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복음서는 이견 없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주의 첫 날”(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에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리기 위해 새로운 의식이 기념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제공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일요일의 기원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자들이 고전 16:2, 행 20:7이하, 계 1:10절을 사도 시대에 안식일 준수와 관련한 증언들로써 중점적으로 살펴보게 된 이유가 됐을 것이다.
2) 이러한 준비는 분명 사도행전 18장 23절에 묘사된 여행과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갈라디아서 2장 1절에 그와 같은 성금에 대한 암시에서도 확인 된다. 참고, 고후 9:2이하; 롬 15:26.
3) A. Robertson and A. Plummer,
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Corinthians, 1911, 384. 참고, A. P. Stanley,
The Epistles of St. Paul to Corinthians, 1858, 344.
“이는 한 주의 첫 날 준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이다. 모금은 그 날에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날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을 되새기기에 가장 적합한 날로 여겨졌다.” F. J. Foakes-Jackson,
The Acts of the Apostles, 1945, 187.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와 관련 되어 첫 날이 가장 처음 언급된 것은 고린도전서 16장 2절로, 바울은 그 날에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을 제안한다.” A Catholic Commentary on Holy Scriptures, 1953, 1040-1840.
“인요일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과 성만찬을 위한 날로 이미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E. B. Allo는
“여기서의 첫 날은 일요일 예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서한을 쓸 당시 이미 안식일이 대체된 것이다.” E. B. Allo,
St. Paul, premiére epître aux Corinthiens, 1956, 456. F. Regan 또한 이 견해를 옹호한다(
Dies Dominica, 15).
4) A. Robertson and A. Plummer, 384.
5) P. Massi,
La Domenica, 283.
6) Pierre Grelot,
“Du Sabbat Juif au Dimanche Chrétien,” La Maison-Dieu 124(1975):31-32.
7)
“Beth Shammai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식일 회당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뿐 아니라 고아인 남자가 젊은 고아 여자와 결혼하기 위한 지참금조차도 할당하지 않는다.’ ∙∙∙ Beth Hillel은 이러한 행위들을 용인한다.”(Tosefta,
Sabbat 16:22). 참고, Theodore Friedman,
“The Sabbath: Anticipation of Redemption,” Judaism 16 (1967):448. James Moffat 또한 제안하기를
“아마도 바울은 예배에서 자선금을 드려서는 안 된다는 샴마이학파의 의견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했다(
The First Epistle of Paul to the Corinthians, 1947, 271). 바울이 안식일에 적용된 그와 같은 극단적인 랍비들의 규칙을 일요일에 전가시킨다는 것이 진실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경고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종교적 전통의 문제와 관련해서 상당한 자유를 용인했던 인물이었다(롬 14:1-6; 갈 4:8-10; 골 2:16 참고).
8) Pierre Grelot, 32.
9)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7-9. C. Callewaert 또한 그 명칭이 일요일이 예루살렘 초기 공동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La Synaxe eucharistique à Jerusalem, berceau du dimanche,” Ephemerides Theplogical Lovanienses 15 [1938]: 43). W. Rordorf는 자신이 가진 확신을 기반으로 이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행성주간이 채택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바울이 반복되는 어느 하루를 명칭하기위해 임의로 사용할 다른 명칭이 없었다고 믿는다(
Sunday, 41-42). 그러나 그의 주장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우선 행성주간이 당시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주간과 관련해 유대인들의 명칭을 사용해오고 있었다. 실제로 행성의 명칭들이 처음 발견되는 곳도 이교도들에게 전해진 기독교 문헌이다. (참고, Justin Martyr,
I Apology 67. Tertullian,
Apology 16.
Ad Nationes 1).
10) Charles Hodge,
An Exposition of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959, 364. James Moffat, 271.
“모인 돈은 일요일 봉사를 위해 제공되었을 것이다.” W. Rordorf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매주 일요일을 염두하고 그들의 일정을 정해놓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 주의 첫 날 모금 계획을 제안했다고 주장한다(
Sunday, 195).
11) Arthur P. Stanley,
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Corinthians, 1858, 344.
12) J. Nedbal, Sabbath und Sonntag im Neuen Testament, diss., 1956, 156 이하.
13) Arthur P. Stanley, 344.
“θησαυρίζω라는 단어는 ‘저장(hoarding)’ 혹은 ‘모아둠’(treasuring up)을 의미하는데, 이는 곧 사도가 모금을 하러 가기 이전에 각자의 집에 그 돈을 놓아두었다는 것을 말한다.” R. C. H. R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Paul’s first and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1946, 759.
“각 사람은 ‘자신에 의해’(παρ εαυτό) 늘어나는 총액을 집에 보관하고, 바로 교회에 그 돈을 내지 않도록 한다.” 14) R. C. H. Lenski, 760. A Robertson and A, Plummer, 384.
“당시에 어떠한 형태의 교회 금고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15) Hermann, W. Beyer,
“διάκονος,” TDNT 11, 90.
“집사들은 일구이언을 피하고 욕심이 없어야 하며 이것이 많은 가정을 방문하고 자금의 관리하는 일을 위임받는 자들에게 필요한 자질이다.” 16) Vincenzo Monachino는 자신의 논문 비평에 이러한 견해를 싣고 있다.
17) Chrysostom,
Homily 43 on I Corinthians (
PG 61, 367).
“바울은 말하길, 적은 양을 내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각자 챙겨두고 교회로 가지고 오지 않게 하라.” 이러한 관점은 J. Kosnetter은 이러한 의견을 다음에서 옹호하고 있다.
“Der Tag des Herrn im Neuen Testament,” Der Tag der Herrn, 1958, 384.
18) 각주 7을 보라.
19) William Barclay,
The Letters to the Corinthians, 1956, 182-183.
20) 한 세기 후 Justin Martyr는 일요일 예배 동안에는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만큼을 내고 모인 것은 집례자에게 맡겨둔다”라고 기록한다(
I Apoloty 67,
ANF I, 186).
21) J. B. Lightfoot는 일요일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논한다.
“그 날은 신약에서 공통적으로 ‘μία των σαββατών [일주일의 첫 날]’로 불린다(The Apostolic Fathers, 1885, II, 129). 바로 A.D, 57년에 성 바울(고전 16:2)에게서 이 명칭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만일 그 단어가 흔히 사용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분명히(κυριακή [주의 날])이라는 단어를 쓰이길 기대했어야 한다.” 22) The Letters to Pliny,
Book X, 96.
23) W. Rordorf는 교제를 금지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의 두 번째 모임”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아침의 만남”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Sunday, 203-204). 이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설득력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라로부터의 억압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 밤을 준수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일요일 아침을 준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단념하기 어려웠을 성만찬 기념식을 아침으로 옮겼다”(Ibid., 252). 즉, 그의 결론은 주의 만찬을 저녁에서 아침으로 옮기면서 일요일 아침 예배가 생겨났으며, 이는 Trajan이 교제를 금지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것이 사실이래도 일요일 아침 예배는 실제 신학적 근거가 아닌 외부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생겨 났을 것이다. 그러나 의문은 주의 만찬 기념을 일요일 저녁에서 아침으로 만장일치로 이동시키기 위해 로마 제국의 전 지역에 교제 금지령을 적용한 것인가?(Rordorf에 대한 C. S. Mosna의 비판은
Storia della domenica 101-105을 참고하라). 더욱 중요한 것은 과연 그 금지령이 저녁 모임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이는 다음의 진술로는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quod ipsum facere desisse post edictum meum” 즉, 번역하자면
“나의 칙령 이후에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그만두었다”(
L’Impero Romano e il Cristianesimo, 1914, 107). 이는 그들의 모임에 대한 자백(adfirmabint)의 결론이므로, 분명히 아침과 저녁 모임 둘 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Trojan이 Piiny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는 단호하게 소방수 협회와 같은 합법적 기관의 모임에 대해서도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는데, Marta Sordi의 지적처럼 Bithynia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허용될 뿐 아니라 권장되었던” 합법적 협회들의 모임조차도 Trojan은 금지령에 포함시켰다(
II Christianesimo e Roma, 1965, 143). 그렇다면 Bithynia에서의 금지령이 모든 형식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까지 확대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만일 이러한(거부하기 어려워 보이는) 결론이 옳다면, Pliny의 편지에서는 일요일 아침 예배의 기원과 관련해 어떠한 암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가 쓴
“정해진 날(appointed day)-stato die” 표현이 일요일에 대한 언급이라고 결코 볼 수 없음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24)
The lex iulia de collegris 뿐 아니라 기원전 64년의
the Senatus consultus도 교제(association of friends)를 금지했지만 그 적용은 지배적 상황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참고,
Cicero, De Senectute 13, 44이하. 교제에 대한 논의는
Marta Sordi, 142-144를 보라.
25) Tertullian,
Apology 39, ANF III, 47. 또한
Apology 37에서 Tertullian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가 법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변호한다.
“사회로부터 두려움이 될 만한 불법적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책임이 있지 않는 한, 법이 용인된 사회 속에서 모임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ANF III, 45). 이교도 Cecilius는
Octavius of Minucius Felix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밀스럽게 모임을 갖고 이야기를 나눈다며 끊임없이 비난 한다(참고, 9, 10장, ANF IV, 177-178). Lucian of Samosata(약 A.D, 165)는 자신의 풍자에서 시리아 기독교와의 짧은 연애 동안에 Peregrinus를 그리스도인 티아소스(즉, On the Death of Peregrinus라는 모임의 지도자,
LCL, 11)로 묘사한다. Celsus(A.D. 175)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협회들을
“은밀한 집단”(secret societies)으로 간주하고 있다(Origen,
Contra Celsum 1, 1).
26)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한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Justin Martyr,
I Apology 26, 7. Athenagoras,
Supplicatio 3. Theophilus of Antioch,
Ad Autolicum 1, 3, 4. Tertullian,
Apology 2. Minucius Felix,
Octavius 8.
27) #7. L. C. Mohlberg,
“Carmen Christo quasi Deo,” Rivista di Archeologia cristiana 14(1937):95.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98. A. Harnack,
Die Lehre der zwölf Apostel, 1884, 53. A. A. McArthur,
The Evolution of the Christian Year, 1953, 18.
28) W. Rordorf,
Sunday, 202-203.
29) Ibid., 195.
30) Justin Martyr,
Apology 67.
31) Pliny 편지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분석은 다음을 참고하라. Vincenzo Monachino,
Le Persecuzioni e la polemica pagano-cristiana, 1974, 43-50.
“후자는 실제 당시의 법률적 규범에 반하여 은혜와 신중함으로 제기했던 항의였다”(Ibid., 50).
32) Dio Cassius,
Historia 69. A. Fuks가 제대로 기록해둔 다음의 해석을 참고하라. A. Fuks,
“The Jewish Revolt of 115-17,” Journal of Roman Studies 51(1861):98-104.
33) W. Rordorf는 현명하게 지적하기를, 그 돈은 당장 사용할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각 기부자들이 돈을 지니고 있는 것이 나았으며 ∙∙∙ 이와 같은 특별한 모금의 경우에는(다른 모금에 대해서나 혹은 이전과 같이) 교회가 만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
Sunday, 194).
34) A. Deissmann은 로마 세계에서는 한 주의 첫날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봉급을 받는 날이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추론을 받쳐줄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하고 있다(
Light from the Ancient East, 1927, 309). 안식일에 기부를 금지한 것과 관련해서는 각주 7을 참고하라.
35) Philo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모든 나라와 민족이 이방의 제도들에 대해 혐오를 내비치지만” 유대인 안식일의 경우는 달랐다고 자랑한다.
“모든 것이 금지된 세계”(the whole inhabited world)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하나의 가설적 의문을 제기한다.
“그 누가 자신과 이웃, 자유인이나 노예, 나아가 그의 가축까지 모두가 같이 일로부터 안식을 누림으로써 신성한 제7일의 날에 경외를 표하지 않는가?”(
Vita Mosis 2, 20). 이와 비슷하게 로마의 Josephus도 다음과 같이 단언 한다.
“헬라인이나 이방인들, 그 어느 민족에게도 제7 일에 안식을 취하는 우리의 규례가 닿지 않은 것이 없다”(
Against Apion, 2,39); Seneca는 유대인들에 대해 언급하며 애통해한다.
“그동안 이 저주받은 민족의 관습들이 세상 모든 곳에서 받아들여진 만큼의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패배자들이 승리자에게 법을 준 셈이다”(Augustine,
City of God, 6, 11로부터 인용),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채택한데 대한 Tertullian의 책망을 참고하라(
Ad Nationes 1, 13).
36) F. F. Bruce,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Acts, 1954, 407-408.
37) P. K. Jewett, Lord’s Day, 61.
38) 참고, O. Cullmann,
Early Christian Worship, 1953, 10이하, 88이하. R. B. Rackham,
The Acts of the Apostles, 1964, 377.
“여기에는 일요일 혹은 한 주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week)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다.” J. A. Alexander,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1956, 689.
“한 주의 첫날을 준수한 것은 주의 부활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관례적인 것이 되었다.” F. J. Foakes Jackson, 187. Charles W. Carter,
The Acts of the Apostles, 1963, 305-306. R. J. Knowling,
The Acts of the Apostles, 1942, 424.
“여기서의 그 진술은 기독교 교회가 그 날을 공중 예배와 ‘떡을 떼기’ 위한 날로 정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39) W. Rordorf, Sunday, 199. P. K. Jewett,
Lord’s Day, 60-61.
40) F. F. Bruce, 408. Theodor Zahn,
Die Apostlelgeschichte des Lukes, 1927, 706.
Geschichte des Sonntags, 1878, 3. H. J. Cadbury and Kirsopp Lake,
The Beginnings of Christianity, 1933, IV, 255. W. Rordorf,
Sunday, 201-202. G. Ricchiotti,
Gli Atti degli Apostoli, 1952, 336. C. Marcora,
“La vigilia nelia liturgia,” Archivio Ambrosiano 6(1954): 24-29. J. Nedbal, 156. H. Dumaine,
DACL IV, col. 887.
41) Pirot-Clamer, Actes des Apôtres, 1949, 276. J. Morgenstern은 신약에서는 두 가지 체계가 모두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J. Morgenstern,
“The Reckoning of the Day in the Gospels and in Acts,” Crozer Quarterly 31(1949):232–240.
42)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the Acts of the Apostle, 1944, 825.
43) Pierre Grelot, 34. R. B. Rackham, 376.
44)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15. C. W. Dugmore,
“Lord’s Day and Easter,” Neotestamentica, 1962, 275.
“드로아에서의 모임이 일요일 월요일 밤 동안에 있었다면 그것이 공식적인 성만찬이 되기는 어렵다.” 45)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15. C. W. Dugmore,
“Lord’s Day and Easter,” Neotestamentica et Patristica in honorem sexagenarii O. Cullman, 1962, 275.
“ 트로아스에서 모임이 일요일에 월요일 밤에 있었다면, 그것을 공식적인 성만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46) H. Riesenfeld,
“Sabbat et jour du Seigneur,” New Testament Essays. Studies in Memory of T. M. Manson, 1958, 210-217. E. Jacquier,
Les Actes des Apôtres, 1976
2, 598. C. F. D. Moule,
Worship in the New Testament, 1961, 16. J. Dupont,
Les Actes des Apôtres, 연도불명, 171. P. Carrington,
The Primitive Christian Calendar, 1952, 38.
“우리는 그 밤을 일요일의 시작으로 여겨진 토요일 밤으로 정해야 한다.” Idem,
The Early Christian Church, 1957, 153.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14. H. Leclercq,
DACL XIII, col. 1523. F. Regan,
Dies dominica, 89 이하. J. Daniélou, Review of W. Rordorf,
Sunday in Recherches des science religieuse 52(1964): 171 이하. J. J. Clemens,
Dictionary of the Apostolic Church (1915),
“주의 날”이라는 단어를 보라. R. B. Rackham, 377.
47) Pierre Grelot는 이 견해를 제대로 제시하고 있다. Pierre Grelot, 33-34.
48) F. J. Foakes-Jackson, 187.
49) Augustus Neander,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1831, I, 337.
50) Henry J. Cadbury and Kirsopp Lake, 255-256.
51) J. Behm,
“kAdo,” TDNT III, 728-729.
52) Ibid., 730. 12. Didache 14, 1; Ignatius, Ephesians 20, 2; Acts of Peter 10; Clementine Homilies 14, 1; Acts of John 106, 109; Acts of Thomas, 27, 29, 50, 121, 133, 158.
53) 참고, Robert Young,
Analytical Concordance to the Bible, 22nd Edition,
“to break”와
“breaking”이라는 단어를 보라.
54) 마 14:19; 15:36; 26; 26; 마 8:6; 8:19; 14:22; 눅 22:19; 24:30; 24:35.
55) 행 20:11; 27:35.
56) 고전 10:16; 11:24.
57) 행 2:46; 20:7.
58) J. Behm, 731.
“사도행전 2:42와 46은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유대와 동료애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의 만찬에 대한 예배식의 기념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59) C. W. Dugmore, 274.
60) R. B. Rackham은 그 가설을 발전시키고 있다.
“성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의 성만찬에서 발생한 혼란에 대해 들었다. 그것은 성만찬이 애찬 이후에 오는 것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바울은 자신이 그곳에 가서 그 문제들을 정리할 것이며 그의 ‘지시’(orders)중 하나는 성만찬과 애찬을 순서를 바꾸어 놓는 것이 될 것이라고 기록한다.” Rackham, 378.
61) A. Wickenhauser,
Atti degli apostoli, 1968, 300. R. B. Rackham, 376.
“그 주 일요일의 예배는 놀라운 한 사건으로 누가의 기억에 강하게 각인되어 그 날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62) 참고, 행 20:3, 6, 7, 15, 16; 21, 1, 4, 5, 7, 8, 10, 15, 18.
63) R. H. Charles,
The Revelation of St. John, ICC, 1920, 23.
64) Isbon T. Beckwith,
The Apocalyse of John, 1967, 435.
65) O. Cullmann, 7. Martin Kiddle은 주장하기를,
“그의 환상의 때, 즉 주의 날(the Lord’s day)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속에 공통된 하나의 참여를 다시 한
번 차분하게 강조하고 있다”(
The Revelation of St. John, 1940, 11).
66) 참고, E. B. Allo,
L’Apocalyse, 1933, 11.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 된 자신을 발견한 주의 날은 위대한 ‘야훼의 날’이 아니다. ∙∙∙ 대신 주의 부활의 날인 일요일이다.” Henry Barclay Swete, The Apocalyse of St. John, 1906, 13. Isbon T. Bechwith, 435. E. Lohmeyer,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1953, 15. T. F. Glasson,
The Revelation of John, 1965, 21. E. A. Dowell,
The Meaning of the Book of Revelation, 1951, 31. J. Bonsirven,
L’Apocalyse, 1951, 95. D. Mollat,
“La liturgia nell’Apocalisse,” Studi Biblici Pastorali 2(1967): 136-146.
67) W. Stott,
“A Note on the Word KYRIAKH in Rev. 1:10,” NTS 13(1967):75.
68) A. Storbel은 계시록 1장 10절의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분명히 보통의 일요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 니산월 16일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A. Storbel
“Die Passah-Erwartung in Lk 17:20,” Zeitschrift für die neutestamentliche Wissenschaft 49 (1958):185. 참고, C. W. Dugmore, 279. J. van. Goudoever, Biblical Calenders, 19612, 169. 다른 관점의 글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K. A Strand,
“Another Look at the Lord’s Day in the Early Church and Rev. 1:10,” NTS 13(1967):174-181.
69) Fenton J. A. Hort,
The Apocalypse of St. John, 1908, 15. A. Deissmann,
“Lord’s Day,” Encyclopedia Biblica, III, 2815. J. B. Lightfoot,
The Apostolic Fathers, 1885, II, 129. E. W. Bullinger,
The Apocalypse, 1935, 9-14. Philip Carrington,
The Meaning of the Revelation, 1931, 77-78. William Milligan,
The Book of Revelation, 1940, 13. Louis Talbot,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1966, 42. Clark’s Foreign
Theological Library, 1851, XXII, 89. Walter Scott,
Exposition of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1948, 36. 앞서 인용한
the Commentaries of Wetstein, Zilling, Maitland and Todd on the Apocalyse을 참고하라. 일요일 예배에 대한 종말론적 모티프 는 다음을 보라, A. Feuillet,
L’Apocalyse, 1962, 71. O. Cullmann, 12-15, W. Stott, 74.
70) 7. Edgar Hennecke,
New Testament Apocrypha, 1969, I, 180.
“Serapiono 이 복음을 적어도 약한 세대 전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늦어도 2세기 후반기에.” 참고. P. Gardner-Smith,
“The Date of the Gospel of Peter,”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27(1976): 40101 . Johannes Quasten,
Patrologia, 1967, I, 108.
71) L. Vaganay,
L’Evangile de Pierre, 1930, 292.
72) 이 중요한 구절들은 본 저자의 이탈리안 논문에서 분석되어 있다.
Un Esame dei biblici a patristici dei primi quattro secoli allo scopo d’accertare it tempo e le cuase del sorgere della domenica come Giorno del Signore, Pontificia Universitia Gregoriana, 1974, 99-120.
Judaism and the Origin of Sunday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논문의 5장 또한 참고하라(1975, 90-93). Didache 14:1의 중요 구절은 문자적으로 다음과 같이 번역이 된다.
“주의 주에(On(or according to) the Lord’s of the Lord) 함께 모여 빵을 떼고 성만찬을 행하니 그대가 죄를 고백하면 그대의 제물이 정결하여질 것이요.” “주의 주”(Lord’s of the Lord, κατά κυριακήν δε κυρίου)라는 표현의 의미는 정확하지 않은데, 지금까지 그와 관련한 세 가지 기본적 해법이 제안되었다.
(1) J. B. Audet는
“주의—”를
“날”과 함께 두어
“주의 날에 함께 모이다 ∙∙∙”(On the day of the Lord come togethe r∙∙∙)이라고 해석한다(
La Didache, Instruction des Apôtres, 1958, 460).
(2) C. W. Dugmore는
“매주 일요일이 주의 날이기 때문에, 주의 일요일이야 말로 그분이 부활하신, 즉 부활절-일요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76).
(3) Jean Baptise Thibaut는
“주의—κυριακήν”라는 표현은 형용사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시간의 문제가 아닌 주의 만찬의 기념 방식에 대한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견해를 밝힌다.
“만일 이것이 시간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이 경우에 헬라어의 특별한 기능은 단순히 여격(dative)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식하는 κυριακήν이 적용되는 이 단어의 뜻은 날(ήμέραν, day)이 아니고, 또 다른 용어, 즉 글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단어 교리(διδακήν, doctrine) ∙∙∙ 14장 의 첫 구절 ∙∙∙ 은 문자적으로 ‘주의 자주적 교리에 따라’라고 번역된다”(
La Liturgie Romaine, 1924, 33-34).
우리가 Thibaut의 해석을 공유하는 추가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14장은 시간의 분제가 아닌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 즉 죄의 자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14:2).
(2) 말라기 1장 10절의 인용은 다시 구체적인 시간(
“각 처와 각 때에”)을 강조하는 대신에, 제물을 바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깨끗한 제물을 내게 바치라” -14:3).
(3) Didache에는 명령과 교리
“에 따라서-κατα” 행동하라는 권고가 여러 번 등장한다(1:5; 2:1; 4:13; 6:1, 11; 13:6).
(4) Didache의 저자가 주의 날의 귄위로 자신의 명령을 정당화하고자 했다는 사실로 볼 때, κατά를 직접목적격(accusative)와 함께 씀으로 시간이 아닌 규칙의 순응에 대한 하나의 관련성을 확립하고 있다.
(5) Didache 14:1은
“그리고—δέ”라는 접속사로 이전 장(chapter)과 연결을 맺고 있는데, 이전 장의 마지막은
“명령에 따라 드리라”(give according to the commendment, 13:7)는 명령으 로 끝나고 있다.
“~에 따라서”라는 표현의 반복으로
“명령”이나
“교리”의 단어들이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6) 저자들은
“자주 함께 모이”(16:2)라고 권고하는데, 이것이 배타적으로 일요일 모임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73) Theodore Racine Torkelson,
An Investigation into the Usage and Significance of the Greek Adjective KYPIAKOS During the First Four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Thesis 1948, 29. A. Deissmann, 358. P. Cotton,
From Sabbath to Sunday, 1933, 122.
74) A. Deissmann, 357.
75) A. Deissmann, 359. Bible Studies, 1903
2, 218-19. P. Cotton, 126. E. Lohmeyer,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1953
2, 15.
76) R. H. Charles, 23.
77) G. Thieme,
Dies Inschriften von Magnesia am Meander und das Neue Testament, 1905, 15.
78) W. Rordorf,
Sunday, 207.
79) Wilfrid Stott, 73.
80) Ibid., 74.
81) 많은 가톨릭 해석학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참고. Alfred Wikenhauser,
New Testament Introduction, 1958, 283-290, 319, 547-557.
82)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21.
83) C. W. Dugmore, 274-278쪽에도 이러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K. A. Strand는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그 기본적 특성들을 끌어내 사용한” 연중 부활절에
“주의 날”(Lord’s day)을 적용시키는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Irenaeus의 것으로 보이는 추가적 참고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177).
“일요일에 무릎을 꿇지 않는 이 [관습은 부활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 이는 사도시대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리용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하늘에 계신 Irenaeus는 On Easter라는 논문에서 오순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날에 우리는 무릎을 굽히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와 관련해 주장된 바를 근거로 그날이 주의 날과 동일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Fragments from the Lost Writing of Irenaeus 7,
ANF, I, 569-570). Strand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주의 날’이 연중 부활절-일요일을 언급한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유는 그 용어가 또 다른 연중 일요일인 오순절-일요일과 함께 비교되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결론이 정확한가? 그와 같은 비교는 부활절과 오순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간 일요일과(오순절을 포함한) 연중 부활절 기간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용문에서 이미 주어진 근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일요일은 부활의 상징이다.” Tertullian은 비슷한 진술을 한다.
“일요일에 금식을 하거나 예배 중에 무릎을 꿇는 것을 옳지 못하다. 우리는 오순절과 같이 부활절에도 동일한 자유를 누려야 한다”(
De corona 3, 4; 참고, Augustine,
Epistola 55, 28
CSEL 34, 202에서는 정확하게 부활이 그와 같은 규례의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Ireaeus의 진술은
“주의 날”과 부활절-일요일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결합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주의 날”이 곧 부활절-일요일을 의미한다고 적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이로써 Strand의 결론에서 드러나는 약점은 초기의 일요일 기원에 대한 그의 가설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 가장 그럴싸한 설명을 본서 198쪽 이하에서 제시하고 있다.
84) A. Strobel, 185.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처럼, 일요일에 적용된 용어로써 κυριακή은 수적인 하나의 발전에 불과하다.” 85) C. W. Dugmore, 279.
86) E. Goodspeed은 Bryennius가 출간한 헬라의 Didache가 A.D. 150년을 얼마 지나지 않아 쓰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E. Goodspeed,
The Apostolic Fathers, 1950, 286. Kirsopp Lake도 이러한 연대를 인정한다. Kirsopp Lake,
The Apostolic Fathers LCL, 1952, I, 331. J. P Audet는 그 집필 연대를 A.D. 50년과 70년 사이 공관복음서의 시기로 본다(219). 그러나 J. Quasten이 지적하는 것처럼(주입에 의한 침례식과 같은) 복잡한 기독교의 법령들이
“어느 정도의 정착이 되기 위한 기간”이 필요한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으므로 Audet이 추정한 연대는 너무 이른 것이 분명하다(40-41).
87) C. W. Dugmore, 277.
88)
Apostolic constitutions 5:19는
“주의 날인 한 주의 첫 날 동트기” 전에는 유월절 금식을 범하지 말라고 충고한다(ANF VII, 447). 같은 장의 이후 본문에서도 동일한 명령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주의 날로부터 40을 세고, 그 주의 날에서 그 주(week)의 다섯 째 날까지, 그런 후 주의 승천의 축제를 기념하라.” 이와 같은 경우에서도
“주의 날”은 부활절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첫 번째 주의 날로부터” 라는 구절은 이후의 일요일들이 동일한 명칭을 공유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89) C. W. Dugmore, 278.
90) J. van Goudoever, 169이하.
91) W. Rordorf,
Sunday, 209.
92) K. A. Strand,
“The ‘Lord’s Day’,” in
Three Essays on Early Church History, 1967, 42. Strand의 논거의 기본적인 취약점은 초기 기독교가 그 축제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쿰란 종파의 달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가능한데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한 어떠한 암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최초의 기독교인들이 신전에 규범 달력을 따랐다는 것을 사실로 확인된다. 나아가 Strand는 부활절-일요일이 이마 요한의 때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93) Eusebius,
HE, 5, 24, 6-7. K. Strand는 흥미로운 가설을 전개시키는데, 즉 계시록 1장 10절의
“주의 날”이 제7일 안식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180). 그는 이러한 추측의 근거를 요한행전(
Acts of John)의 한 구절에 두고 있다(요한행전은 3세기 소아시아에서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E. Hennecke,
New Testament Apocrypha, 1965, II, 214). 그 구절에는 로마 군인이 죄수로 로마에 끌려가는 요한의 모습을 보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on the seventh day), 주의 날이 되므로 그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제 나에게도 음식을 먹을 때가 되었노라”(
ANF VIII, 561). Strand는 여기서 제7일이 그 여정의 일곱 째 날이 될 수 없으며, 설사 그런 의미라면 요한이 안식일 중에 금식을 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동방의 교회에서는 금지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준수가 일반적으로 타당한 것이기는 하나, 그 문헌의 영지주의적 특색을 근거로 이 특정 문서에 그와 같이 적용을 하고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참고, J. Quasten, 136).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금식을 장려했다고 알고 있다. 게다가 요한행전의 결론 부분에는 또 다른 참고 자료가 발견되는데, 소위 전이(Metastasis)라고 불리는 것으로 본문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교제하며 주 안에서 기뻐했다. 그리고 다음날, 일요일(κυριακής)이 되어 모든 형제들이 모였는데 ∙∙∙”(E. Hennecke,
The New Testament Apocrypha, 1965, II, 256). 여기서
“κυριακης”은
“일요일”로 번역이 되는데, 이유는 107-110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성만찬 기념식 뒤에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Mario Erbetta(
Gli Apocrifi del Nuovo Testamento, 1966, II, 63-64)는 일요일의 성만찬식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
“(1) 설교(109),(2) 기도(108),(3) 축사, 빵을 떼고 먹기(109),(4) 축복, ‘사랑하는 자여,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 하길’(110).” “주의 날-κυριακή”이라는 표현이 당시 소아시아에서 일요일에 대한 구체적 명칭으로 사용이 되었다는 것은 베드로행전(Acts of Peter), 35, 50, 51에서 입증 된다. 이는 또한 베드로행전(약 A.D. 190년)이라는 또 다른 이후의 한 문서에서도 확인 된다.
“그리고 그 주의 첫 날(the first day of the week), 즉 주의 날(the Lord’s day), 한 무리들이 모였고 병든 자들이 낫고자 하여 베드로에게 나아왔다”(Coptic fragment, 참고, Mario Inserillo,
Gli Evengeli Apocrifi, 1964, 151-152. E. Hennecke,
New Testament Apocrypha, 1965, II, 314).
94) J. Daniélou,
The First Six Hundred Years, 1964, 74. Clark는 아시아의 14일주의자들의 배경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활절 일요일이
“요한을 통해 그곳에 소개되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Clark’s Foreign Theological Library, 1851, XIII, 91). 그러나 그의
“주간 축일의 기념은 연중의 축일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본문으로 보아 그의 관찰은 실제로 타당하다. 그러나 14일주의자들의 관례가 활발하게 지켜지고 있었던 아시아 지역에 일요일 준수를 소개하려고 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물론 요한이
“주의 날”을 니산월 15일로 정했을 수도 있으나, 이에 대한 근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95) Louis T. Talbot, 20.
96) Ibid.
97) 요한계시록의 주제에 따른 개요는 본 저자의 이탈리안 논문의 90-92쪽을 참고하라.
98) 계 4:8; 6:10, 17; 11:15; 14:14; 16:15, 20; 19:7, 7; 20:11, 21; 22:7, 17.
99) 이는 1:1의 천사가 22:8에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100) Fred. B. Jensen,
An Investigation of the Influence of Anti-Judaism Affecting the Rise of Sunday in the Christian Tradition, Thesis 1949, 43.
101) J. F. Walvoord, 42.
102) Wilfrid Stott, 71.
103) 더불어 주의 오는 날(the day of Christ’ coming)이 수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104) 예를 들어, Didache 9:1; Ignatius, Ephesians 13:1; Philadelphians 4; Smyrmaeans 8:1; Justin Martyr, 1 Apology 66, 1; F. Cabrol, col. 2105이하, Dictionaire d’rchéologie chrétienne, 1907,
“빵의 나눔”(Fractio panis)이라는 단어를 보라. M. H. Shepherd,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1962,
“주의 만찬”이라는 단어를 보라.
“2세기 이후로 기독교 저자들(예, Didache, Justin, Ignatius, Irenaeus)은 ‘성만찬’이라는 명칭을 선호했는데, 이는 주의 만찬의 행위에 대한 감사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05) 마 10:15; 12:36; 막 6:11; 벧후 2:9; 3:7; 요일 4:17, 유 6.
106) 눅 17:30; 마 25:13; 롬 13:12.
107) 마 24:36; 막 13:32; 14:25; 눅 10:12; 17:31; 21:34; 딤전 1:12.
108) 요 6:39-40; 11:24; 12:48.
109) 행 2:20
110) 롬 2:5; 계 6:17.
111) 고전 1:8; 고후 1:14; 빌 1:6, 10; 살후 2:2.
112) 살전 5:2; 벧후 3:10.
113) 계 6:17; 유 6; 행 2:20.
114) 계 6:14.
115) Gerhard Delling,
“ημέρα,” TDNT II, 952.
“복음서에서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ημέρα(즉, 그의 재림의 날)의 주님이시다.” 116) Walter Scott, 36.
117) E. W. Bullinger, 12.
118) Philip Carrington, 78.
119) 심판의 날로 간주되었던 속죄의 날은 나팔을 부는 것을 통해 알려졌다(민 29:1)는 것에 주목하라.
120) J. B. Lightfoot, 129. 1. A. Deissmann(
“Lord’s day,” Encyclopedia Biblica, III, 2815)도
“주의 날”(Lord’s day)을
“야훼의 날”(the day of Yahweh)과
“심판의 날”(the day of judgment)과 동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