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창조와 구속과 소망의 축제) 5. 자유의 경험 (Sakae Kubo)
 본 회퍼의 위 진술은 마지막 심판의 기준에 관한 신약성경의 주장과 조화된다. 예컨데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라 하였다. 이같은 사상은 바울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상을 베드로전서와 계시록에서도 발견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 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2:23; 20:13 참조). 이러한 구절들은 분명히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이 구절들은 본 회퍼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믿는 사람들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믿는다”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행위는 우리의 믿음의 진실 여부를 시험하는 수단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한 믿음은 순종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즉 실천은 진실한 믿음의 자연적인 결과인 동시에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해주는 것인 것이다. 반면 율법의 행위들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고 그 대신에 자신의 의와 힘을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 (44.4)
안식일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든다. 도날드 블뢰쉬(Donald Bloesch)는 말하기를 “우리는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 그러나 믿음에서 비롯된 행위가 성화의 진전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는 우리는 행위에 의해서 또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 얻는다 ”7고 하였다.
(45.1)
 Bloesch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45.2)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의 결정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의 역설적인 일치를 붙잡도록 노력해야 한다”.8
(45.3)
 심지어 칭의에 있어서도 인간의 역할 부분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에 맞서서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할은 그분의 공로를 받아 들이는 일이다. 2000년 전에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오늘날 그의 뜻에 일치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험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상대하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대상인 생명 없는 물체처럼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구원을 유효하게 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활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영위하는 현재의 신실한 생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십자가 짊어짐이 있어야 최후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9 (45.4)
 칭의가 우선한다는 것은 기본 사항이다. 인간 혼자서는,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항상 명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대상인 생명 없는 물체 같은 것으로 생각되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우선권이 근본이 되겠지만 사람이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는 한 그를 위한 구원은 없다. 또한 믿음의 응답 다음에는 사랑스러운 순종의 생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45.5)
 칭의와 성화의 상징으로서의 안식일은 이러한 진리들을 결합시키고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우리를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나 도덕 폐기론(그리스도인 생활의 진지하고 성실한 순종을 무시하는 신중치 못한 태도)의 잘못으로 빠지지 않게 지켜준다. 상징적 의미에 있어서 안식일 자체는 그 외적인 준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안식일의 참된 준수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성령의 힘을 빌어 자신의 매일의 생활을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칭의와 성화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는 진리가 살아있는 실제가 된다. 상징은 실현되고 안식일의 의미는 체현된다. (46.1)
 안식일은 창조에 뿐만 아니라 구속에 관련되어 있다. 신명기 5장 15절에는 이 둘을 결합시켜 말하기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느니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민족 구성원 안에 들어있는 “종”들과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신분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연관이 지어져 있었으며 이 연관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를 다룸에 있어서, 특별히 안식일에는 어떤 배려를 해야 한다는 암시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 구절에서는 안식일이 이집트의 속박을 벗게하신 위대한 구원의 회상을 유도하는 날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안식일의 준수가 창조주 하나님과 연관되고 있는데 신명기 5장 15절에서는 안식일이 구원의 주 또는 구세주로서의 하나님과 연관되고 있다. 창조주에 대한 관념이 구세주에 대한 관념을 이끌고 있다. 이 두 개념은 풀 수 없으리 만큼 서로 엉키어 있다. 그러나 경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안식하기에 앞서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대면한다. (46.2)
 신명기 5장 12-15절에는 구속과 창조의 개념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덜 분명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df) 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완성을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신 말씀(“다 이루었다”)과 연관시켰다.10 이 말씀이 발해지는 그 시각에 성전의 휘장은 두 쪽으로 찢어지고 말았는데 이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있던 장벽이 그리스도의 화해 행위로 말미암아 없어지게 된 사실을 뜻했다. 구속사업이 완성되고 마쳤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고후 5:19)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 주일의 여섯째 날에 창조의 일을 마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수난 주일의 여섯째 날에 구속의 일을 마치셨다. 태초에 창조주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듯이 구속주께서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46.3)
 안식일이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이루신 구속적 활동을 기념하는 것인 만큼 각 사람의 구속은 “새로운 피조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7).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창조와 구속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가 구속자로서 행한 일의 결과가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가 수난 주간에 행한 보편적 구속 활동과 우리들개인에 대한 그분의 특별한 구속 행위는 둘 다 안식일에 기념되고 있는 것이다. 기념일로서의 안식일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일반적 구속적 활동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개개인의 구속까지 다루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객관적 행위 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반응까지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47.1)
 안식일은 이미 완료된 창조 행위를 기념하는 날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 곧 구속 행위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기념할 때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인 세계를 즐기는 것이다. 이같은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이 곧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 창조하는 능력이라”11 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안식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재 창조와 침례의 시간을 회상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생활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단번에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창조 사건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다 성취하신 구속 사업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단번에 끝내신 새 창조를 일주일의 주기로 상기 시키는 날인 것이다. (47.2)
 안식일은 오직 우리들이 진정으로 그 능력의 증거를 몸소 나타낼 때에야만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표징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그 창조의 능력이 안식일 준수자의 생활 속에 이룩한 결과가 서로 결합되지 않는 한 안식일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시간의 거룩은 마땅히 존재의 거룩과 짝지어져야 한다. 시간의 거룩함은 마땅히 시간속의 거룩이 되어야만 한다. 진실이 이럴진대 안식일 준수는 결코 율법적이거나 맹목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 진실로, 상징은 그 상징이 대표하고 있는 그 실체속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의 외적인 표시에 불과한 추상적 실재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의 준수에 의하여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새 창조”의 실체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무엇 보다도 “새 창조”의 상징이 될 때만 개개인에 있어서 세계 창조의 상징의 의미를 갖게 된다. (47.3)
 안식일은 항상 기쁜 날로서의 일면이 강조되어 왔다. 이사야는 그날을 “즐거운날”(사 58:13)이라고 불렀다. 안식일을 기쁨의 날로써 인식해온 유대인들의 전통적 태도는 안식일에 있어서의 금식 행위를 금지하는 데에 까지 미쳤다. 사무엘 드레스너(Samuel Dresner)에 따르면, “시바(Shivah)즉 애곡의 칠일 기간이라 할지라도 안식일만은 애곡이 중단된다. 탈무드에는 랍비 마이어(Meier)의 아내 베루리아(Beruriah)가 두 아들이 죽은 비참한 소식을 듣고도 안식일이 지나 밤이 된 후에야 남편에게 전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으며, 베루리야 부인의 이 행위는 그 후 대대에 걸쳐 안식일의 평화와 기쁨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조심을 다 해야 한다는 산 모범으로 인식되어 왔다.”12 (48.1)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특별히 즐거운 날로 만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다. 엘렌 화잇도 재림 신도들에게 안식일을 특별히 기쁜 날로 만들도록 권고하였다. 엘렌 화잇은 특별히 부모들을 향하여 “안식일을 주일 중 가장 기쁜날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며 그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기쁜 날, 날 중의 날, 주님의 거룩하고 존귀한 날로 여기도록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13고 권고 하였다. (48.2)
 안식일이 즐거움과 기쁨의 날로서 갖는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못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죄의 속박으로 부터 벗어난 우리의 개인적인 구속 뿐만 아니라 모세의 구속적 행위를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우리가 죄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을 얻고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 빛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우리는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엡 2:12, 13)라는 사실을 안식일에 기억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48.3)
 안식일은 예배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강조하고 있느니만큼 마땅히 예배의 기초라 할 것이다. 안식일은 또한 구원과 구속의 제전이라는 의미에서도 예배의 초석이 되고 있는 날이다. 구원과 구속의 축제는 안식일 예배 순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말과 기도와 찬미로 찬양하기 위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묘사되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와 선포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이같은 기쁜 소식을 받아 들이고, 그들의 언행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그들의 상징적 행위와 또 그들의 언행을 통하여 자신들을 은혜의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것이다. 모든 예배 의식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에 중심 촛점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안식일은 바로 구속의 축제일인 것이다. (49.1)
 예배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을 전혀 갖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 때문에 예배에 나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들의 위대한 구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한다. 그들은 물에 빠졌다가 구조원에 구조 받은 남녀들이나 또는 점령군 사령관에 의하여 감옥에서 풀려난 전범자들의 모임과 같다. 그들은 보상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오직 감사와 찬양의 정신만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그들의 태도에는 냉담하거나 기계적인 데가 없으며 대신 기쁨이 충만해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히 찬미를 부르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한 나머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온다. 그들은 바울처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하면서 기쁨을 가누지 못하여 한다. (49.2)
 미 주
 1. 칼 바르트는 그의 Church Dogmatics 제3권 4쪽에서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탁월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2. Matitiahu Tsevat, “The Basic Meaning of the BMcal Sabbath,” Zeitschrift für die alttestamentliche Wissenchaft 84(1972), @457-458.

 3. Ellen G. White, The Sanctified Life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37), p.9.

 4. EDen G. White, Steps to Christ (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1892), p.65.

 5.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revised and unabridged edition (New York: Macmillan, 1959), p. 47

 6. Had, p.69.

 7. Donald Bloesch, The Christian Life and Salvation (Grand Rapds, ML: Eerdmans, 1967), p.17.

 8. Ibd

 9. Ibd, p.43.

 10. “The Day of Rest in the Old Testament,” Lexington Theological Quarterly, 7(1972), p.70.

 11. Ellen G. White, Testimonies to the Church (Mountan View, Calif.:Pacific Press, 1882), vol, VI, p. 350.

 12. Samuel Dresner, The Sabbath (New York: Burning Bush Press, 1970), p.19.

 13. Ellen G. White, Testimonies to the Church (Mountain View, Calif.:Pacific Press, 1882), vol, VI, p.369. (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