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엘룐’은 그분이 지으신 온 천하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외롭게 사단과 맞서 싸워야 하는 외방 선교지의 선교사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저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요새가 되신다. 지금 ‘엘 엘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열방이 무릎 꿇어 경배하도록 하나님을 옷 입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하나님의 군대는 어디에 있는가. (65.2)
 5. 아도나이
 ‘아도나이’(אֲדנֹיָ, ´ádönäy)는 구약에 439번, 창세기에 아홉 번25사용되었다. ‘엘로힘’‘야훼’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엘로힘은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며, 야훼는 의, 거룩, 사랑과 구속의 하나님으로 그분을 표현한다 ∙∙∙ . 이 칭호들은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그분에게 순응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암시하거나 요구한다.’26 ‘아도나이’는 관계적인 용어이다. 이것은 가나안 민족들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 ‘주인’, ‘소유주’, ‘지배자’, ‘주’의 뜻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가나안인들의 ‘바알’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27 ‘아도나이’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 ‘주’(主)로 번역되었다. 이 칭호의 단수형으로 ‘아돈’(אָדוֹן, ´ádôn)이 있는데, 이것은 노예 혹은 종과 주인, 아내와 남편 관계를 가리킨다. 고대에 종은 주인에게 절대로 복종해야 했으며,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의지해야 했다. (66.1)
 적절하게 처신하는 종과 아내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지만, 도리에 어긋날 때는 엄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아돈’(אָדוֹן, ´ádôn)을 강압적인 존재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자기 수하의 사람들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66.2)
 창세기에서 신명으로서의 ‘아도나이’는 모두 아브라함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2, 8에서 ‘아도나이 야훼’(주 야훼)라고 하나님을 불렀다. 앞 장에서 그는 시날 왕의 동맹군들로부터 조카 롯과 소돔 백성들을 구한 이 땅 위의 막강한 실력자(‘아돈’)이었지만, 이제는 민족들 간의 분쟁의 핵심부에 서서 복수전을 대비해야 하는 두려운 처지에 빠졌다. 가나안 땅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 빠졌을 때, ‘야훼’께서 그에게 나타나 그의 보호자요 상급임을 말씀하셨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창 15:1). 아브라함은 자신의 안전과 번영은 자기 손이 아닌 그의 보호자요 주인이 되시는 ‘야훼’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즉시 하나님을 ‘아도나이 야훼’라고 불렀다. 종의 운명은 주인에게 달려있다. ‘아도나이’께서 그의 종인 아브라함의 미래를 책임지실 것이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에 대해서 약속을 하셨고, 아브라함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종은 주인의 약속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67.1)
 ‘아도나이’가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창세기 18장이다. 세상의 주인이신 ‘아도나이’께서 타락한 도시 소돔을 심판하시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주님께 간청한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아도나이’)께 아뢰나이다”(창 18:27). 아브라함의 의는 이미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인정하였고,28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여 죄인들을 위해서 간청했다. 그는 전적으로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며 그분의 행동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29 아브라함은 주님의 정당한 심판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노하지 마시기를 간청했다(창 18:30, 32). (67.2)
 아브라함의 중보의 기사는 ‘아도나이’ 하나님이 세상의 변덕스러운 주인들과 같지 아니함을 보여준다. 주님은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신다(창 18:25). 주님은 그의 종 된 세상 사람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구원하기를 갈망하신다. (68.1)
 창세기 19장에서 소돔을 멸망하러 온 천사들을 향해 롯은 ‘아도나이’ 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지시를 따라 산으로 도망치는 대신에 작은 성읍인 소알로 도피했다(창 19:18). 후에 위기를 느껴 산으로 도피했지만 그는 딸들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원수인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창 19:37-38). ‘아도나이’는 구원의 길을 갖고 계신다.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된 종들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찾아 오셔서 살 길을 주실 때, 롯의 사윗감들처럼 농담으로 여기거나 롯처럼 지체하면 영원한 후회에 이르게 될 것이다. (68.2)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창 20:4).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으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갔을 때 꿈 속에서 주님은 그의 종 선지자의 아내를 건드리지 말도록 아비멜렉을 경고하였다. 거역하면 죽음의 운명을 맞을 것이었다. 아비멜렉은 이때에 하나님을 ‘아도나이’ 라고 불렀는데, 주님을 ‘야훼’라고 부르지 않고 이렇게 부른 이유는 그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30 ‘아도나이’ 하나님은 온 세상의 도덕적 질서를 주관하시며, 그분의 종들의 안전을 책임지신다. ‘아도나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들의 주인이 되신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악한 소돔을 멸망시킬 수 있는 능력이 많으신 천연계의 주관자요 심판자이시다. 그분의 말씀은 생사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는 종으로서 순종하되 그분의 영적인 아내로서 사랑과 신뢰로 기쁘게 순종해야 한다. (68.3)
 5) 야훼 대신에 사용된 신명
 ‘아도나이’ 가 가진 가장 영광스러운 의미는 언약적 하나님의 칭호인 ‘야훼’를 대신하여 이 용어가 사용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야훼’ 신명의 신성성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 이 신명을 의미하는 네 글자(יהוה, yhwh )가 나올 때에 발음하지 않고 ‘아도나이’로 바꾸어 읽었다. (69.1)
 6. 엘 로이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야훼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니라’(창 16:13). ‘엘 로이’(אֵל רֳאי, ´ël ró´î)는 본 절에 단 1회 등장한다. 둘째 단어인 ‘로이’‘라아’(רָאָה, rä’â) ‘보다’와 관련된 말로 ‘엘 로이’‘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거만하고 무례한 하갈이 사라에게서 쫓겨나 광야에서 외롭게 방황할 때 주님의 천사가 그녀를 위로하며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려보낼 때 하갈은 하나님을 ‘엘 로이’라고 불렀다. ‘앗타 엘 로이’(אַחָּה אֵל רֳאִי, ´aTTâ ´ël ró´î‘당신은 엘 로이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이름을 지어 준 유일한 경우이다.31 (69.2)
 히브리어 본문은 원래 자음만으로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단어에 어떤 모음을 붙이는가에 따라서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란 의미로 ‘살피시는 하나님’이 될 수 있고 ‘내가 본 하나님’이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등 여러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애매모호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히브리어의 매력이기도 하다. (70.1)
 하나님이 살피신다면 그것은 당연히 관심과 보호의 보살피심을 의미하며, 하갈이 보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한 것이다.32 (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