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서의 칭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상태에 있는 사람은 칭의 [과정]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다.(“의롭게 만들다”[유스툼 파체레]라고 번역한 라틴어〈불가타역〉에 기초한) “의롭게 여기다”(justify)와 “칭의”(justification)는 말이 “옳다고 여기다(rightify)”“옳다고 여김”(rightification으로 번역되었다면 이것이 더 잘 드러났을 것이다. 모든 용어는 헬라어의 어간 디크로 시작하기 때문에 영어에서는 어간 “rights”로 시작되는 게 최선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칭의와 옳음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은 금방 보아도 명백하다. 사실 두 용어가 동의어라는 것은(로마서 5:7; 6:13에서처럼 의가 윤리적인 의미로 엄격하게 사용되는 곳을 제외하고는)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전달하려고 한 주제를 하나님의 의라고 밝혔지만(1:17; 3:21), 그는 대체로 줄곧 칭의에 관하여 그의 이야기를 끌어간다. 둘째로 칭의와 의는 로마서 4:5에서 등등하게 취급된다. (339.3)
 (2) 무죄 선고로서의 칭의
 법정 혹은 사법적 배경과 직접 관련된 칭의의 의미는 “유죄 판결”의 반대인 “무죄 선고”이다. 대조적인이 한 쌍의 용어는 신명기 25:1; 잠언 17:15; 마태복음 12:37; 로마서 5:16, 18; 8:33, 34; 고린도후서 3:9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칭의에서 하나님은 모든 고소에서 죄인들에게 무죄 선고를 내림으로써 그들의 죄에 대하여 선고된 유죄 판결에서 죄인들을 구원 하신다. (339.4)
 (3) 의롭다고 여기는 것으로서의 칭의
 칭의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구절은 로마서 4장이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도덕적 표본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이 불려 나와 하나님 백성의 조상인 그가 발견한 것과 그의 후손들이 또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예증한다(1-5, 22-24절). 최고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했다면 모두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주장은 2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게 없다는 바울의 선언으로 부인되고 있다. 이것은 만일 창조주 앞에서 자랑할수 없다면 칭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한다. 이처럼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3절에서는 창세기 15:6을 인용하면서 그가 발견한 것을 묘사하는데, 즉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1-6절의 논의의 흐름은 세가지 주요 단계를 밝힌다. 하나님 [편]의 축복의 약속, 인간[편]의 믿음의 반응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선언이 그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임을 선언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표지(標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혹은 의는 약속에서나 믿음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그 두 사이의 인과(因果)적인 상호작용으로 오는 것이다. 약속은 믿음을 이끌어내며, 믿음은 약속을 받는다. 로마서 4:3의 논증은 만일 하나님의 의가 인정된다면, 그것은 결코 사람의 업적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 4절에서는 일들이 인간의 수준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가리킨다. 즉 사람들은 일하고 난 후 그 일에 대하여 은혜가 아닌 삯을 받는다. 한편 5절에서는 일들이 하나님의 수준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지적한다. 즉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의를 위해 일하기를 단념할 때 이러한 신뢰나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 (340.1)
 불경건한 자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하거나 의로운 자들로 인정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혁명적인 성명서이다. 바울의 동시대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불경건함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며(그 때문에 롬 3:86:1, 15에서 바울을 고소한다), 하나님은 악인을 죄 없다 하지않으시고(출 23:7)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잠 17:15)고 말하는 히브리 성경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이런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의로운 자들이다(참조 왕상 8:32). 바울이 제기한 명백한 윤리적 딜레마에 어떤 답이 주어질 수 있을까? 시편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은 그가 악인을 저주하시는 때 의롭다고 인정되신다(51:4). 그러면 무엇이 경건한 자들이 아닌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그의 일을 정당화하는가? 시편 143:2에서 우리는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러한 빛으로 보면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유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불의한 백성들과 함께 심판에 들어가시며, 믿기 어렵겠지만, 그 판결은 “유죄”가 아니라 “의롭다!”이다. 무엇이 이런 모순처럼 보이는 일을 지지하고 있는가? 먼저, 2절과 조화하여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의 권능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9, 23)고 가르쳤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만일 누군가가 의롭다고 인정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바울은 다만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그에게 믿음을 두고 신뢰하는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에 “예”로 반응하며 그분의 자비에 자신들을 던진 사람들이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과 새롭게 협력하는 것, 즉 하나님께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동사 아만(여기서 영어 “Amen”이 유래됨)은 창세기 15:6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할 때의 그 단어이며, 로마서 4:3에서 인용되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다 셋째로, 의롭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제공하는 속죄의 제물 안에 있다(25절). 이것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일이 제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제사제도와 조화를 이루며, 참회하는 자들에게 용서가 허락된다고 말하는(참조 시편 51편) 구약의 여러 말씀과도 조화를 이룬다. (340.2)
 (4) 하나님의 용서로서의 칭의
 로마서 4:6-8에서 바울은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아브라함과 및 잘 알려진 창세기 15:6 본문을 논하면서 바울은 이제 다윗과 또 잘 알려진 다른 본문인 시편 32:1, 2에 대하여 논한다. 구약에서 중요한 증언은 적어도 두 명의 증인에 의해 확정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기 때문에(신 17:6)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에서 믿음의 의(롬 3:21)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과 다윗을 증인으로 제시한다. 사실 그는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는 말의 의미를 더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 다윗의 증언을 사용한다. 여기서 그는 랍비 힐렐의 성경해석의 두 번째 규칙인 게제라 샤와(gezera shawah), 즉 “표현의 등가(等價)” 원리를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참조 Strack 93, 94). 이 원리에 따르면 성경의 한 본문에서 발견된 낱말이나 어구는 다른 본문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여기다”라는 말은 창세기 15:6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편 32:1, 2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바울은 전자[창세기 본문]를 조명하기 위하여 후자[시편 본문]를 그 삼중 대구법과 함께 사용한다. 칭의는 죄의 용서와 죄를 덮음, 혹은 신자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의미하게된다(롬 4:7, 8). 달리 말하자면, 죄책은 없어지고 심판받아야 할 죄가 더는 나타나지 않고 모든 기소는 기각된다. 고린도후서 5:19에서 하나님이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메아리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십자가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처럼 용서는 칭의의 심장부에 놓여있다. (341.1)
 용서의 개념은(성경이 그것을 정의하고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다른 중요한 용어와 개념에 의하여 확장된다. 용어를 살펴보면 용서의 실재가 히브리어 성경에서 시각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데, 덮음(카파르[출 29:36; 레 8:15]; 카사[느 4:5; 시 32:1]), 지음(마하[시 51:1]), 들어서 멀리 놓음, 제거함(창 50:17) 등이 그 예다. 속죄의 개념은 특히 카파르와 연관되어 있으나 나사와도 연관이 있다. (341.2)
 헬라어 신약에서 용서는 멀리 보냄(동사 아피에미[마 6:12, 14, 15; 롬 4:7]와 명사 아페시스[마 26:28; 행 5:31; 골 1:14]), —에게 은혜로움(카리조마이[눅 7:43; 고후 2:7; 골 2:13]) 혹은 —에게 자비가 많음(힐라스코마이[눅 18:13헬리오스, 히 8:12]), 덮음(칼립토[약 5:20; 벧전 4:8] 그리고 에피칼륍토[롬 4:7]; 물러가게 함(아폴뤼오[눅 6:37]) 혹은 지움(wipe away, 엑살레이포[골 2:14, 13절의 용서와 연결하여])로 묘사되어 있다. 속죄의 개념은 힐라스코마이 계열의 낱말에서도 발견 된다. (341.3)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화목하거나 교제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으로, 히브리 그리스도인 신앙에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메시아 시대의 두드러진 복이었다(사 43:25; 렘 31:34; 33:8; 50:20; 미7:18, 19). 용서의 중요성은 인간 지향적인 면뿐 아니라 하나님 지향적 면에서도 살펴야 한다. 인간 지향적인 면을 보면,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 인간의 형편(사 59:2; 롬 1:18; 2:3, 5, 8, 9)은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영원한 죽음밖에 없었다(롬 6:23). 만일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취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되고 하늘에서는 즐거움이 사라진다(참조 눅 15:6, 7, 9, 10, 23, 24).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열망은 십자가에서 그에게 가해진 죄악의 극악무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올린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함축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탄원하였다(눅 23:34). 탕자의 이야기에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 같이(눅 15:11-24)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기를 갈망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기별이다. 그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인정할 때(18절)그는 하나님의 연민과 받으심(20절), 용서와 정결케 함(시 51:1, 2, 7, 9; 요일 1:9)을 받아들일 것이다. (341.4)
 용서의 확장에 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로부터 멀리 제거하신다고 하며(시 103:12), 또 깊은 바닷속에 혹은 그분의 등 뒤로(사 38:17) 그것들을 던지겠다거나(미 7:19), 그 죄들을 도말하거나 사라지게 하겠다고 하고(시 51:1, 9; 사 43:25; 44:22),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렘 31:34) 말하는 분으로 나타낸다. 하나님의 일이 다 이루었을 때 사람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는다(눅 7:47; 골 2:13). 그리스도께서 속죄하는 제물, 곧 믿음을 통하여 그것의 효력이 발생되는 제물로서 죽으신 것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었다(롬 3:25). (342.1)
 개인이 용서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조건이나 뒤따라야 할 일은 회개, 고백, 침례(막 1:4; 행 2:38; 3:19; 요일 1:9), 믿음(행 10:43; 약 5:15), 그리스도와의 연합(엡 1:7; 4:32)이다. (342.2)
 용서가 비록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모두가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예수의 기적적인 치료 행위를 사탄의 행위로 돌리는 자들을 위한 용서는 없다(마 12:31, 32). 이것을 소위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고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거부될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위해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히 6:4-6). 우리는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지” 않고(히 12:25), “은혜의 성령”을 진노하게 하지 않도록(히 10:29) 부르심을 받았다. (342.3)
 더 나아가 만일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골 3:13) 마지막 심판에서 용서받지 못한다(마 6:12, 14, 15; 눅 6:37).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 횟수에는 제한이 없다. 일곱번에서 끝나지 않고 “칠십칠 배”까지라도 복수하려는(창 4:23, 24) 변화되지 못한 사람의 열망과 대조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실천하여야 한다.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은 자비가 없는 종의 비유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마 18:23-35).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35절)은 마땅한 일로 일컬어진다(데이, “마땅하다”[33절]). 이 비유는 예수의 교훈의 핵심 사상인“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라는 가르침(눅 6:36)을 강조한다. (342.4)
 (5) 종말적 삶과 새 창조로서의 칭의
 칭의는 또한 새로운 삶의 선물과 연관이 있다. 로마서 5:18에서는 십자가에서 보여 준 예수의 순종의 행동이 “생명의 칭의”(디카이오시스 조에스의 문자적 번역)로 인도한다고 가르친다. “생명의 [칭의]”라는 말(헬라어로 속격)은 “생명을 주는 칭의” 혹은 “생명에서 나온 칭의”로 옮길 수 있다. 이와 조화하여 로마서 4:17에서는 칭의의 완전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위대한 실재, 즉 창조(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로 부르신다.”)와 부화하나님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다.”)을 사용한다. 달리 말하면, 칭의는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새로운 창조이다(참조 엡 2:1-5).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칭의는 갈라디아서의 주요 주제인데, 바울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창조(갈 6:15)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울의 랍비적인 배경과 일치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그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창조물로 여김을 받는다고 한다. 로마서 6:4은 그리스도와 합한 자를 생명의 새로움을 가진 것으로 말하는데(“영의 새로운 것”[롬 7:6]), 이는 장차 올 시대의 종말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 새 생명은 성령을 통하여 가능하게 된 것으로 윤리적 변화의 기초가 되는데, 이는 성령이 가져온 생명은 성령의 인도 아래 행동하게 되어 그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갈 5:22-25). (342.5)
 (6)통치권의 교체로서의 칭의
 한 가지 요소, 즉 그것이 없으면 칭의에 내포된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가지 요소를 로마서 6장에서 볼 수 있다. 6장을 쓰게 된 계기는 율법과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롬 3:21-4:25)에 관한 오해 때문이었다. 그의 교훈은 신자들이 선이 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개의치 않고 악을 행할 수 있다거나 은혜를 풍성하게 하려고 죄 안에 계속 머물러있어도 된다(롬 6:1)는 식의 의미로 오해되었다(롬 3:8). 이것은, 율법이 시내에서 계시되었을 때 죄는 전혀 줄어들기(유대인의 입장)는 커녕 죄가 넘치게 되었고 그래서 오직 더욱더 넘치는 은혜만이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는 바울의 가르침으로부터 잘못 추론된 것이었다. 바울을 비평하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이런 논리가 불경건한 자들의 칭의뿐 아니라 불경건의 칭의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칭의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6장을 기록했다. 그의 주된 논증은 신자의 생애에서 통치권의 이동 혹은 교체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죄는 전에 주인이었으나(17, 20절)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고 그의 죽으심으로(3, 4절) 죄의 통치권이 죽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서 8:3의 법정 언어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는 사법적으로 자신의 육체에 죄를 정하였다(정죄하였다). 이렇게 해서 죄는 법정 소송에서 패소했다. 이로써 죄는 그리스도께 연합한 자의 삶에 대한 권리 혹은 감독권을 빼앗긴다. (3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