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히브리서 연구) 제 4 장 하나님의 안식 (2부)
 바울이 특별하게 사용한 사바티스모스라는 단어는 2, 3세기 때까지 이곳 외에 성경이나 고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단 한 번은 제외).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서신을 쓸 때 이 사바티스모스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썼을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3 (98.3)
 주일론에 관한 심대한 연구를 펼친 윤대화 목사의 연구를 살펴보면 세계 각처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안식일’(삽바트)을 의역한 것인데 철자의 소리대로 음역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어의 쌔배쓰(Sabbath)나 독일어의 사바트(Sabbat)나 서반어의 사바토(Sabbato), ···, 그리고 더 고대에 거슬러 가서 라틴어의 사바툼(Sabbatum)이나 헬라어의 사바톤(sabbaton) 그리고 아람어의 사베타(Shabbetha) 등은 모두 히브리어의 샤봐트를 음역한 낱말들이다.” 4 (98.4)
 안식의 용례 — 히브리서 3~4장‘안식’이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구분이 없이 사용되었지만 원어 상에는 ‘카타파우시스’‘사바티스모스’로 다르게 기록되었다. ‘카타파우시스’3장4장에 도합 여덟 번(3:11, 18; 4:1, 3(두 번), 5, 10, 11)나오고, 관련 동사인 ‘카타파우오’(katapauo)가 세 번(4:4, 8, 10(‘쉬셨다’)) 나온다. 각 경우마다 ‘카타파우시스’는 명백하고 특정한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을 명시한다”.5 3~4장에서 주로 ‘카타파우시스’‘가나안 안식’, ‘하나님의 안식’, ‘창조의 안식’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본 절에는 특별히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의 안식’의 의미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선택된 단어인 ‘사바티스모스’가 사용되었다. (99.1)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10) (99.2)
그의 안식
 9절‘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안식’‘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쉬신 것처럼 자신의 일을 쉬는 경험을 하게 된다. (99.3)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2~3) (99.4)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100.1)
 ‘안식일 안식’은 단지 안식일 시간 준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칠일에 하나님이 안식에 들어간 것처럼 안식일의 시간 속에서 경험하는 ‘안식’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현재 안식일 준수와 더불어 온전한 믿음과 순종을 드려야 하다. 또한 제칠일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의 경험으로 들어가야 한다. (100.2)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100.3)
저 안식
 안식에 들어갈 약속에 들어있는 남은 안식(4:1), 즉 가나안 안식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하나님의 안식(3장),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 가서 창조 때의 안식(4:3) 즉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안식(4:9)의 경험에서 시작되어 아직도 지켜져야 하는 안식일 안식, 이것들이 모두 “저 안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안식”은 남아있는 약속이다. 왜일까?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영원한 언약 가운데 들어 있는 하늘 가나안의 영원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100.4)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100.5)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롬 4:13)은 어느 시대에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애굽 강가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창 15:18)였고 그것은 에덴에서 발원되던 유브라데 강을 비롯한 네 강을 연상하게 하는 범위였다(창 2:13~14).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기업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11:13), 그가 바란 것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11:14)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맹세로 보증하셨다(겔 20:6).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것을 요구받았다(겔 20:11-12). 광야 1세대는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거의 죽게 되었고, 광야 2세대에게 다시 같은 언약과 그에 따른 조건이 주어졌다. 특별히 안식일 준수와 그로 인해 이루어진 백성들의 거룩함은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이시겠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징”(증표, 서명, 인, 기념비)이 되었었다(겔 20:18-26). 이 약속은 다윗의 시대에도, 또한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언약)이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식일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증표는 언제나 간직되어야 한다. (101.1)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안식일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안식인 거룩함(성화)에 이르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힘쓰라’는 말은 ‘열성적인 사람이 되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라’는 권고이다. (101.2)
 “진정한 성화는 하나님과 조화되는 것, 그분과 닮은 품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품성의 사본인 율법의 원칙들을 순종함으로 얻어진다. 그리고 안식일은 그 순종의 표이다. 충심으로 넷째 계명을 지키는 자는 전 율법을 순종할 것이다. 그는 순종으로 거룩하게 된다.”6 (101.3)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안식, 영적인 안식, 안식일 준수에 있어서 실패의 경험을 남기고 말았다. (101.4)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102.1)
 원문에는 12절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있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