 위하여 적절한 형벌을 주어야 했다. 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죄 많은 인간은 하나님께 불명예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적절한 배상금이 지불되어 하나님의 영예가 회복되도록 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죄인도 마련하지 못할 배상금과(이미 하나님께 주어졌어야 마땅한) 미래의 어떤 순종도 만족시킬 수 없는 추가적인 무엇을 요구하셨다. 더 나이가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지는 배상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든 우주보다 더 커야했다. 결과적으로 죄의 값은오직 하나님만이 지불할 수 있고 인간은 지불해야 할 의무 아래 있는 자이므로 신-인(神人)이신 분이 인간을 위한 배상액을 지불할 필요가 있었다(위의 책, 2.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죄 없는 인간으로서 이전에 하나님께 빚지지 않은 것 즉 그의 생명을 주실 수 있었다. 이처럼 그의 자발적인 죽음은 인류의 죄를 위한 완전한 배상금이 되었다. (3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