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7에서 죄의 통치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하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 낱말이 디카이오오(통상 “의롭게 하다, 옹호하다”를 의미함)라는 점이 이해를 돕는다. 이 낱말은 전치사 아포(—로부터)와 함께 수동태로 사용되면 ‘—로부터 자유롭게 되다’를 의미한다(참조 행 13:39, 여기에서 용서는 ‘—에서 자유롭게 됨’과 같다). 그것은 로마서 6:18, 22에서 아포(—로부터)와 짝을 이룬 엘류쎄로오(자유롭게 하다)의 수동태와 평행을 이룬다. 바울에게 칭의란 죄의 용서 외에도 죄의 이전 통치로부터의 자유와 연관이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런 자유가 발생할 때 그것을 뿌리로 하여 거기서 성화의 열매가 나타난다. 칭의는 하늘 책에 단순히 법적조치를 기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실재이다. 그것은 성화된 생애를 방해하는 불법적 권위를 폐위시키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이 두 번씩이나 그 중간에 성화를 언급하지 않고 칭의와 영광화로 옮겨간 이유일 것이다(롬 5:2; 8:30). 완전한 의미에서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통치로의 이동에 바탕을 둔 도덕적 성장으로서의 성화의 개념을 의미한다. (343.2)
 (7) 공동체로서의 칭의
 칭의는 개인적 차원과 마찬가지로 집단적 차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낸다. 개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될 때 개인들 서로 간에도 바른 관계에 들어가 한 몸이 된다(롬 12:4; 15:7; 고전 12:12, 13; 엡 4:4, 5). 신분, 민족, 인종과 성(性)이 더 이상 친교를 막는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는 공동체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요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때문이다(눅 15:1, 2; 갈 2:12; 3:26, 28; 엡 2:13-19). (343.3)
 (8) 의의 실재로서의 칭의
 일반적으로 칭의에서 신자들은 흔히 그들이 의롭거나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취급된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두 가지 근거에서 볼 때 적절하다. 첫째는 의가 도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정의되면(정로의 계단, 62) 칭의는 죄인들이 마치 의로운 것처럼 취급된다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사망 대신 생명을 받았으므로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둘째로 칭의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은총과 의가 영혼 안으로 주입됨으로써 실제로 그렇게 된다고 주장하는 로마가톨릭의 견해와 논쟁하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마치 우리가 의인인 것처럼”이란 표현은 적절하다. (344.1)
 그러나 일차적으로 의나 칭의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한다는 관계적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제공하는 구원의 모든 혜택을 생각하면 ‘마치—처럼’이라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신자들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또 신자들이 그에 의해 받아들인바 되었다, 혹은 용서받고 화목하게 되었고 우리의 주님으로서 생명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들은 정말로 그런 것이다(참조 요일 3:2). 이처럼 관계적 의미에서 보면 로마서 5:9을 〈개정표준역(RSV〉이 옮긴 것처럼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344.2)
 f. 칭의의 근거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 죄인의 칭의를 가능하게 하고 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전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적인 속죄 제물로 여겨져 그에 따라 인간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진노를막는다. (344.3)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희생적 성격은 여러 본문에 나타나 있다.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는 로마서 3:25, 26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방법과 그 일을 발생시키는(24절) 구속적 행위의 성격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이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세우셨다. 그것의 효험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의 목적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는 그의 오래 참으심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25절). 하나님의 의가 이처럼 나타났을 때,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예수 믿는 사람도 의로운 위치에 두는 분으로 드러날 것이었다(26절). 이 구절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1:16, 17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여기서 복음의 선포는(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믿음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개체라고 말한다. 17절에 현재 시제로 진술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의에 관한 계시는 로마서 3:21에 다시 등장하여 과거 시제로 쓰이고 그것의 매개체인 율법에서 단절되고(율법은 오직 진노만을 이루기 때문에, 롬 4:15) 십자가와 연결된다(롬 3:25).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24절),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서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는 현재 활동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복음을 통하여 적용되는데(롬 1:17), 그것은 예수의 죽음이라는 역사적사건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바로 그 의다(롬 3:25). 하나님이 예수를 힐라스테리온(속죄제물)으로 삼으셨을 때 그의 구원하시는 의가 완전하게 나타났다.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증거나 성경 외적 증거에 의하면 희생제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힐라스테리온을 적합하게 해석하려면 로마서 1:16- 3:25에 있는 바울의 사상의 3대 주요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바울은 하나님이 힐라스테리온의 수용자가 아니라 제공자임을 강조한다(롬 3:25).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십자가가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그를 감동시킨 하나님 밖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서의 사건으로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희생적인 사랑을 표현하신 것임을 보여 준다(참조 롬 5:8; 엡5:2; 요일 4:10). 하나님은 자기희생을 통하여 죄의 고통과 죄책을 스스로 지시고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속죄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친히 속죄 제물을 제공하셨다. 둘째로 바울은 두 가지 부가적인 요소, 즉 죄의 현실과 진노의 실재를 강조한다. 힐라스테리온의 번역과 의미는 서로 인과관계에 있는 이러한 쟁점들을 역시 다루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반드시 진노를 나타내신다. (344.4)
 힐라스테리온은 주로 “propitiation”(진노를 달램)과 “expiation”(속죄, 죄를 제거함)로 번역되는데, 전자는 진노를 제거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후자는 죄를 정결케 한다는 것 혹은 죄를 씻어내는 것을 강조한다. 두 번역은 각각의 강점이 있지만, “expiation”(속죄)라는 의미가 더 나은데, 그 이유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노가 아니라 진노를 일으킨 죄이기 때문이다 만일 죄가 그 속해진다면(제거된다면) 진노는 피할 수 있다. 덜 추상적이면서 매우 좋은 번역은 “속죄 제물”(sacrifice of atonement)로서 이 번역은 “propitiation”(진노를 달램)의 지지자와 “expiation”(속죄)의 지지자 사이에 격화된 논쟁을 피하게 해 주고 구약의 성소 봉사의 중심적 요소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며, 시각적으로도 힘 있는 번역이다(참조〈새국제역〉,〈새개정표준역〉). 이런 번역은 로마서 1:16-3:25에 나오는 힐라스테리온의 세 가지 필요한 요소들 전부와 로마서 3:25“그의 피로써”라는 말과 쉽게 연결된다. 이런 표현은 “믿음을 통하여”보다는 힐라스테리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새개정표준역〉은 그 절의 전반부를 다음과 같이 잘 옮겼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그의 피로써 속죄 제물을 삼으시고 믿음을 통하여 유효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힐라스테리온의 적절한 문맥적 이해는 죄를 위해 속죄하신 하나님에 의하여(‘하나님께’보다는) 제공된 피의 제물이며 그리하여 그 제물을 받아들이는 죄인들에게서 그의 의로운 진노를 돌이키신다는 것이다(참조 그리스도 II. D. 3). (345.1)
 로마서 3:25의 후반부에 따르면 십자가의 기능은 “지나간 죄”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들은 십자가 이전 전 세계의 죄이며, 의미상 십자가 이후의 모든 시대의 죄이다. 지나간 죄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를 통하여 오는데,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죄 제물(sin offering)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지고 하나님의 완전한 자비를 죄인들에게 제공한다. (345.2)
 로마서 3:26의 전반부는 25절 후반부와 평행을 이루는데, 둘 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힐라스테리온으로 삼아 그의 의로움을 나타내심에 관하여 말한다. 그의 아들의 희생적 선물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나타나고, 인류의 반역적 죄가 속죄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도말되어,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의롭게”(디카이운타)하시는 의로운(디카이오스)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 이 절에서 같은 헬라어가 다른 형태로 하나님의 본성과 사업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의미는 속죄하는 희생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품성과 일치하게 행동하는 분임을 보여 준다는 것인데, 그가 죄인을 자비롭게 취급하시는 만큼 그의 의로운 품성은 죄를 심각하게 취급한다. 그가 자비를 베푸신다고 하여 그의 공의가 양보하는 것은 아니다. (345.3)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인 희생이라는 입장은 다수의 본문에 의하여 입증된다. 로마서 8:3은 우리의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속죄 제물로서” 오셨다고 선언한다. “죄를 위하여”(페리 하마르티아스)라는 표현은 헬라어 〈70인역〉의 레위기 5:6, 7이사야 53:10에서 속죄제 혹은 속건제를 말할 때 사=었다. 이 사상은 고린도후서 5:21에서 하나님이 “그를 죄로 삼으셨다”라는 구절을 배경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삼으셨는데,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셨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3:13이 말하는 바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이번에는 베드로전서 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라는 말과 조화를 이룬다. (345.4)
 예수의 희생적 죽음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으며(막 10:45) 최후의 만찬 때의 떡과 포도주는 그의 찢긴 몸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그의 피를 상징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참조 히 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는 구약의 명제를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침례자 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 29)이라고 일컬은 것처럼, 또 바울이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한 것처럼, 베드로도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벧전 1:18, 19)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피의 개념은 로마서 5:9; 에베소서1:7; 2:13; 골로새서 1:20; 히브리서 9:12-14; 13:12; 요한계시록 5:9에서처럼 명백히 희생적인 것이다. 피 모티프(motif)는 히브리서에서 강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가장 분명한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의 죽음을 제물로 일컫는다(9:26, 28; 10:11, 12, 14). 에베소서에서도 바울은 이 죽음을 희생제물로 보고 그것을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결시킨다(5:2). (346.1)
 덧붙여서, 다수의 성구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휘페르)죽으셨다고 확증한다(롬 5:5, 8; 고전 15:3; 고후 5:14, 15, 21; 갈 1:4; 2:20; 엡 5:2; 살전5:9, 10). 한편 로마서 4:25은 전치사 디아(—때문에)를 동사 파라디도미(넘겨주다)와 함께 사용한다. 이 구조는 이사야 53:12의 〈70인역〉과 평행을 이루는데, 거기서 주의 종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내어준바” 된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이사야 53장에서 많은 표현을 가져와 예수의 죽음에 적용한다(벧전 2:22사 53:9; 벧전 2:24의 표현은 사 53:4, 5, 12에서 유래되었고 벧전 2:25사 53:6을 반영함). [주의] 종이 죄인을 위하여 대리적 죽음을 죽는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이사야 53장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346.2)
 이 증거는 예수의 죽음이 죄인을 대표할 뿐 아니라(고후 5:14, 15) 그들을 대속하신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기 죽음으로써 죄인들이 개인적으로 져야 했던 죄책과 형벌, 심판과 진노를 모두 짊어지셨기 때문이다(참조 그리스도 II. D. 1, 2.). (346.3)
 g. 칭의의 수용
 성경은 칭의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관하여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이는 그것이 예수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사람의 일이 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일이었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헛되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갈 2:21). 신약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라든지 숙명으로 말미암는 의 같은 극단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친다. (346.4)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신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수단임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 모든 표현은 “믿음으로”라고 번역되었으며 에크 피스테오스(롬 1:17; 3:30; 5:1; 9:30; 10:6; 갈 2:16; 3:7, 8, 11, 12, 23; 5:5), 디아 피스테오스(롬 3:22, 30; 갈 2:16; 에크디아와 함께, 3:14; 엡 2:8), 에피 피스테이(빌 3:9, 역시 디아 피스테이를 포함하여), 피스테이(단순 여격, 롬 3:28) 등을 포함한다. 로마서 1:17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믿음에서 믿음으로”)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데, “오직 믿음으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를 의미한다. 발견되지 않는 표현은 디아 피스틴(대격)으로, “믿음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믿음의 행위를, 하나님의 행위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칭의의 근거로 삼을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다. (346.5)
 칭의가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많은 증인을 근거로 내세우는 갈라디아서 2:15-3:18에서 뒷받침된다. 여기에는 율법과 선지자의 증언(3:10-12), 그리스도의 죽음(13, 14절), 시내에서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바울(2:15-21), 갈라디아인들(3:1-5), 아브라함(6-9절)의 경험이 포함된다. (3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