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보(walking)의 개념은 신약에서 95회 등장한다. 이 중 많은 수가 빛 혹은 어둠 속에 걷는 신자들,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걸음 혹은 진리 안에서 행함(요 8:12; 11:9, 10; 12:35; 요일 1:6, 7; 2:6, 11)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요한의 본문들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보(walking)의 성격에 대하여 가장 많이 강조하고, 가장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 곳은 바울의 저술이다. 바울은 피해야 할 일들을 다루면서 옛 시대의 흔적을 지닌 품행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한 필연적으로 “육체 안에” 즉 인간 존재의 영역에서(갈 2:20) 행할 수밖에 없으나 그들은 “육체에 따라” 즉 하나님의 행동 규범이 아닌 세상의 규범에 맞추어 행해서는 안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체에 따라”“성령에 따라”와 상충된다(롬 8:4, 5). 갈라디아서 5:16-25에서 성령 안에서 행함은 육체 안에서 행함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인데(참조 롬 8:13), 이는 육체는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롬 7:15, 17-20).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고상한 영적 원칙이 없는 이 세상의 노선, 즉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활동하는 세력의 노선을 따르는(엡 2:2) 일반 인간으로서 행하여서는 안 된다(고전 3:3). 여기에는 허망한 생각과 방탕한 삶이 포함된다(엡 4:17, 19).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정당하지 못한” 방식(고후 4:2)에 따라 그 안에서 행하기를 거절하고 방탕함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롬 13:13). (358.2)
 그 대신 그들은 사랑(엡 5:2)과 믿음(고후 5:7)을 포함하는 복음의 부르심에 합당한 방법으로(엡 4:1)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 비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에는 지혜롭게 행동하고(골 4:5) 게으르게 살지 않고(살후 3:6, 11 자급자족함으로써 존경을 얻어야 한다. 그들은 빛의 자녀로서(엡 5:8), 그리고 악한 시대에 살면서 때를 아끼는 법을 아는 지혜로운 자들로서 행동해야한다(15, 16절). 한마디로 신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살전 4: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성화된 삶이며(3절) 이것은 성적인 관계에서의 순결을 포함하는데(3-8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7절)이기 때문이다. (358.3)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나타나는 두 번째 결과는사욕을따르기 위해 죄가그들의 죽을 몸을 다스리게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롬 6:12). 비록 옛 자아가못 박혔고 육체에 대한 죄의 주권이 깨졌지만 몸은 여전히 옛 시대에 속해 있어서(그것이 “죽을 몸”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죄의 소욕은 여전히 갖고 있다. 이것들은 죄가 이전의 자기 백성에 대한 통치권의 회복을 모색하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통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부활 이편에 있는 죄의 영향에서 자유롭게 된 것은 아니다. 죄가 그 통치권을 재확립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끝낸 하나님의 은혜이다(14절). 그리스도인들은 옛 육체의 소욕을 통하여 여전히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이것이 육체의 행위로 이어지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갈 5:16-25). (358.4)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의 세 번째 결과는 신자들이 죄에 굴복하여 그들의 지체를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대신에 의의 도구로써 하나님께 굴복하도록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이며, 그것의 실재는 로마서 6:2에 언급된 대로 죄에 대한 죽음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죄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죄가 신자의 삶과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주인으로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므로 신자들은 죄를 원수로서 맞아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죄의 통치권에서 풀려났으므로 그들은 죄의 유혹과 싸워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평화롭게 되었으나 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에서 신자들은 악한 자의 불같은 공격을 이겨낼 수 있기 위하여 “주 안에서 강건하여지고” “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0-17).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유혹과의 투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넘어지지 않도록(고전 10:12)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 이는 하나님이 피할길을 내시기 때문이다(13절). (359.1)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는 끊임없는 전진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한정된 성취로 축소될 수 없다(빌 1:27; 참조 엡 4:1).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 경험의 표준이 되시며 신자들이 그에 관하여 배운 것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엡 4:20). 그는 신자들이 따라야 할 진리를 가르치시며 그들의 주님으로서 모방해야 할 사랑, 겸손, 봉사의 원칙들을 자신의 존재 안에서 예증해 보이신다(빌 2:1-8).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에서 보여 주신 모본은 또한 모방을 요구하며 신자들은 “그의 자취를 따라”야 한다(벧전 2:21-23). (359.2)
 그리스도를 이런 식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은 성화의 여정에는 끝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성취는 있으나 끝은 없으며,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이 사랑 그 자체를 모본으로 보여 줌으로써 이미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점점 더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살전 4:2, 9, 10, 12). 베드로후서 1:5-7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 이 본문에서 “더 많이”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다함 없는 사랑의 본질과 도전 때문이지, 신자들이 참된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무력하게 만드는 죄의 세력 때문이 아니다. (359.3)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지식 및 분별력이 풍성하게 됨으로 그 탁월함이 입증되고 순결함이 성취되고 의의 열매로 가득하게 되는 일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빌 1:9). 이 같은 분별력은 세상에 맞춤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로 일어난다. 이것만이 신자들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입증할 수 있게 해준다(롬 12:2). 이처럼 성화된 생애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배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탐구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엡 5:8, 9; 살전 4:1). 늘 이것은 더 깊은 도덕적 통찰력과 성취를 요구하는 역동적인 표준이다. (359.4)
 b. 성화와 완전
 (1) 용어
 완전의 개념은 주로 ‘완전한’, ‘전체적인’, ‘충만한’을 의미하는 타밈샬렘이란 말로 표현된다. 신약에서 완전은 ‘완전한’, ‘성숙한’을 의미하는 텔레이오스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그 목표(헬라어 텔로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359.5)
 구약에서는 불완전한 사람들도 완전하다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노아(창 6:9), 아브라함(17:1), 욥(욥 1:1)이 그런 경우다. 이런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완전”의 자격요건은 하나님과 동행하고(창 6:9; 17:1)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악에서 돌아서는 특성이다. 이 본문과 기타 본문들(신 18:13; 시 101:2, 6에서 ‘충성된’‘완전한’ 혹은 ‘흠잡을 데 없는’과 바꿔 쓸 수 있다;잠 11:5)에 나오는 완전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과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뜻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있다. 이런 마음 관련 측면은 샬렘이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 “마음”과 함께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왕상 8:61). 신약에서 완전함(텔레이오스, 형용사 “완전한”)은 사람들 안에서 똑같은 완전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서술할 때 사용된다(마 5:48). 로마서 12:2에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완전함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알도록 사람들은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신구약 어디에서도 완전함이나 흠잡을 데 없음이 죄 없음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노아와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은 연약함이 있었음에도 완전하다고 일컬어졌다. 신약에서는 그 왕국의 자녀들이 완전함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을지라도(마 5:48), 그들 또한 자신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마 6:12, 14, 15). 이처럼 완전은 목표 및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열망을 포함한다. (359.6)
 요한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요한은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는 일에 대해 말하며(요일 2:5; 4:12, 17, 18), 이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 및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과 연결한다(2:4, 6). 그러나 요한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한다(1:8-10). 그러므로 “성화된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교훈과 조화”지만(사도행적, 563) “성화된 입술은 ‘나는 죄가 없으며 거룩하다’라는 것과 같은 주제 넘은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위의 책)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이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위의 책). 성화는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며, 완전은 항상 그 앞에 있다. (360.1)
 (2) 성화와 완전의 관계
 완전은 성화의 완성이며, 완전은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성화는 끊임없이 더 깊어져야 한다. 만일 완전이 하나의 상태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면 끊임없이 자라남을 의미하는 성화는 결국 쓸모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의 교훈이 의미하는 것은 완전함이 중요한 의미에서 “온전하라”(마 5:48)와 “네가 온전 하고자 할진대”(마 19:21)라는 말씀에서처럼 실현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논리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성화에 대해서는 “너는 성화되었지만, 아직은 아니다.”라고, 완전에 대해서는 “너는 완전하지 않지만, 너는 완전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현재의 완전은 성화이며. 미래의 성화는 완전이다. 이것은 두 실체가 같은 실체(하나님을 닮음)의 일부분이며 꾸러미임을 의미한다. (360.2)
 빌립보서 3:12-16은 현재의 완전과 미래의 완전에 나타난 역설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실현된 종말론(이에 따르면 그들은 이미 부활한 사람의 완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함[참조 담후 2:17, 18])을 내세우는 그의 적들에 맞서서 바울은 자신은 이러한 완전함을 아직 얻지 못했다고 주장했다(빌 3:12).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의 죽음과 같은 죽음을 맞이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11절)과 그것이 가져다 줄 완전에 이르기를 희망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래의 완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를 그의 것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12절).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속했음을 의식하고 있었고, 이런 의식이 미래의 완전을 추구하게 한 동력이었다(13절). 바울은 올림픽 경기에서처럼 이생의 경주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완전의 상을 주려고 부르실 그 날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14절). 그러고 나서 놀랍게도 바울은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15절)라고 권고한다. 바울이 [전에] 현재가 아니라고 부인한 것을 여기에서는 현재라고 말한다. 즉 지금 완전한 자들은 완전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아직,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절). 장차 충만한 상태로 올 그것이 지금 여기서는 부분에 불과하다(빌 1:6). (360.3)
 (3) 사랑, 완전을 여는 열쇠
 데살로니가전서 3:135:23에서 텔레이오스라는 말 자체는 등장하지 않지만, 여기서 완전의 개념은 어떤 한 사람이 그 존재의 모든 국면에서 흠이 없고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의미심장하게도 3:13의 완전한 성화는 사랑과 결부돼 있다. 지금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질 때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우리의 마음이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굳게 되는 것이다(12절). 미래의 거룩함은 현재의 사랑에 근거한다. 사랑이 완전의 의미에 있어서 핵심인데, 이는 사랑이 가장 큰 계명(막 12:28-34)이며 모든 계명의 성취이기 때문이다(롬 13:8-10; 갈 5:4). 사랑은 믿음이 역사하는 방식(갈 5:6)이고 영생이 존재함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며(요일 3:15-18; 4:20, 21)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7, 8절)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8절). 사랑을 통해 세상은 누가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알게 된다(요 13:35). 예수께서 천국 백성들이 하나님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을 때, 그것은 그들도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사랑하고 모두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마 5:44-47). 누가는 그 말의 의미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라는 뜻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도전의 깊이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올바르게 꿰뚫은 것이다. 완전의 핵심은 동정 어린 사랑이다. 이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전 13:13). 왜냐하면, 믿음과 소망은 사람들 편에서 해야 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공유 하는 최고의 특성이다. (361.1)
 (4) 완전의 파루시아(임함)
 먼저 고린도전서 13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귀중하게 여기는 많은 가치의 불완전한 특성을 지적하며,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라고 말하면서 그때의 근본적인 변화를 알린다. 이것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완전은 우리가 도달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저 너머로부터 우리의 삶을 붙잡는 어떤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은 첫 번째 이 땅에 탄생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그 생명을 주신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 그는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오실 것이다(히 9:28). 그의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강림)는 그들이 그리스도인 삶을 시작할 때에 그들을 구별하신 일 곧 성화를 완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현재 도덕적으로 자라나는 일과 그의 사랑과 은혜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는 일이 만나는 교차점이 될 것이다. 최종적 완전함이 있을 그 날까지 “우리가 다∙∙∙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3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