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건한 자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하거나 의로운 자들로 인정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혁명적인 성명서이다. 바울의 동시대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불경건함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며(그 때문에
롬 3:8과
6:1, 15에서 바울을 고소한다), 하나님은 악인을 죄 없다 하지않으시고(
출 23:7)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
잠 17:15)고 말하는 히브리 성경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이런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의로운 자들이다(참조
왕상 8:32). 바울이 제기한 명백한 윤리적 딜레마에 어떤 답이 주어질 수 있을까? 시편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은 그가 악인을 저주하시는 때 의롭다고 인정되신다(
51:4). 그러면 무엇이 경건한 자들이 아닌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그의 일을 정당화하는가?
시편 143:2에서 우리는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러한 빛으로 보면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유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불의한 백성들과 함께 심판에 들어가시며, 믿기 어렵겠지만, 그 판결은
“유죄”가 아니라
“의롭다!”이다. 무엇이 이런 모순처럼 보이는 일을 지지하고 있는가? 먼저,
2절과 조화하여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의 권능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롬 3:9, 23)고 가르쳤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만일 누군가가 의롭다고 인정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바울은 다만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그에게 믿음을 두고 신뢰하는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에
“예”로 반응하며 그분의 자비에 자신들을 던진 사람들이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과 새롭게 협력하는 것, 즉 하나님께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동사
아만(여기서 영어
“Amen”이 유래됨)은
창세기 15:6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할 때의 그 단어이며,
로마서 4:3에서 인용되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다 셋째로, 의롭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제공하는 속죄의 제물 안에 있다(
25절). 이것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일이 제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제사제도와 조화를 이루며, 참회하는 자들에게 용서가 허락된다고 말하는(참조
시편 51편) 구약의 여러 말씀과도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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