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는 믿음의 성격에 관한 성경 전체의 다양한 자료를 요약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판결 및 선물과 요구에 대한 굴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는 하나님의 판결에 대한 굴복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다]”(롬 3:24)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굴복이다. 그리고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굴복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복음 기별의 기본 원칙에 대한 믿음(3, 4절; 살전 4:14),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신뢰(롬 4:19-21),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눅 13:25-33; 롬 1:5: “믿음의 순종”)을 포함한다. (347.2)
 2. 화목
 a. 용어와 기본적인 의미
 “화목”은 기본적으로 신약의 용어이며 동사 카탈랏소, 때로는 아포카탈랏소 그리고 명사 카탈라게를 옮긴 것이다. 이 용어가 등장하는 주요 구절은 로마서 5:10, 고린도후서 5:17-21, 에베소서 2:11-19, 골로새서 1:19-22이다. 그 개념의 내적 의미는 마지막 두 구절에 가장 완벽하게 나타나 있다. 에베소서 2:11에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밖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피의 결과로 한때 “멀리 있던” 자들이 “가까워졌고”(13절), 화평의 기별(14, 15, 17)을 받고, 적개심이 소멸하고(14, 16절),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과 하나 되는 일이 실현되었다. 바울은 골로새서 1:19-22에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21절) 자들의 화목을 강조한다. 다시 한번 평화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20절). 이 구절들은 화목이 하나의 과정, 즉 적개심이 제거되고 우정이 회복되는 과정임을 보여 준다. 양편이 화목할 때 전쟁은 끝나고 소원함도 사라진다. 그것은 화목이 화평과 동의어가 되는 이유이며, 그것은 다투어 왔던 두 편이 다시 연합하게 되는 것을 일 컫는다. 이것은 평화가 화목으로 시작되고 화목으로 마치는 로마서 5:1-11에서 볼 수 있다. (347.3)
 b. 칭의와의 관계
 화목은 로마서 5:9(그의 피로 의롭게 됨)과 5:10(그의 죽음으로 화목하게 됨) 사이의 평행 구가 보여 주듯 칭의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두 용어의 본질적 유사성은 고린도후서 5:18, 21에 나타난다. 18절에서 화목은 우리의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이것은 로마서 4:8에 나오는 칭의에 관한 설명에서 발견되는 표현이다. 고린도후서 5:21에서는 18-20절의 주제인 화목이 칭의와 밀접하게 연결된 “의”라는 말로 바뀌어 있다. 이 문맥에서 “그 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347.4)
 c. 객관적인 일로서의 화목
 화목이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 되기 전에 객관적인 사건이다. 고린도후서 5:18, 19, 21에 따르면 화목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과거의 구원 역사에서 일어난 이 객관적인 사건은 화목을 선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며, 이로 말미암아 실존적 수준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님과 화목하라”(20절)는 사도의 호소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사도의 설교에 비추어보면, 이미 얻은 화목은 모든 사람에게 투영되며 믿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거점을 찾는다. (347.5)
 로마서 5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직 죄인일 때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구원의 사건은 그들과 상관없이, 믿음이 나타나기 전에 있었다. 사실, 복음 전파를 통하여 예수의 죽음은 믿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적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적인 담을 무너뜨린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이 알리는 것은 사람들이 “우리의 화평”이신(엡 2:14)“그리스도 예수 안에”(13절) 이미 존재하고 있는 화목이라는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348.1)
 d. 화목의 목적들
 하나님 밖에서 일어난 사건, 곧 그분께 영향을 끼쳐 다시 한번 인류와의 친교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화목의 장으로 끌어낸다는 사상은 신약에서 낯선 개념이다. 누가 화목하게되느냐 하는 논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성구들을 조사해 보면 모호한 결과가 남는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들과 화목하고,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고 제시하지만 이것은 신약에서 실제로 강조하고 있는 점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 있는 인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아들을 주심으로 화목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사실 하나님은 그 제물 안에 있으면서 실수한 인류에게 구애하여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성경의 자료에 따르면 분명히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께서 화목하게 하는 자이며 우리는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고후 5:19; 롬 5:10; 엡 2:16; 골 1:21, 22). (348.2)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결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될 뿐 아니라(엡 2:17, 18; 참조 롬 5:1) 서로 간의 화평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되며(엡 2:14-16),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런 화평을 요구하신다(마 5:23, 24). (348.3)
 3. 양자됨
 a. 칭의와 성화의 관계
 칭의와 양자됨은 상호보완적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 함께 따라온다. 칭의처럼 양자됨도 율법을 그 배경으로 하며 “아들의 자리를 얻는” 법적 과정(헬라어 휘오쎄시아의 직역)을 언급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어 그에게 속한다는 성화의 기본적인 의미와도 관계가 있다. (348.4)
 b. 성경 상의 용법
 구약에서 양자됨은 정확하게 규명되거나 정규적으로 실행된 관습은 아니다. 이는 아마도 이스라엘인들이 일부다처제를 수용하여 상속자가 없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형사취수의 결혼에서 남편이 죽는 경우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이 가계 계승을 보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에서 양자됨은 전문적인 용어로나 혹은 법의 일부로 발견되지 않는다. 공식에 가장 가까운 경우가 시편 2:7에 나타난다. 거기에 보면 시온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대관식을 가리키는 언급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6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때 그에게 적용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의 하나님 백성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어렸을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호 11:1)는 것이다. 다른 큰 특권 중에서 이스라엘에게 “아들 됨”“양자됨”이 허락되었다고 말할 때 바울이 언급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롬 9:4). (348.5)
 이처럼 새 이스라엘인 교회(갈 6:16)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입양된 구성원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롬 8:15; 갈 4:5; 엡1:5). 양자됨의 실제는 에베소서 1: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예정하신 목적이 “자신을 위함”(에이스 아우톤)이라고 선언할 때 매우 감동적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자녀로 소속되기를 원하셨다. 진실로 신자들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외칠 수 있다(요일 3:1).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요 1:12-13), 하나님의 자녀로 불릴 수 있는 권리를 주셨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349.1)
 c. 로마의 입양과 그 신학적 의미
 바울이 입양의 개념을 사용한 것은 신학적으로 보면 그 기원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 데 기초 되어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신분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끌어내게 해 준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로마의 입양 관습이었다. 특히 복잡한 상징적 매매 절차를 통하여 입양하는 아버지는 그의 새 아들을 친부로부터 직접 데리고 왔다. 일단 그 거래가 마무리되면 아들은 입양한 아버지의 전적인 권위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은 양부의 품성과 의도에 따라 험악한 현실이 될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혜택도 함께 따라왔다. 이전의 가족관계에서 완전히 단절된 그 아들은 새 가족의 모든 권리를 얻었다. 양부는 매우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의 새 아버지가 되었다. 피입양자의 채무는 탕감되었고 그는 친아들처럼 새 아버지의 완전한 상속자가 되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었으며, 만일 그가 가족과 함께 왔다면 그의 자녀들 또한 새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신자들은 하늘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들이 되며, 그때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영을 통해 “아빠 아버지”라고 외친다(롬 8:15; 갈 4:6). 그들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죄의 빚은 탕감되고, 그리스도의 동료 상속자가 된다(롬 8:17; 갈 4:7). 그들은 재판관에게는 죄수로 간주되지 않으며, 주인에게는 종으로 간주되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는 자녀들로 간주된다. 더 나아가 그들이 현재 양자됨(“이미”)은 장차 올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적합한 새로운 몸을 받을 때(롬 8:23) 있을 미래의 종말적 양자됨(“아직 아니”)의 완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3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