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확신
 1. 최후의 구원에 대한 현재의 확신
 은혜(“값싼 은혜”에 대한 옹호)와 제자도(“한 번 구원 받으면 내가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구원받는다.”; 참조 가려 뽑은 기별 제1권, 314, 315, 373; 실물교훈, 155)와 관련한 오해 때문에 “나는 구원 받았다.”라는 표현의 사용을 주저할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진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구원에 대한 확신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라(빌 1:6)는 보증은 기쁜 마음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는 로마서 5장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349.3)
 신자들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면서 바울은 현재 그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와 기쁨에 들어가며 미래의 영광(롬 5:1-3)을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이 소망은 실패하지 않을 터인데, 이는 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마음에 새겨진(5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제에 기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배경은, 자신들을 선하고 의로운 이들을 위해 기꺼이 줄 수 있는 사람과 달리(7절), 도덕적으로 연약하고 불경건하고 죄인이며 하나님의 원수가 된 우리를 위하여(6-8절)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결론은 만일 하나님이 가장 어려운 일(원수와 화목하기 위하여 혹은 원수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도록 내어주신 일)을 기꺼이 하셨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새 친구들을 얼마나 더 기꺼이 하나님의 궁극적 진노에서 구원하실 것인가(9, 10절). 이처럼 신자들은 화목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데(11절), 이는 그것이 미래의 영광화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서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의 사랑에서 절대로 분리할 수 없다(38, 39절). 그러므로 칭의의 실재는 완전하고 지속적인 확신의 실재와 관계가 있다. (349.4)
 2. 그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통한 현재의 영생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믿음으로써 얻는 영생이라는 요한의 어휘로 보완된다. 요한은 예수의 생애에 나타난 사건들을 표적이라고 부르며,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원과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한 영생의 실재를 가리킨다(요 20:31).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또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현재 실재하는 영생(요 3:36; 4:14; 5:24; 6:40, 47-51, 57, 58; 10:27-30; 요일 5:9-13), 아들의 생명과 더불어(요 14:6)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얻는다)(요 1:12). 세 구절이 눈에 띈다. 요한복음 5:24에 따르면, 신자는 정죄의 심판에 들어가지 않지만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요한복음 10:27-30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참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연합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양들을 매우 단단히 붙들고 있어서 그들을 낚아채어 목자가 그들에게 준 영생을 빼앗아갈 수 있는자는 아무도 없다. 더 나아가 요일 5:9-13에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는 것이므로(믿음을 통하여 아들과 연합한)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수 있다”라고 간결하게 기록한다(11절). 요한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확실한 앎에 상응하는 구절이 바울의 글에서 발견된다. 즉 바울은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영광화(고전 2:7)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은 신자들이 그들에게 부여한 은사를 “알게”하려고 하나님의 영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고 선언한다(12절). (350.1)
 3. 믿음을 통한 확신과 행함에 따른 심판
 a. 심판의 구절: 목적과 중요성
 성경은 칭의가 행함과 전혀 상관이 없지만(갈 2:16; 롬 3:20; 딛 3:5), 여전히 행함[칭의의 열매]에 따른 심판이 남아 있다고 가르친다(참조 마 7:21-23; 18:23-35; 25:31-46; 롬 14:10, 12; 고전 3:13; 4:5; 6:9; 고후5:10; 갈 6:7, 8; 엡 5:5, 6; 살전 4:6; 히 10:26-31). 성경의 세 본문에서 사람을 심판에 이르게 하는 삶의 과정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뿐 아니라 심판이 없다는 사상에 의해 기만당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350.2)
 그리스도와 믿음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구원과 관련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지만, 심판에 관한 다양한 구절을 보면 세 가지 점은 분명하다.

   (1)그리스도인들, 정확하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이 심판에 들어간다

   (2)심판은 사람의 행한 일에 뒤따른다.

   (3) 그리스도를 고백한 자들에게 두 가지 운명 즉 영생과 사망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될 필요가 없다. 심판에 관한 본문을 주신 핵심 이유는 사람들에게 충실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일깨움으로써 심판을 방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관한 성경 본문들이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든 상관없이 절대 구원받지 않는다.”라는 잘못된 견해를 용인하지 않는 것처럼, 심판을 언급하는 본문들은 “한 번 구원 받으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구원받는다.”라는 잘못된 견해도 용인하지 않는다. 구원은 늘 선물이지만 사람이 선물을 주신 분을 그의 삶의 주인으로서 거절하면 그 선물은 남아 있지 않다. (350.3)
 b. 심판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인 전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행함에 뒤따르는 심판의 관계는 구주이신 예수(하나님의 선물을 강조함)와 주인이신 예수(하나님의 요구를 강조함) 사이의 관계를 기독론적인 배경에서 살펴볼 때 가장 잘 이해된다. 그의 선물을 강조하는 것은 곧 그의 요구를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철저히 깨닫고 받아들일수록 사랑과 제자 됨과 주를 위한 봉사의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351.1)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드러난 사랑 즉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그의 사랑은 그의 통치의 본질이요 도덕적 통찰력의 기초다. 그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은 우리를 위하여 그가 하신 일에서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고(요 13:34; 엡 5:25),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서로를 용서하며(마 18:32, 33; 엡 4:32),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성령과 일치하는 새로운 삶을 살라(갈 5:25)는 부름을 받았다. 이처럼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행위에서 구속은 성취되고 제자로 부르신 부름이 무엇인지 드러났다. (351.2)
 주님의 요구에 따라 사는 것은 행함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으로써 자신의 삶을 꼴 짓게 하는것이다. 기꺼이 그의 요구에 따라 살고자 하지 않는 것은 그를 메시아로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가 이룬 왕국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그의 백성이 되고자 하지 않는 자들에게 왕이 되실 수 없다. (351.3)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과 그의 사랑을 본받는 일에 있어서 핵심 역할을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도덕으로 이끄는 확신(롬 3:8; 6:1, 15)과는 상관없이 새로운 도덕적 행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토대이다(3, 4절; 7:4; 8:2-4). (351.4)
 c. 긴장을 해결함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행함에 따르는 심판 사이에 생기는 긴장은 제안된 몇 가지 개념들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첫째, 칭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행함에 따르는 심판은 유대인의 묵시적 사상의 흔적으로 보인다. 이 견해는 신약에 나타난 심판 관련 본문의 빈도수와 그 내용의 엄중함 그리고 신자들에게 그것들이 적용된 점을 무시한다. 둘째, 심판 관련 본문은 회개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르신 부름으로 이해되기보다 단순히 인간이 할 수 없는 것과 그에 따라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이것은 용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어리석은 자들만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마 7:21, 24-27; 18:32, 33; 요 8:11는 성경의 교훈을 놓친 것이다. 셋째,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초기의 칭의와 완전한 행함에 의한 마지막 칭의를 구분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자비는 심판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마 5:7)는 점을 잊고 있다. 넷째, 하나님의 칭의의 판결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서는 구원이나 잃어버림을 다룰 수 없으며 다만 하늘에서 받을 축복의 등급만 다룰 뿐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러한 이해는 믿음을 고백한 신자들이 잃어버림을 당할 수 있다는 언급(마 7:21-23; 18:32-35; 요15:6; 롬 8:13; 고전 3:17; 6:9; 10:6-12; 갈 5:19-21; 엡5:5, 6; 살전 4:6; 계 21:8, 27; 22:15)이나 성경이 하늘에서의 등급 제도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는 점과도 조화되지 않는다. (351.5)
 모든 성경 자료를 진지하게 다룬 후 제시한 더 나은 견해는 역동적인 구원-역사적 견해(salvation-historical view)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것은 “이미” 시작된 구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의 두 기둥을 포함한다. 그것의 본질은 오직 하나의 칭의만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것이며(롬 1:17), 그것은 믿음의 시작부터 그 열매를 통하여 그 실재가 증명되는 마지막 심판까지 신자들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심판에서 하나님은 칭의를 그 열매와 함께 찾으시는데, 이것은 “믿음과 행함이 합하여 구원을 준다.”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칭의를 성화된 삶의 원천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행함에 따른 심판에 대하여 적절한 관심을 주지 않으면, 모든 원수가 진압되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때까지(참조 고전 15:24, 25) 십자가의 의미를 열어 보이는 구원 역사의 “아직” 국면을 무시하게 된다. 행함에 따른 심판은 십자가가 신자들을 구원자(Savior)뿐 아니라 주(Lord)이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둔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그가 만드신 작품인지, 그가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선한 일 가운데서 행하는지를 검증한다(엡 2:10). (351.6)
 행함과 관련한 최후 심판의 비밀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마 5:7)는 주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으며 자비가 없는 종에 관한 비유로 예증되었다(마 18:23-35). 역설적인 진리는, 자비는 자비로운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자비가 없는 공의가 최후 심판에서 작동하는 원칙이 될 것이라(에스드라 2서 7:33)는 유대인의 교훈과 달리 예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 자들에게 자비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자비로운 자들은 자비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아주 비슷하게 모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똑같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2T 549, 628). 결과적으로 심판에서 두 가지 실제가 필요하다.

   (1) 칭의의 열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2) 칭의는 용서의 기능을 계속해야 한다. (352.1)
 d. 확신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