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칠일 안식일은 ‘엘로힘’이 시간과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알려준다. 생명체의 고향이 되는 지구 속에 창조 주일을 통해 새 역사의 장을 여신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 일반적으로 축복의 대상은 땅이나 인간, 순종적인 하나님의 백성이나 저들이 하는 일이다(신 26:15; 창 9:1; 26:12; 신 4:40; 5:16; 6:3; 23:20; 28:12). (51.4)
 하나님은 생태계 속의 생물들에게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주셨다. 그분은 창조를 통해 도래한 축복의 시대를 알리는 기념으로 제 칠일이라는 시간을 복주시고 성별하셨다. 안식일은 시간을, 나아가서 시대를, 더 나아가서 인류의 전 역사를 구원의 역사가 되게 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매 주마다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다. (51.5)
 한 생명체로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사는 유한한 존재이다. 우리는 테러와 도덕적 혼탁함으로 가득 찬 이 땅에서 미래의 생존자체에 위기까지 느끼며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시공간의 주인이신 ‘엘로힘’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에게 눈물과 사망과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선사하실 것이다(사 65:17; 계 21:1). (52.1)
 6) 구원사는 ‘엘로힘’의 역사이다
 별들과 지구의 운행을 붙드시고 만물의 생명의 법칙을 유지하시는 ‘엘로힘’이 타락한 세상 속의 인간들을 찾아오셨다. 창세기는 ‘엘로힘’과 생동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갔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52.2)
 인류의 시조 아담이 죽었을 때 온 세계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느끼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때 ‘엘로힘’은 그와 함께 걷던 에녹을 그분의 거처인 하늘로 데려가셨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창 5:24). ‘엘로힘’은 에녹의 사건을 통해 사망의 권세를 초월하는 생명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생명이신 주님을 찾는 이들은 영생의 상을 얻게 된다는 것을 옛 시대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다(히 11:6). (52.3)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인류가 자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엘로힘’은 그와 함께 걷던 노아를 의를 전파하는 전도자로 선택하셔서 옛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셨다(창 6:9; 벧전 3:19, 20; 벧후 2:5). (52.4)
 ‘엘로힘’은 새 세계를 여는 제 이의 아담으로 노아를 택하셨고 인류 구원의 약속으로 하늘의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걸어 놓고 언약의 표를 삼으셨다(창 8:1; 9:1, 12-16).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할 때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그 엎으시는 도시로부터 롯을 탈출시키신 분도 ‘엘로힘’이셨다(창 19:29). 요셉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궁극적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세상으로 인도하실 구속사의 주관자이신 ‘엘로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소망을 갖고 죽었다(창 50:25). ‘엘로힘’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 축복의 새 언약 속에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사랑으로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한 백성을 모든 인종과 언어를 초월하여 모으고 계신다. (52.5)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엘로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참조, 렘 32:40). (53.1)
 7) ‘엘로힘’은 복수형이지만 언제나 단수 동사나 형용사를 수반한다
 이런 용례는 히브리인들에게만 속한 특수 현상이며 다른 셈족들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9 ‘엘로힘’‘신들’이라고 번역될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경우는 이방의 ‘잡신’들을 가리킬 때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블레셋인들은 다신교적 배경 속에서 ‘신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에 상응하는 복수 형태의 형용사와 동사를 사용하였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삼상 4:8). 그들은 모든 능력과 탁월함의 총화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53.2)
 8) ‘엘로힘’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계시이다
 복수형이지만 단수 동사나 형용사를 수반하는 히브리어 성경의 ‘엘로힘’과 관련된 특이한 언어적 현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계시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말한 ‘우리’ 구절들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조명하고 있다. (53.3)
 ‘우리’가 최초로 사용된 구절은 창조기사 속에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본문에 ‘우리’가 최초로 등장한다. 창조주이신 ‘엘로힘’이 피조물들과 이미 생명의 언약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을 맺으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형상인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자신 안에서도 언약을 맺으셨다(창 1:22).10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생명의 언약에 따라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복수이지만 단수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단수)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복수)를 창조하셨다.’(창 1:27). (54.1)
 ‘우리’는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될 때 두 번째 사용 되었다.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 3:22). ‘우리’가 세 번째로 사용된 것은 바벨탑 이야기 속에서이다. 바벨탑 사건은 반역적인 인간의 집단행동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응을 ‘자, 우리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자, (우리가)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고 했다. 하나님도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고 하셨다(창 11:4, 7). 창세기 밖에서 하나님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신 또 한 가지의 예는 이사야 6:8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54.2)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암시는 창세기 1:2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조 때에 성령께서 지구를 품에 안고 계셨다. (54.3)
 비단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뿐 아니라 온 세계 사람을 대상으로 철학적 측면에서 신앙 문제에 접근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신을 가리킬 때 의도적으로 ‘야훼’를 피하고 창조주를 가리키는 ‘엘로힘’을 사용했다(전 1:13; 3:10, 13; 5:18; 7:18; 8:2, 13). (55.1)
 그는 하나님을 ‘너의 창조주들’(בּוֹרְאֶיךָ, Bôr´Êkä)이라고 말하였다(전 12:1). 동서고금을 통해서 가장 탁월한 지혜자가 성령의 영감 속에서 창조주이신 ‘엘로힘’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파악한 것으로 이해된다. (55.2)
 ‘우리’가 사용된 구절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의지가 동일할 뿐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절대적인 능력을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남김없이 쏟아 부으신다는 것을 증거 한다. (55.3)
 삼위일체 하나님은 에덴 추방 시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한 속죄의 희망을 인간의 가슴 속에 심어 주셨다. (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