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4장 신약의 세 본문과 일요일
 플리니의 고소 내용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을 가진 “지정된 날”(stato die)인 그 날은 일요일이라고 거의 모든 저자들은 주장한다.27) 예를 들어, 로르도르프(W. Rordorf)는 “지정된 날은 일요일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이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쉽게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28) 만일에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이 맞는다면, “바울은 일요일에 일어날 일을 위해 돈을 저축하라고 지시했는데 ∙∙∙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매주일 일요일에 대하여 언급하므로 그들의 일정을 정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라는 로르도르프의 결론은29)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두 문서는 50여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으며, 우리가 살펴볼 것이지만, 그 기간 동안에 급격한 변화들이 발생 할 수 있었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지정된 날”이 꼭 정규적으로 반복된 일요일 모임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지정된, 확정된, 고정된, 결정된, 규칙적인” 등을 의미하는 그 용어 “스타터스”(status, sisto의 분사형태)는 시간에 대한 언급에 사용될 때 일정하게 반복되는 날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정해진 또는 설립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모임은 주기적으로 되풀이될 수 있었지만 반드시 동일한 요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129.1)
 그 문맥은 또한 “지정된 날”이 아마도 매 주마다 고정된 한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를 몇 가지 시사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역에서 비난받았고, 기소되었으며, 정죄 받았다. 이것은 문제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플리니가 도착하자마자 발견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나타나고 있다. 주어진 혐의의 원인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모임의 날짜와 장소를 바꿨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통치자들은 문초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집회가 인도되고 있는 날의 시간과 그 방법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날짜와 관련해서 그들이 얻은 것은 단지 그들이 모였던 “정해진 한 날”일 뿐이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비두니아(Bithynia)에서 정규적으로 일요일에 이미 모임을 가졌었다면 그들은 나머지 예배 활동에 대해 털어놓을 때, 이미 진행했던 그 사실에 대해 자복했을 것이다. 수십 년 후(A.D. 150년경),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는 분명히 좋은 인상을 창출해 내고자 그리스도인들이 “태양의 날”에 모였다고 로마 황제에게 명확하고도 단호하게 보고하였음을 우리는 살펴볼 것이다.30) 나이와 성별과 태도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무분별하게 죽어가도록 유죄 판결을 내리게 한 반 기독교적 법률을 보다 인도주의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호소하는 플리니의 신중한 호소를 또한 주목해 보자.31) 만일에 그들이 일요일에 모인 것을 플리니가 발견했다면, 그는 아마도 보다 우호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진술하기 위해서 저들이 태양의 날에 모인 이 사실을 언급했을 것이 아닌가?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태양의 날은 로마 세계에서 분명한 명성과 숭배를 받았던 날이었다. (129.2)
 이 부가적인 기록에 비추어 볼 때, 플리니가 기록한 “지정된 날”은 만일에 안식일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매주 동일한 날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에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면, 플리니는 아마도 그들이 유대인들과 관련되었다는 것 때문에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해질 것이므로,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그 날을 언급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에 리비아, 크레네, 이집트, 키프러스,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32) 이러한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광범위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처럼 매주 토요일마다 모였다고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은 그 황제로 하여금 가혹한 조처를 취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의 이유 때문에 플리니의 편지의 내용을 가지고 바울이 첫째 날 헌금을 거둘 계획을 세웠다고 하는 것을 지지하려는 노력은 부당한 것으로 보인다. (130.1)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여전히 고찰해 보아야 할 문제는 바울이 왜 첫째 날에 기금을 적립하라는 계획을 제안했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는 자신이 제안한 목적을 분명하게 진술하였다. 그것은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고전 16:2)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 계획은 예물을 바치는 일요일 예배를 고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착하는 대로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모금을 하기 위해서 제안된 것이다. 그 계획 속에서 네 가지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연보는 주기적으로(“매주 일 첫 날에”, 2절), 개인적으로(“너희 각 사람이,” 2절), 사적으로(“스스로 저축하여,” 2절), 적절하게(“이를 얻은 대로,” 2절) 드려지는 것이었다. 또 다른 경우에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가르치기를,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형제들을 보내는 것이 필요한데,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고후 9:5)라고 하였다. 바울은 연보를 “준비치 아니한 것”(고후 9:4)을 보면 연보를 드려야 하는 사람과 모금하는 사람 모두가 당할 거북한 감정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서 이 사례에서 바울은 시간(주일 중 첫 날)과 장소(자기 집)를 제안한 것이었다.33) 여기에서 바울이 첫째 날을 언급한 것은 신학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이유에서 하게 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연보나 저축을 따로 떼어두기 위해서 주일 중 마지막 날이나 한 달의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는 것은 안전한 자금 관리에는 적합지 않은 것인데, 그렇게 되면 돈이 떨어지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지출을 계획하기 전인 주일의 첫 날에 연보하기로 계획한 자금을 따로 떼어 놓는다면 그 적립된 기금들은 분배될 것이고 모든 궁핍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게 될 것이다. 만일에 이교 사회에서 경제적 중요성이 일요일에 집중되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였는지 오늘날 가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는 그 어떤 재정적인 계산이나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34) (131.1)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유대인들의 관심이 심지어 많은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고,35) 사실 그 안식일은 주일 중의 마지막 날(일요일은 “안식일[즉 주일, ‘μία σαββάτων’]의 첫째 날”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나타남)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의 첫날, 즉 안식일 바로 다음 날에 다른 긴급한 사항으로 그들의 재원(財源)이 감소되기 전에 특별한 연보를 위한 자금을 저축하도록 제안해야 했던 것은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6:1-2의 내용은 예루살렘에 있는 불쌍한 형제들을 위한 실질적이고 정돈된 연보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매우 가치 있는 주간 계획을 제안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본문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시키면 그 의미를 왜곡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132.1)
 우리가 조사 연구해야 할 중요한 내용 중 두 번째 성경 본문은 누가가 직접 체험한 내용(we-passage, 행 20:4-15)을 기록한 것으로서 주일의 첫 날에 발생한 드로아의 집회에 대한 것이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함께 여행하였던 일행 중의 하나(행 20:6)였던 그 기자는 여기서 1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바울이 떠나기 전날 밤 드로아에서 있었던 모임에 대하여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133.1)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때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133.2)
 이 인용절은 “안식 후 첫 날에 ∙∙∙ 떡을 떼기 위해”(계 20:7)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대하여 명확하게 언급한 유일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본문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브루스(F. F. Bruce)는 이 진술이 “그 날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집회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관례와 관련해 우리가 확보한 가장 최초의 명확한 증거”라고 단언한다.36) 제웻(P. K. Jewett)도 유사하게 선언하기를 “여기에 주일 중 첫째 날에 예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집회를 가진 분명한 가장 최초의 증거가 있다”고 했다.37) 사도행전 20:7“일요일 준수에 대한 오해할 수 없는 첫 번째 증거”로 간주하는 이러한 진술들은 훨씬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38) (133.3)
 이러한 단언적인 결론들은 대부분 7절의 앞부분이 관습적인 시간(“주일의 첫날에”)과 초기 기독교 예배의 성격(“떡을 떼려 하여”)을 묘사한 “한 고정된 신앙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는 가정에 의거한 것들이다.39) 하지만 그 모임이 밤중에 개최되었고 ”떡을 떼어 먹은 것이 자정 이후(7, 11절)에 일어났으며, 새벽녘에 바울이 신자들을 떠났기 때문에, 그 같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몇몇 문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이 떠나야 했기 때문에 개최하게 된 드로아 집회의 시간과 성격은 일상적인 것이었는가? 아니면 특별한 것이었는가? 그것이 밤중에 모인 집회였기 때문에, “안식 후 첫날”(μία των σαββάτον)이라는 표현은 토요일 저녁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일요일 저녁을 가리키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누가는 유대의 관습에 따라 하루를 저녁부터 저녁까지로 계산하였는가? 아니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자정부터 자정까지로 계산하였는가?(유대의 관습에 따르면 일요일이 시작되기 전의 저녁이 첫째 날 저녁으로 간주되어졌으며,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일요일이 지나면서 오는 저녁이 첫째 날 저녁으로 여겨졌다). 오직 성만찬 예식의 거행만을 가리키기 위해 “한 고정된 신앙형식”으로 “떡을 떼려 하여”라는 구절이 사용되어진 것인가? “떡을 떼어 먹은” 일은 오직 주일 중 첫째 날에만 일어났는가? 그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드로아에서 바울에 의해 거행된 “떡을 떼어 먹는” 것은 관습적으로 일요일에 주의 만찬을 거행한 것의 일부분이었는가? 아니면 바울을 송별하기 위해서 준비된 친교만찬(fellow suppor-αγάπη)이었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서 몇 가지 항목들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134.1)
 그 모임이 일요일 저녁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꽤 많은데, 그 이유는 이방인들과 교제를 나누었고 그들을 위해 이 책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로마의 계산법에 따라 하루를 자정부터 자정까지 계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0) 위에서 언급했듯이 로마의 계산법에 따르면, 주일 중 첫째 날의 저녁 모임은 일요일 저녁에 개최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사도행전 4:3; 20:7; 23:31-32 등에서도 로마의 제도를 따랐음을 지지해 주는 내용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각각의 사례에서 “이튿날(ή επαύριον 혹은 ή αύριον)이라는 용어는 밤중에 발생한 사건과 관련된 문맥 속에서 나타난다. 유대의 계산법에 따르면 밤은 이미 새로운 날이 시작되어 버린 시간이지만, 누가는 밤이라는 시간 속에 또 다른 새로운 하루가 존재한다는 뜻에서 ”이튿날“이라는 용어를 말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바울이 유대의 시간 계산법이 아니라 로마의 시간 계산법을 사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론한다.(로마의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새로운 날은 자정 이후에 시작된다). 하지만 ”헤에 파우리온“(ή επαύριον) 혹은 ”헤 아우리온“(ή αύριον)이라는 표현이 배타적으로 ”그 다음 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아침” 으로도 번역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논증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두 해석 모두 그 헬라어 단어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들이다. 사실 “아우리 온”(αύριον)이라는 단어는 “새벽”의미하는 “에오스”(ήώς)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피롯 클라머(Pirot-Clamer)가 지적하듯이, 그 단어 자체는 “그 다음 아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아침이 새로운 날에 속한 아침인지 아닌지는 결정할 필요가 없이 말이다.”41) “이튿날”(ή επαύριον)을 “그 다음 날”로 번역하기 위해서, 사실 “날”(ημέρα)이라는 단어가 “머로우”(morrow, 이튿날)라는 단어에 추가되어져야 하든가, 아니면 “머로우”라는 단어 속에 “데이”(day, 날)라는 단어가 포함되어져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누가가 로마의 계산법을 따랐다는 것에 대한 증거들이 사실 빈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35.1)
 하지만 실제로 누가가 로마의 계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할지라도, 이 내용은 신자들이 일요일 저녁에 함께 모였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정 이후에 발생한(일요일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주장되는) “떡을 떼어 먹”은 일은 일요일과 월요일의 경계가 되는 시간 동안에 발생한 것이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한 경우에 주의 만찬이 거행된 시간은 일요일 준수를 직접적으로 옹호해주지 않는다. 렌스키(R. C. H. Lenski)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므로 이러한 딜레마를 인정한다. (136.1)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일요일에 개최된 첫 기독교 예배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면에서 특별한 예배였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증명되어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월요일 아침 일찍 떠났다. ∙∙∙ 만일에 이것이 일요일 오전 예배였었다면, 그것은 사도시대의 집회 중에서 일요일이 정규적인 예배일로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다 더 확실하게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을 것이다.42)
(136.2)
 렌스키는 다음과 같은 정당성이 없는 주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노력했다. “비록 누가에 의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실 이 일요일 오전에 예배가 드로아에서 드려졌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목적을 가지고 월요일에 여행을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43) 일요일 예배의 한 사례로 만들기 위해 그 이야기를 적합하게 맞추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은 사실 훌륭한 발상이 아니며, 다만 불행하게도 그 본문에서 말하지 않은 것에 기초한 것일 뿐이다. 누가는 그 사건의 목격자로서 상세한 많은 내용들을 제공해 주면서 왜 이른 아침의 모임에 관한 언급을 무시했어야 했었는가? 만일에 신자들이 일요일 예배를 위해 아침에 일찍 모였었다면 “떡을 떼는” 것이 왜 자정 이후까지 연기되었어야 했었는가? 더욱이 바울이 일요일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의 출발 시간을 월요일 아침까지 미루었던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바울은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행 20:6), 아마 일요일로 추정되는 날에 드로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이레를”(행 20:6) 머물렀고, 그 다음의 첫째 날에 떠났으니까 드로아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 되는 것이다.44) (136.3)
 누가가 로마의 날짜 계산법을 사용하였고 따라서 드로아에서 일요일 저녁에 집회를 개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 구절로부터 정규적인 일요일 준수의 역사성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를 얻고자 했던 그 노력 자체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다. 모스나(C. S. Mosna)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137.1)
그 성찬식이 거행되었던 시간은 일요일 시간의 범위 내, 따라서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의 저녁이라고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누가는 그 날짜에 대해 상술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 그 본문에는 일요일예배와 관련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45)
(137.2)
 누가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시종일관 유대 시간 계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 유대의 시간계산법에 따르면 첫째 날은 토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시작된다. 그 시간은 일요일의 낮의 부분에 선행하는 일요일의 밤의 부분에 해당 된다. 그렇다면 그 모임이 이루어졌던 날인 첫째 날 저녁은 오늘날의 토요일 밤에 해당되는 것이었다.46) 이런 견해는 누가가 비록 이방인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매장에 대해 기록할 때 유대의 제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지지된다. “이 날은 예비일(금요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 23:54). 사도행전에서도 역시 그는 계속해서 유대력과 그 종교적 관습들을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는 헤롯왕이 베드로를 “무교절”에 체포했음과 “유월절 후에 백성들 앞에 끌어” 내고자 했음에 대해 언급한다(12:3, 4). 누가는 자신이 바울과 더불어 무교절의 마지막 날이 되는 전체 휴식일 이튿날에 빌립보를 떠났음을 기록한다(20:6; 눅 22:1, 7 비교), 그는 주저함 없이 바울이 유대의 관습을 존중한 여러 사례들을 보여준다(행 16:1-3; 18:18; 20:16; 21:24). 예를 들어, 바울이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갔다고 말한다(20:16). 그 후에 누가는 그 도시에서 사도 바울이 왜 강압 아래서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였는지를 기록했다(21:26). 이런 기록들은 바울이 “유대인들 및 헬라인들”과 더불어 안식일 모임에 참석했던 언급들과 관련된 누가의 기록들 속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행 18:4; 17:2, 16:13, 15:21, 13:14, 42, 44 비교). 이런 지적에 비추어볼 때, 누가가 전례상의 유대력을 존중했고, 시간을 계산할 때 전혀 모순 없이 그 역법을 사용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137.3)
 그러한 제도에 따르면, 드로아에서의 첫째 날 집회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토요일 저녁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 시간은 안식일이 지나고 난후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수 있는 편리한 시간이었다고 어떤 학자는 말한다.47) 안식일로 인한 제약이 더 이상 적용될 필요가 없는 시간이었고, 그래서 유대인들(바울과 디모데와 같은)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사회적 영적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엄격한 랍비적 개념에 따라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가 복음서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안식일의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와 거의 조화되지 않는다. (138.1)
 만일에 드로아에서의 집회가 토요일~일요일 저녁 시간 동안에 개최되었다면, 그것이 공식적이고 정규적인 일요일 예배였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바울이 신자들과 오직 일요일 밤에만 함께 예배를 드렸고, 일요일 낮 시간동안에는 여행을 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듯이, 이것은 안식일에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일요일 준수에 대한 최상의 예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호아케스잭슨(F.J. Foakes-Jackson)이 설명했듯이, 그 구절은 “훌륭한 유대인 들로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안식일에 여행을 시작할 수 없어서, 일몰 시간으로 안식일이 마쳐지고, 12절에 나타난 대로 ‘첫째 날’이 새자마자 곧바로 출발할 수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보인다.48) 아울러 바울이 데살로나가에서 3주 동안(행 17:2-3), 고린도에서는 18개월 동안(행 18:4; 11), 기타 다른 장소에서는 그보다 짧은 기간 동안 “자기의 규례대로” 안식일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회당과 야외에서 성경을 가르쳤(행 16:13; 13:44, 42, 14)음을 유의해볼 때, 드로아에서도 역시 그가 신자들과 안식일에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이해 된다. 바울이 7일 동안이나 드로아에 머물면서 그가 떠나기 전날 밤까지 신자들과 집회를 가지지 않았다고 믿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첫날 저녁 집회는 바울과 더불어 “떡을 떼기 위해” 계획되었던 마지막 고별모임이었던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139.1)
 누가는 “안식 후 첫날에 ∙∙∙ 떡을 떼려하여” 그 모임이 개최되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일요일 준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그가 유대의 계산법을 따랐는지 로마의 계산법을 따랐는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 날이(유대의 방법에 따른) 일요일이 시작되기 전의 저녁이었는지,(로마의 방법에 따른) 일요일이 시작된 후 따라오는 저녁이었든지, 그 집회가 개최된 날은 여전히 첫날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떡을 떼어 먹”은 일이 자정 이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행 20:7, 11). 보통 때와는 다른 그러한 시간은 그것이 상습적인 관례가 아닌 특별한 경우였음을 시사해 준다. 만일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처럼 그 집회가 주의 만찬을 거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었다면, 바울은 무슨 이유로 그 예식을 유두고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졸고 있는 시간인 밤중까지 미루었으며, 떡을 뗀 후에 날이 새기까지 강론을 계속하였단 말인가? 사실 그 집회가 성찬을 거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것이었다면, 그것을 거행하기에 적합한 시간은 집회가 시작되는 시간이나 아니면 바울이 떠나기 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강조하는 고별 설교를 할 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떡을 떼는” 일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된 강론과 더불어 신자들이 거의 비몽사몽간에 있을 때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그 모임이 예식적인 기능 보다는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 것이었음을 강력하게 암시해 준다. 사실상, 기록에 의하면 그 집회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는 단어들은 거의 없다. 더욱이 그것이 공식적으로 참가해야만 하는 집회였는지를 암시해주는 어떤 직접적인 내용도 없다.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 이야기하고 떠나니라”(11절).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모두 단수 동사이다. 이것은 강론하고, 떡을 떼고, 먹고, 떠나기 전까지 다시 강론을 한 주체가 우선적으로는 영예로운 손님인 바울임을 나타내 준다. 반면에 신자들은 아마도 너무 많아서 다 떡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구경만하고 영적으로 은혜를 받은 것에 만족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아우구스트스 네안더(Augustus Neander)가 내린 것과 같은 다음과 같은 결론은 피할 수 없다. (1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