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는 아무도 없다(출 20:19; 33:20). 그러나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에게 그분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되 모든 형편을 보살펴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그 기념으로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곳에 있던 샘물을 ‘브엘-라하이-로이’(בְּאֵר־לַחַי־רֹאִי, Bü´ër laHay rö´î)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갈은 낳게 될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엘’(יִשְׁמָעֵאל, yišmä`ë´l) ‘하나님이 들으심’으로 하라는 지시와 함께 그의 후손이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란 약속도 받았다. 아브라함은 하갈이 낳은 아들을 지시 받은 대로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지었다(창 16:11, 15). (70.3)
 하나님이 여주인을 멸시하는 불충성스런 여종을 돌보아 주셨다. 그녀의 후손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게 해 주시고, 그녀의 안전과 복지를 마련해 주셨다. 마땅히 받을 처벌을 받았지만 하갈과 태중의 아이까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71.1)
 하나님께서 나의 궁핍, 나의 고난에 관심을 갖고 계심을 의식할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힘이 솟는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갔지만 더 이상 참담한 심경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 밝은 미래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의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있는 내일의 소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33 하갈을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도록 하신 하나님은 틀림없이 저들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고 서로 화목하도록 하셨을 것이다. ‘부드럽게 된 그녀는 그녀의 철천지 원수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체험담을 갖고 자기가 떠나온 집으로 돌아갔다.’34 (71.2)
 7. 엘 샷다이
 ‘엘 샷다이’(אֵל שַׁדַּי, ´ël šaDDay)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전능자’를 의미하는 ‘샷다이’는 구약에 48회 등장하는데 이 용어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욥기는 ‘샷다이’를 단독으로 31회 사용했고,35 창세기는 여섯 번 사용했다(창 17:1; 28:3; 35:11; 43:14; 48:3; 49:25).36 ‘샷다이’‘충분함’, ‘주’, ‘비의 신’, ‘산의 신’을 의미하는 다양한 어근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족장후기에 이 신명을 ‘샤다드’(שָׁדַד, šädad‘황폐시키다, 파괴하다’와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듯 한데 이것은 수사학적인 익살(paronomasia, 같은 음의 말로 하는 익살, 신소리)에 해당할 뿐 어원적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37 ‘샷다이’‘(여성의 )가슴’과 어원적으로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이 단어는 후에 ‘산’을 의미하게 되었다. 산은 능력의 상징이기 때문에 ‘엘 샷다이’‘어떤 것이든지 하실 수 있고 어떤 필요라도 채워주실 수 있는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충분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다.38 (71.3)
 ‘아브람이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하나님은 ‘엘 샷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나타내셨다.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 살, 사라가 아흔 살이 되어 둘 사이에 직접적인 후사를 기대할 수 없는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72.1)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개명 하시면서39 후사인 이삭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정한 때에 어김없이 성취되었다(창 17:1, 5, 15; 21:1-2). 열국의 아비여왕이라는 그들의 새 이름은 이삭이 반드시 태어날 것이고, 아브라함이 큰 나라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열국의 아비가 될 것임을 확증하고 있다.’40 (72.2)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창 28:3). 야곱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한 인물이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약속된 축복을 인간의 힘으로 성취하고자 비열한 수단을 동원하여 형에게서 장자권과 부조의 축복을 빼앗았다. 야곱이 형의 복수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외삼촌의 집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치던 날, 이삭은 ‘엘 샷다이’의 축복을 그에게 해주었다. 그는 비록 빈털터리로 집을 떠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한 거부가 되고 여러 족속을 이루게 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면 아무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부요하다. (73.1)
 3) 창세기 35장, 43-49장
 이십년의 수고로운 삶을 끝내고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이전에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추억이 서려있는 벧엘에서 ‘엘 샷다이’라는 이름으로 야곱을 만나서 이삭에게서 물려받은 부조의 축복을 성취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 35:11). 야곱의 아들들이 베냐민을 요셉에게 데려가야만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야곱은 방랑길에 자기를 돌보아 주셨던 전능하신 하나님이 요셉을 감동 시키셔서 아들들을 안전하게 돌려 보내주기를 소망하였다(창 43:14). 야곱은 후일에 요셉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성취하셨다고 말하며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기의 것으로 축복하였다(창 48:3-5). 야곱은 유언을 통해서 요셉을 전능자께서 축복해 주시길 기원하였다(창 49:25). (73.2)
 ‘엘 샷다이’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다. 사라처럼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연령에 아이를 낳게 하셨고, 교활하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라반의 손에서 야곱을 구출하여 든든한 산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으며(창 21:2; 31:41-42), 그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온전히 성취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생애의 짐이 아무리 무겁고 불가능해 보여도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으로 온전히 만족할 수 있다. (74.1)
 8. 엘 올람
 ‘엘 올람’(אֵל עוֹלָֽם, ´ël `ôläm)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며 창세기 21:33에서 ‘야훼’와 동격으로 사용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끝없이 지속되는 시간적 요소 보다는 하나님의 충만성에 더 큰 무게를 둔 표현이다.41 후에 올람은 다윗 왕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사용이 되었다(삼하 7:13, 16). (74.2)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 21:33). 아브라함은 블레셋왕인 아비멜렉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행하심으로 아브라함이 번창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진실되게 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했다. 아브라함은 조약을 맺기에 앞서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에게서 강탈한 샘의 소유권을 돌려주기를 요청하여 그것을 돌려받았다. 두 사람은 조약을 맺은 후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이라고 칭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보낸 후 그곳에 에셀 나무를 심고 ‘야훼’ 하나님을 ‘엘 올람’‘영원하신 하나님’이라 불렀다. (74.3)
 아브라함이 블레셋 왕에게서 우물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행동이다. 아브라함은 이미 양과 소로 언약을 세웠지만, 그 외에 일곱 마리의 암양 새끼를 따로 떼어 아비멜렉에게 주며 우물을 자기가 팠다는 징표를 삼아 더 이상 우물의 소유권에 대해서 분쟁이 일지 않도록 확실하게 했다. 히브리어로 일곱과 맹세는 발음이 같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후사를 얻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땅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여전히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에 불과하였다. 아비멜렉은 이 사실을 지적했다. ‘네가 머무는 이 땅’(창 21:23)에 사용된 동사 ‘구르’(גּור, Gûr)는 ‘외국인으로 체재한다’는 뜻이다. 체재하는 땅은 잠시 지나가는 곳이다. 그곳은 일시적인 곳이다. (75.1)
 아브라함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땅을, 이제 겨우 소유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건조한 지역에서 생존의 필수 수단인 우물이었다.42 (75.2)
 아브라함은 기념으로 에셀나무를 심었다. 에셀나무는 침처럼 생긴 잎을 가진 상록수로 땅속 깊이 30미터나 뿌리를 내려 지하수를 흡수한다. 다른 나무들이 말라 죽을 때도 이 나무는 건재하기 때문에 기념식수로 안성맞춤이다. 이 나무는 연중 내내 염소들의 먹이를 공급한다. 이 나무는 그에게 살아계신 하나님, 나그네 길의 힘든 고비를 지날 때도 끊임없이 그에게 든든한 힘이 되시는 영원한 하나님을 기억나게 하였다. 그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