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5장 예루살렘과 일요일
 일요일 준수의 사도적 기원을 입증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예시된 신약성서의 세 본문들이 그리스(고전 16:2)나 소아시아(행 20:7; 계 1:10)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사는 지리적 지역에 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연구에서는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고 일요일 예배를 제정하도록 발의한 책임을 예루살렘에 사는 사도적 공동체의 탓으로 돌리려는 특징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루는 “일요일 제도는 바로 첫 기독교 공동체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순전히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제정된 것이”라고 단언한다.1) 또 다른 연구에서 그는 “이 날(즉 일요일)에 함께 집회를 가지는 관습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바로 다음 주부터 나타나는데, 그 당시 사도들이 만찬 장소에 모였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고 분명하게 밝히면서, “일요일(주일)은 이때의 매주간의 재회가 지속된 결과이다”라고 주장한다.2) (177.1)
 모스나도 일요일 예배의 기원에 대한 그의 조사를 다음과 같은 진술로 결론을 맺는다. “일요일은 바울이 세운 기독교 공동체보다 더 이전에 형성된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 시작되었다.”3) 로르도르프도 마찬가지 주장을 한다. (177.2)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초기 시기까지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고, 심지어는 부활하신 주님 자신의 의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일요일 준수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라는 견해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몇몇 논증들이 제시될 수 있다.4)
(178.1)
 이 논제는 몇 가지 기본 가설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웻은 “바울이 일요일 준수를 제창했다고는 거의 믿어지지 않는데, 그는 개종자들이 특정한 날들을 준수하는 것을 경고(골 2:17; 갈 4:10; 롬 14:6)한 신약의 유일한 기자이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일요일 예배를 소개했다면, 할례의 예식에 대한 관계에서 나타난 경우(행 21:21)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율법을 제쳐두는 무모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유대인 반대파들로부터 고소를 당했을 것이”라고 제웻은 현명하게 말한다.5) 더욱이 그랬었더라면, 로르도르프에 의해 언급된 것처럼, 바울은 “일요일 준수에 대해 보다 더 많이 언급했었을 것이었고 ∙∙∙ 유대화된 반대파들의 반론에 답했어야 했을 것이었다.”6)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확립되어 있었던 주일 중 첫 날에 예배드리는 관습을 발견하였던 것이고, 그것은 말하자면, 첫째 날 예배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기원된 것”으로 여겨진다는 주장이다.7) (178.2)
 또 다른 가정은 예수의 부활과 현현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일요일에 발생했고, 그곳에서 경험되어졌기 때문에, 사도들이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날에 독특한 기독교 예식으로 바로 이러한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 예배를 처음 제정한 곳은 틀림없이 그곳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배일이 변화되었고, 그 후에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변화된 그 예배일이 채택된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발휘되었던 사도적 권위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8) 이러한 관찰에서 나타난 원리는 실제로 상당히 효과적인 것이었으며,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대해 탐구할 때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매주 드리는 예배의 날짜나 연례 유월절 예식의 날짜를 바꾸도록 하는 명령이 평범한 어느 한 교회로부터 전달 되었다면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명령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령이 보편적이고 확실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예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것이지만, 당시에 아시아 교회에서 발생했던 유월절 논쟁이 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사례를 제공해 준다. (178.3)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가정에서 드려지는 유대인 안식일 예배에서 감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즉시 자신들만의 예배를 위한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가져야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주장하는 것이 또 다른 중요한 논쟁의 요지이다.9) 예를 들어 모스나는 사도들이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정한 것은 바울이 그 제도를 생각해 내기 훨씬 이전의 일인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에 안식일의 내용이 새로운 신앙에 대한 절박할 필요를 채워주기에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 스스로 한 특별한 예배일의 필요성을 찾았”기 때문이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10) 로르도르프도 비슷한 설명을 통해 모스나와 동일한 확신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서 정규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한 시간이 실질적으로 필요했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바울시대 이전에 일요일이 준수되었음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11) (179.1)
 몇몇 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계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분파 중 하나였던 에비온파에 대한 유세비우스(Eusehius A.D. 260-340년경)의 설명을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에비온파 중의 진보 진영에서는 “안식일과 나머지 유대인들의 계율들을 준수했지만, 동시에 우리처럼 그들은 주의 날을 구세주의 부활에 대한 기념일로 기렸다”는 기록을 남겼다.12) 그 주장의 취지는 이렇다. 즉, 이 부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교회로부터 이탈한 후 그 교회로부터 일요일 예배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교회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일요일 예배 풍습을 유지하였다는 것이다.13) (180.1)
 이러한 논증들은 논리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인종적 구성과 신학적 경향 등과 관련해 신약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문헌들이 제공해 주는 역사적 정보에 비추어 검토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연구 범위를 A.D. 135년, 즉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그 도시(예루살렘)가 파괴되던 시기까지 확대해 이것에 대해 조사 연구할 것이다. 우리가 이제 살펴볼 것이지만, 그 때,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황제의 추방 명령으로 인해 예루살렘 도성과 예루살렘 교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 명령은 로마로부터 국가적인 독립을 바라는 유대인들의 열망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사실상 그 이후로 예루살렘교회의 역할은 너무 미미했기 때문에 다른 나머지 기독교계에 거의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180.2)
 신약 안에서의 예루살렘교회
 유대인 예배 의식과 예식 달력(liturgical calendar)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와 관련해 신약성서는 어떤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루살렘교회는 “가정에서 드려지는 유대인 안식일 예배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저절로 한 특별한 시간에 모임을 가질 필요를 느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가?14) 우리는 먼저 초기 기독교인들이 집회하던 장소와 시간에 대해 고찰하고, 두 번째로 예루살렘교회의 인종적 구성 분포와 신학적인 지형성을 살펴 봄으로써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181.1)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장소
 사도행전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된 모임 장소로는 성전, 회당, 개인 집(한번은 야외에서 모였음) 등이었다.15) 사도행전 2:46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었”다는 기록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공식적인 모임과 사적인 친교 모임이 구별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하지만 5:42에서는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식적인 복음 집회와 사적인 친교 모임사이에 형식적인 구별점이 존재하고 있지 않음을 암시 해주는 것 같다.16) 사도행전으로부터 분명하게 알려진 상황은 새로운 개종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공유하기 위하여 “마음을 같이 하여”(행 1:14) 집에서 사적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공적으로 성전이나 솔로몬 행각, 회당 등에서 종종 모여 진지하게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모습이다.17) 그러나 추측하건데 이러한 두 유형의 집회 사이에 한 가지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성전과 회당에서 그 초기 공동체는 기도회나 성경 교육 등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행 3:11절 이하 5:12절 이하), 또 한편으로 신자들은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므로 그들의 결속력 있는 친교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개인적인 가르침을 받(행 2:42; 1:14)을 수 있었다.18) (181.2)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사적인 모임들은 비록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분량을 보다 자유롭고 완전하게 표현하도록 의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전과 회당에서 행하는 예배 의식들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의식들을 보완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랄프 마틴(Ralph P. Martin)은 이렇게 진술한다. “교회역사의 초기시대에는 적어도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관한한 모(母)종교를 떠나고자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19) 그 저자는 지적하기를 “초기의 그리스도교회는 유대 종교의 한 분파처럼 보였으며” 분명히 “나사렛 이단”(행 24:5)으로 불렸다고 지적한다. “이단”(αίρεσις)이라는 그 동일한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기독교 분파를 묘사하는 데 사용(행 24:5, 14; 28:22)되며, 사두개인들(행 5:17)과 바리새인들(행 15:5; 26:5)과 같은 공식적인 유대교 분파를 묘사하는데도 사용된다. 그래서 마틴은 결론을 내리기를, “나사렛 사람들로서 같은 마음을 가진 유대인들끼리 모이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분명히 없었다.”는 것이다.20) (182.1)
 미쉬나에 따르면, 유대인 남자 10명이 있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도록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음에는 외관상 한 특별한 회당과 닮았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하기도 한다.21) 사도행전 1:14에서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προσευκή)에 힘썼다.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회당에서 진행되는 정규적인 ”기도모임을 지칭하는 단어이다(행 16:13, 16). 첫 번째 신자들의 헌신을 위한 모임을 묘사하기 위해 회당에서 사용하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들이 회당 모임의 한 형태로 여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182.2)
 회당이 예배의 장소로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신 시기에도 이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확인하였는데, 그분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예배를 드리셨기 때문이었다. (막 1:21-28; 3:1-6; 6:2; 마 4:23; 눅 4:15, 16-30, 31절과 그 이하, 44; 6:6; 13:10-17; 요 6:59; 18:20). 사도행전에서도 유사한데,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기록이 매우 인상적이다.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정규적으로 만났(행 18:4, 19; 13:5, 14, 42, 44; 14:1; 17:1, 10, 17)으며, 심지어는 아볼로도 그가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회당에서 신자들과 만났다(행 18:24-26), 회당이 기독교 예배에 끼친 영향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는 더그모어는 “유대인 회당이 첫 4세기 동안에 공중 기도를 위해 함께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형태와 예배 시간에 종종 인식되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22) (183.1)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를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새로운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예배 장소와 예배 시간을 채택하도록 한 절박한 당면 과제가 생겼었는가? 후에 교회와 회당이 분리된 상황에 비추어 예루살렘교회와 관련된 단편적인 기록을 재해석볼 가능성이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요소도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예루살렘교 회와 유대의 종교적 관습과의 유착 관계를 최소화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그 시초부터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독특한 것이었음을 옹호하고자 하는 특별한 열망으로부터 유발된 것이다. 그러한 목적들은 칭찬할만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예배 관습에 대한 잘못된 분석을 내리게 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 (183.2)
 성전과 회당, 기도와 설교에 대한 잦은 언급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전혀 새로운(ex novo) 제도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유대 종교 의식의 연속이요 재해석한 것임을 시사해준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후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행 3:1). 사적인 집회들이 추가적으로 진행되긴 했지만 성전과 회당 예배의 참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마찬가지로 제사, 제물, 제사장, 장로 등과 같은 유대의 예배 용어들이 계속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메시아적 성취,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결과에 비추어 재해석되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새로운 신앙이 유대인들과 같은 정규적인 예배 상황들을 즉시로 포기하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184.1)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시간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 의식이 진행된 시간에 대하여 살펴보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예식 달력을 존중하여 사용했는가? 아니면 그들의 주간 예배와 연례 절기를 위해 새로운 요일과 날짜를 선택함으로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절했는가? 오스카 쿨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184.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집회를 가졌다(행 2:46; 5:42; 또한 눅 24:53절을 보라), 안식일도 역시 이 곳 저곳에서 여전히 준수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 매우 이른 시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위해 이미 단독으로 특별한 기독교적인 환경을 설정했는데, 그 속에서 한 날이 교회 예배를 위한 날로 특별히 구분되었다. 그 날은 주의 날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아니고, 유대종교와 신중히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 주일 중 첫 날이다. 그들이 이 날을 선택한 것은 이 날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부터 부활하셨고, 음식을 먹기 위해 제자들이 함께 모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23)
(1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