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4장 신약의 세 본문과 일요일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날에 그리스도를 부활을 통해 주(主)이심을 드러내 보이신 한 분으로 선포하고, 또한 그 날에 그분께서 재림(parousia)의 때에 주실 마지막 승리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날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뿐만 아니라, 마라나타, “지금 곧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승리의 외침이 있을 것이다.80)
(151.1)
 이 일요일 신학에 대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진술(부활 파루시아)은 실로 감탄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시도시대의 관점이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시기의 신학적 구성이나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가? 일요일의 기원과 관련해 그리스도의 부활/현현의 역할에 대해 앞에서 살펴보면서 우리는 부활의 주간 혹은 연중 기념일에 대한 사도들의 언급이나 암시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바르 나바스나 유스티노스 마르튀르(Justin Martyr)의 문헌 등의 자료에서 나타난 초기 신학적 근거들조차 일요일 준수에 대한 유기적 관점이 부 족하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들의 설명은 다른 자료에 기초한 사실상 서로 다른 속성의 글들이다. 저들의 자료에서는 일요일 신학을 다루면서 부활 그 자체에 대한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이해 하고자 할 때, 이에 대한 후대의 용법과 해석들을 의지해서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밝혀낼 수 없다. 곧 알게 되겠지만, 특히나 유대교와 그들의 종교적 준수 사항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재평가와 관련해 2세기 초반에 생겨난 변화를 고려할 때 이런 판단은 더욱 확실해진다. (151.2)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성경의 본문과 그 문맥과 신약의 가르침에만 의지해서 요한계시록 1:10“주의 날”의 의미를 정의하는 일이 남아있다. 만일 요한이 어느 한 일요일에 자신이 성령에 사로잡힌 것을 발견 했다고 명시하고자 했다면, 그 날을 “주의 날”로 지칭했을 것인가? 신약에서 이 날(일요일)은 언제나 “한 주의 첫째 날”로 불렸기 때문에, 저자가 유독 이 한 부분에서만 그 날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그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과 다른 표현을 쓴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 많은 해석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81) 사도 요한이 비슷한 시기에 사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을 썼다면, 그가 복음서의 기록들, 특히 그 중에서도 예수의 부활과 현현이 첫째 날 일어난 사건임을 기록하는데 있어서(요 20:1, 19, 26) 복음서나 계시록이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152.1)
 예를 들어 몇 세기 이후 쓰인 외경 베드로복음에서 우리는 부활의 날이 “그 주의 첫날”이 아닌 “주의”(κυριακή)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후자의 용어가 그 당시에는 흔하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만일에 일요일이 요한복음과 계시록이 모두 쓰였던 1세기 후 반 즈음에 “주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면, 우리는 일요일을 지칭하는 이 새로운 이름이 계시록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 두 책이 동일한 지리적 장소에서 대략적으로 같은 시기에 동일 저자에 의해 쓰인 글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대개 새로운 용어가 널리 보급되고 더욱 쉽게 이해가 된다면, 글을 쓰는 사람은 그 시대에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를 마다하고 옛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명칭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속성과 의미를 표현하는 용어였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그 표현 대신에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명칭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요한이 유일하게 쓰고 있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그의 외경서가 아닌 복음서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복음서에서 첫 날이 명확하게 부활과(요 20:1) 예수의 현현(요 20:19, 26)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모스나의 주장을 약화시킨다. 즉 모스나는 “주의 날(dominica dies)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한은 공동체가 함께 성만찬 예배를 기념한 그 날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82) 계시록의 주의 날이 일요일 예배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또 다른 이유들은 세 번째 해석과 관련하여 진술될 것이다. (152.2)
 부활절-일요일
 일부에서는 요한계시록 1:10“주의 날”이 매주의 일요일 보다는 연중 부활절 일요일에 대한 명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논의에 대한 기본적인 논쟁의 일부를 살펴보자. (153.1)
 더그모어(C. S. Dugmore)는 최근의 연구에서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사용되었던 것처럼 “주의 날”이라는 명칭이 매주의 일요일 보다는 부활절-일요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약과 사도시대 직후의 문헌에서는 일요일이 기독교 주간에서 중요한 날이었다”는 증거가 거의 없음을 주목한다. 게다가 디다케 14:1이나 사도헌장 7:30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부활절-일요일을 언급하기 위해 “주의 날”이 사용되었다는 특별한 암시들이 쉽게 받아들여진다고 보았다.83) “주의 날”이라는 용어를 한 주의 첫 날에 적용하는 것은 스트로벨(A. Strobel)의 진술처럼 “하나의 부가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84) 아마 이런 경우는 “일요일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정기적인 예배의 날이 되고 매주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여기게 된 이후”에 발생했을 것이다.85) (153.2)
 “주의 날”이라는 명칭을 부활절에 적용시키려던 초기의 시도들에 대한 논의는 몇 가지 이점들이 있다. 이 논의는 뒤에 가서 서로 다른 자료와 근거들, 즉 비슷한 원인들로 인해 주간 일요일 예배가 부활절 축제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것과 관련한 문헌들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디다케 14:1(시기는 A.D., 60년에서 150년까지 다양한 추정이 가능하다)86)을 통해서는 거의 변호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 형용사 “주의”(κυριακή)는 시간(time)이 아닌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방식(manner)과 관련이 있다. 그것이 시간을 언급한 것이라고 해도, 그와 함께 등장하는 언급들, 즉 죄의 자백(14:1), 형제간의 화해(14:2), 말라기(1:11)의 말씀을 통해 “각 처에서 매 시간 깨끗한 제물”(14:3)을 드리라는 호소 등이 연중 기념일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54.1)
 디다케 14장의 많은 부분을 재현하고 있는 사도헌장 7, 30, 1에서는 “주의 부활의 날에, 즉 주의 날에 서로가 함께 모이라”는 언급이 발견된다. 더그모어(C. W. Dugmore)는 여기서 기록된 “주의 날”“시리아에서 4세기의 3분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주의’(ή κυριακή, the Lord’s)로 알려져 있는 부활절-일요일”의 명칭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결론을 맺는다. “유대인 그리스도인 선견자가 한 세기가 막 끝나기 전에 쓴 ‘주의 날에’(‘εν τη κυριακη ήμέρα,’ on the Lord’s day)라는 구절이 부활절-일요일을 언급하는 것이라 는 데 대해 왜 우리는 의심을 해야 하는가?”87) 이 결론의 취약점은 그 논의가 잘못된 가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인용된 사도헌장의 구절 속의 “주의 날”이 무조건 부활절-일요일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가정이 기초하고 있다. 이 구절을 주간 일요일 모임을 암사하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각처에서 깨끗한 제물을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이라는 간언은 분명히 그 결론을 입증하기 어렵다. 그러나 앞 장에서는 부활절-일요일이 “주의 날”(15, 19)88)로 지칭되는데, 이는 다만 동일한 용어가 두 축제 모두를 명명하기 위해 쓰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154.2)
 더그모어(C, W. Dugmore)는 추가적으로 “다른 일요일에 대한 부활절-일요일의 우월성이 대개 구도자들이 침례를 받은 후 부활절에 그들의 첫 성찬식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더욱이 멜리토(Melito)의 부활절 설교(Paschal Homily)에는 제물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제시되어 있다. 저자는 이것이 “초기교회가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한 것은 주간 행사가 아닌 연간 기념일” 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89) 멜리토의 설교를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그 문서가 주간 일요일 준수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으며, 그 이유는 그것이 엄격히 하나의 유월절 설교(Passover Homily)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며, 부활은 단지 끝맺는 말로 부수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155.1)
 구도에버(J. Van Goudoever)는 요한계시록 1:10을 부활절에 대한 참고자료로 해석하기 위해 계시록 내부의 증거를 활용한다. 그는 특별히 14:14 이하의 추수 장면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팔레스타인에서는 니산월 15일에 실제로 추수를 시작했기 때문에, 1:10 이 부활절에 대한 하나의 참고 사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90) 그러나 이러한 농업적 상징성에 기초해 연대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로르도로프(W. Rordorf)의 적절한 관찰처럼, 같은 14:17-20에는 가을 포도수확 장면이 “정확하게 유사한 용어들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그것은 봄이나 가을에 대한 질문인가?”91) 결론은 분명하다. 농사 계절에 대한 종말론적 형상화는 “부활절-일요일”에 대한 인용 자료로써 “주의 날”을 해석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타당한 기준으로 사용될 수 없다. (155.2)
 스트랜드(K. A. Strand)는 1:10에 대한 부활절-일요일 해석을 위한 추가적 논거들을 제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56.1)
유대인 사두개파와 에세네파 전통에서는 매해 일요일(annual Sunday)에 첫 이삭의 한 단을 기념하는 날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있어 그리스도를 첫 수확의 예표로 여겼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계산보다 분파의 계산을 따랐던 초기 기독교의 특정 분파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는 연중 일요일 기념일을 선뜻 택했을 것이다. 대조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주간 일요일에 대해 유대교의 관례에서는 어떠한 예배적, 심지어 심리적 배경들도 추론해낼 수 없다. ∙∙∙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다음의 결론에 다다른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준수한 ‘주의 날’이라는 오직 한 종류의 일요일이 실제 연중 하루의 날이었고, 그것으로부터 주간 일요일 기념일이 어떤 식으로든 발전되었다는 것이다.92)
(156.2)
 스트랜드는 “주의 날”이라는 용어를 주간 일요일보다는 부활절-일요일에 적용하는 것이 옳다고 변호하면서도, 동시에 앞서 말한 논의가 계시록 1:10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그 문서가 아시아의 14일주의자들이 거주했던 한 지역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사도의 전통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에 따르면, 요한이 자신의 글을 보낸 그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14일주의 자들의 계산 방식을 고수하며 부활절-일요일을 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93) 그러므로 만일 니산월 14일로 고정된 날에 따라 유월절을 지켰던 요한이 동일한 14일주의자들이 있는 지역에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부활절-일요일에 성령에 감동을 받았다”고 기록했다고 보는 것은 모순 적이다. 다니엘루(J. Danielou)는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소극적으로 다음과 같이 시인한다. “부활절이 니산월 14일에 일어났다면, 계시록(1:10)에서 그 단어가 일요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94) (156.3)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 계시록 1:10“주의 날”을 그리스도의 심판과 재림(parousia)의 날, 주의 종말론적 날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그럴싸한 주장일 것이다. 이는 몇 가지 암시들을 통해 정당화된다. (157.1)
 계시록 1:10의 바로 앞 뒤 문맥들은 분명이 주님의 종말론적 날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앞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7절) ∙∙∙ 나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8절).” 10절 이후의 구절에서 요한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영광스럽고 또한 승리를 거둔 “인자”에 대한 환상을 기술한다(12-18절), 거기에서 나타난 “인자”는 후에 “그의 손에 이한(sharp) 낫을 들고 ∙∙∙ 땅의 수확을 위하여”(14:14-15) 요한에게 다시 나타난다. 이 구절은 분명히 미래의 심판의 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맥은 명확히 종말론적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요한 자신이 성령에 감동을 받아 장래에 주의 영광의 날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157.2)
 이 견해에 대해서 다른 견해가 충분히 제기될 수도 있다. 탈봇(T. Talbot)의 지적처럼, 만일에 요한이 ‘주의 날’로 투입된 된 것이라면, 어떻게 그가 2장3장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현대교회의 시대를 위한 글을 쓸 수 있었단 말인가?”95) 그는 이 질문의 답변을 10절12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158.1)
“내가 ∙∙∙ 내 뒤에서 나는 ∙∙∙ 큰 음성을 들으니 ∙∙∙ 몸을 돌이켜 ∙∙∙ 보았는데.” 우선, 그는 “주의 날”을 향해 앞을 내다보았고, 분명히 생길 미래를 일들을 다시 보기 전에 돌아서서 파노라마의 형태로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보았다.96)
(158.2)
 요한이 보았던 주의 날의 환상에 대한 3차원적 관점은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말씀을 듣는 19절에서 비롯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날의 시점에서 요한이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먼저 영광스러운 인자가 그의 오른 손에 들고 있는 일곱 교회들을 위해 이미 무엇을 했었는지(“네 본 것” -19절), 두 번째로 교회의 당장의 상황이 어떤지(“이제 있는 일”-19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재림과 그의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기 이전까지 발생할 일들(“장차 될 일”-19절)이 무엇인지를 차례대로 본 것이다. 계시록에 나타난 내용들을 주제적으로 연구해보면, 모든 환상의 핵심과 책 전체가 감싸고 있는 본질적인 주제들은 재림의 날과 관련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97) 사실상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에게 어떠한 일들이 곧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계시”로써 소개된 셈이다. 요한은 본서를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바친 후,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로 이 계시의 속성을 알린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7절). 계시록의 결론인 마지막 장에서도 동일한 선언이 발견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22:7, 12).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22:17). 하늘 보좌, 일곱 인, 일곱 나팔, 여자, 짐승, 양, 마지막 일곱 재앙, 음녀와 바벨론, 사탄의 파멸과 새 예루살렘, 이 모든 환상들은 그리스도의 오심 전 후의 사건들을 기술하는 것이다.98) 그러므로 계시록 전체의 문맥은 1:10“주의 날”이 문자 그대로의 24시간이 아니라, 요한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후의 사건들에 대한 상징적 형상들을 보기 위해 이끌려 간 날, 곧 주의 큰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58.3)
 그 날이 상징적이라는 것은 또한 요한이 이 모든 계시들을 단 한번에 받은 것이 아니라 많은 날을 통해서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장면들로 구성된 것을 통해서도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1장에서 그가 “주의 날에” 환상을 보게 되었으며, 그 일련의 환상이 마지막 장에서도 그에게 제시되는데, 여기서 “이것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 ”(22:8)라는 그의 선언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하게 천사들이 마지막 날까지의 모든 장면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그가 감사함으로 그를 경배하기 위해 엎드렸다는 것을 말한다.99) 과연 이 모든 환상들이 같은 날, 같은 문맥으로, 추측하건데 일요일 아침에 요한에게 보인 것인가? 계시록의 계시 장면들은 많기도 하고 또 서로 다른 주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만일 요한이 하루 만에 그 모든 계시들을 받은 것이라면” 얀센(Fred B. Jensen)이 진술하는 것과 같이 “이는 상당히 기묘한 현상인 것이다.”100) 발부르드(J. F. Walvoord) 또한 “책 전체에 제시된 그와 같은 놀라운 계시들이 24시간의 하루 안에 전달될 수 있는지는 어떤 경우라도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일련의 계시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욱 그럴싸한 해석일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101) (1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