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기본요소가 회개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시 51:3, 4; 눅 15:18, 19), 둘째는 마음을 찢는슬픔(욜 2:12, 13)인데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것”이기 때문이다(고후 7:10). (354.5)
 마음의 변화는 회개에 필수적이다. 죄인은 그의 신분, 관계, 동기, 가치와 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다. 탕자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 돌이켜”(눅 15:1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정상적인 마음 상태에 있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죄는 비이성적인 상태나 정신이상과 관련이 있다. 회개한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회개를 바라보는 헬라인들의 전형적 방식인 마음의 변화 그 이상이다. 필요한 것은 방향의 변화, 방향 전환과 생명과 도덕적 명철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실천적인 히브리적 개념이다. 이처럼, 탕자는 스스로 돌이킨 후에 그의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고 맹세하였다(18절). 이 경험에서 보는 것처럼 회개는 죄로부터의 돌이킴 그리고 하나님과 그가 요구하고 제공하시는 의로 돌아가는 일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행 9:35; 11:21; 15:19; 26:20; 고후 3:16; 살전 1:9; 벧전 2:25). 돌이킴이 핵심 개념이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통렬한 어조로 호소하신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야훼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하느냐 하셨다하라”(33:11; 참조 18:30-32). 진정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인애가 크”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욜 2:12, 13). (354.6)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나타나는 결과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눅 3:8). 이것은 동정과 관대함과 나눔, 정직과 성실 그리고 비폭력적인 평화주의이다(10-14절; 참조 겔 33:14, 15에 나타난 목록). (355.1)
 이처럼 회개는 완전하고 철저한 삶의 변화와 관련된다. 그것은 단순히 회심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단계의 회심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회심은 구원(고후 7:10)과 생명(행 11:18)으로 이끈다. (355.2)
 c. 회개를 위한 동기부여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회개에 동기를 부여한다. 첫째는 심판의 실재와 전파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글 전체에 걸쳐 또한 침례자 요한(눅 3:7-9)과 예수님(눅 13:1-5), 바울(롬 2:3, 5)과 계시자 요한(계 2:16, 22)의 기별에 나타난다. 심판의 경고는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데, 이는 그 목적이 사람들을 심판에서 지켜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고는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355.3)
 가장 깊은 동기부여의 요소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다. 바울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느냐”(롬 2:4)라고 선언한다. 베드로는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라고 동의한다. 성경에서 죄인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와 사망 대신 생명을 얻으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겔 33:11; 욜2:12), 즉 하나님의 자비, 은혜, 크신 인애와 명백하게 연결된 호소(욜 2:13)에 대하여 읽을 때,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회개의 궁극적인 기초가 됨이 분명해진다. 성경이 회개한 죄인에 대하여 하늘에서의 기쁨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눅 15:6, 9, 23, 24, 32)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회개를 이끌어낸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그리고 탕자가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내버려두고 간 아버지의 선함 즉 그가 되돌아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보여 준 간절한 동정의 모습에서 실제로 분명하게 된 그 선함을 깨닫는 것을 볼때,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움직이게 한 동인(動因)이며 인간의 회개는 그에 대한 반응임이 확실해진다. (355.4)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그의 성령(롬 5:5-8)에 의하여 효력을 갖게 된다. 예수님이 들림을 받았을 때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끌 것이었다(요 12:32, 33).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요 1:29). 회개의 가능성은 바로 이 기별이 전파되는 때에만 발생한다. 회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제공하신 구원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감화에 의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선물이다(행 5:31; 11:18). (355.5)
 3. 성화
 성화 혹은 성결은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중요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관계들, 예배 및 도덕적인 삶과 관계가 있으며,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상관없이 전 기간의 삶과 관계가 있으며, 시간과 장소, 사물과 의식들(rituals)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요소와 관계가 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거룩함을 위하여 분투하도록 권고를 받는데, 이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기(히 12:14)때문이다. (355.6)
 히브리 성경에서 이 용어는 “구별하다, 성결하게 하다(sanctify)” 혹은 “거룩하게 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다쉬(약 170회), “성결”(거룩함)을 뜻하는 명사 카데쉬(약 470회), “거룩한”을 뜻하는 형용사 카도쉬(약 120회)에서 나타난다. 헬라어 신약에서 그 개념은 동사 하기아조(“성결하게 하다”, “성별하다”, 28회), 명사 하기아스모스(“성결” 혹은 “성화”, 10회)와 하기오쉬네(“성결”, 3회)와 하기오테스(“성결”, 1회) 그리고 형용사 하기오스(“거룩한”, 혹은 명사로 사용되어 “성도”혹은 “거룩한 자”를 뜻함. 233회)에서 나타난다. (356.1)
 a. 성화의 의미
 (1) 새로운 관계와 신분으로서의 성화
 칭의, 화목 그리고 양자됨만이 유일한 관계적 개념을 지닌 것은 아니다. 성화도 기본적인 의미에서 관계적인 말이다.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하다 혹은 분리하다”이며 창조의 일곱째 날에서 예증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이[그날을] 구별 혹은 성별(聖別)하여 특별한 날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창 2:2, 3; 출 20:8-11). 이런 의미에서 “성화”라는 말은 도덕적인 함의를 갖지 않고, 도덕적인 목표를 갖는다. 이 점은 레위기 19:2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야훼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소위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다른 신들, 창조된 자연 세계와 피조물의 생명 그리고 모든 부정과 불의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그는 다르고 유일하며 초월해 있다. 그는 스스로 홀로 거룩하시고, “거룩한 자”(사 10:17; 히 1:9, 등) 혹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불릴 수 있는 반면에(왕하 19:22; 시 71:22; 사 1:4; 참조 6:3), 그의 백성들은 그와의 관계로 인해 파생적인 의미에서만 거룩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그들을 자신에게 성별(聖別)하셨다. 이 거룩함은 하나님이 세우신 새로운 관계에서 타고난 것인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구체적으로 그리고 뚜렷이 드러내게 되어 있다(레 19:3-37). 그의 백성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주 하나님임을 증거한다(4, 10, 12, 14, 16. 18, 25, 30-32, 34, 37절).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lordship)에 대한 이런 빈번한 진술은 확립된 새로운 관계 및 그 때문에 기대되는 새로운 충성을 상기시킨다. 제사장 왕국과 거룩한 나라로 존속하는 것은 그의 음성에 순종하고 그의 언약을 준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출 19:5, 6). (356.2)
 성화의 관계적 뿌리는(거기서부터 도덕적 열매가 자란다) 고린도전서 1:2에서 발견된다. 고린도 교인들이 안고 있던 많은 심각한 윤리적 및 신학적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전히 그들을“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일컫는다. “거룩하게 된”이란 말에 사용된 헬라어의 완료 시제는 현재 계속하여 그 결과를 유지하고 있는, 과거에 이미 완료된 행동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로 고린도 인들은 이미 거룩하게ㅡ되었고 그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 이것은 도덕적 의미보다는 관계적 의미에서의 성화이다. 도덕적 의미의 성화는 일생의 일이지만(사도행적, 560), 관계적 의미의 성화는(그것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와 그분의 백성이 된다) 칭의처럼 한순간의 일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6:11에 의하여 확증되는데, 거기서 씻음, 성화, 칭의를 그리스도와 성령의 활동의 결과물로 똑같이 과거에 두고 있다. 성화가 과거의 사건으로서의 칭의와 함께 나타나며 심지어 칭의 앞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은 관계적 의미에서의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성장의 쌍둥이 뿌리임을 보여 준다. 성화가 그 의미의 한 면에서 볼 때 확실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은 예수의 희생을 통한 신자의 정결을 언급한 히브리서에서도 볼 수 있다(10:10, 29; 참조13:12). 과거에 일어난 명백한 성화를 가리키는 다른 본문은 에베소서 5:25, 2, 사도행전 20:32, 26:18이다. 이 두 본문은 모두 분사의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두 번째 것은 과거의 이 성화가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에서는 성령에 의한 성화와 진리에 대한 믿음이 대등한 구절로 나타난다. 이루어진 성화에 대해서는 베드로전서 1:2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신자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묘사한다.(“거룩하게 하심” 직전에 오는)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일이 과거시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거룩하게 하심” 역시 과거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처럼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미래의 순종에 대한 전제 조건이다. (356.3)
 지금까지 논의된 의미에서 성화는 하나님이 그 자신과 그의 사역에 속하도록 한 백성을 따로 구별하셨다고 말한다. 이 사상은 고린도전서 1:2에서도 발견되는데, 거기서 고린도 인들은 거룩하게 되었고 “성도라 일컬음을” 받았다. 고린도 인들이 이미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이미 성도였다. “거룩하게 됨”“성도”를 가리키는 데 모두 같은 어근이 사용되었다. 영어 단어들과의 밀접한 연결을 보여 주려면 그것은 “성화”(sanctification, 라틴어 상크투스[“거룩한”]와 파체레[“만들다”]에서 유래된 말)보다는 “성도가 됨”(sanctification)으로 옮기면 더 나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으므로 그들은 성도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다(롬 1:6, 7).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성도들에게 보낸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거룩하게 하신, 혹은 그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행위(action)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 “성도”라는 말은 거의 항상 복수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백성” 혹은“하나님 자신의(소유의) 백성”을 의미한다. (357.1)
 (2) 선함에 있어서 도덕적 자라남으로서의 성화
 요한일서 3:2에 따르면, 우리는 신자로서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같이 될 줄 안다. 그때까지는 우리 순결의 표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깨끗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3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별되는 때로부터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때까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성령의 능력과 인간 의지의 협력으로 일어나는 도덕적 변화라는 점진적인 과정으로서의 성화이다. “되어 감”(becoming)으로서의 성회는 소속됨(belonging)으로서의 성화라는 뿌리에서 나온다. 후자는 하나님의 성별하시는 행위인 “이미”로서(already of God’s consecrating activity), 하나님의 순응시키는 행위인 “아직”으로 이끈다.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이 있을 것이다. (357.2)
 성화를 도덕적 변화로 언급한 가장 중요한 성경 본문 가운데 하나는 로마서 6장이다. 이 장에서 바울은 그들 삶의 주인으로서의 죄에 대하여 죽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살지 않는다고 단언한다(2, 14절).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육체에 대한 죄의 세력과 죄를 섬기라는 요구는 깨뜨려졌다(6절). 이 명백한 죽음은 침례를 통하여 일어났는데,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할 뿐 아니라 구원의 토대가 되는 사건,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3, 4절)에 연합한다. 1-14절에서 바울은 죽음과 생명을 여덟 번이나 나란히 언급하고 있는데(2, 4, 5, 8, 9, 10, 11, 13), 그렇게 함으로써 확고한 죽음과 생명의 관계를 보여 주고, 죽음은 그 자체가 끝이 아니며 새로운 생명의 필수조건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 권세에 대한 죽음이며(그의 생명 안에서가 아니라, 그의 생명을 공격했던 것으로서), 그의 부활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므로(10절)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야한다(11절). (357.3)
 그리스도와의 이런 연합의 상태, 즉 죄가 그 영향력을 잃고 하나님에 대한 삶이 새로운 실제가 된 상태에서는 신자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결과가 뒤따른다. 첫째는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4절). 새 생명은 장차 올 세대의 종말론적 삶을 지칭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생명에 붙들려 있으며 이 세상에서 그들의 필생의 행보는 그것에 따라 변화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바는 평행 구절이 되는 갈라디아서 5:25에서 예증이 되는데, 거기서 성령에게서 오는 생명의 선물은 성령과 조화된 행보(walking)를 보증한다. 이런 행보는 19-21절에 묘사된 육체의 일보다는 23, 24, 26절에 묘사된 성령의 선물로 특징지어진다. 골로새서 3:1, 2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은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은 땅의 죄 된 것 대신에(골 3:5-9)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위에 있는 것(골 3:12-4:6)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신자들이 장차 올 시대의 실재에 참여함은 도덕적 삶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방식에 따라 나타나고 검증된다. (3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