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창조와 구속과 소망의 축제) 6. 구속의 기념물 (Samuele Bacchiocchi)
 * Andrews University 종교학과 교수.

 저서 : From Sabbath to Sunday (Gregorian University Press, 1977). Divine Rest for Humanrestlessness (Graian Press, 1980). (51.1)
 성경에 나타난 구속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영원한 친교를 나눌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시는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속역사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근본 계획이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거하”시고 저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때(계 21:30)에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확증으로 끝을 맺고 있다. (51.2)
 안식일은 하나님의 이같은 계획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기 위하여 자신의 창조 행위를 처음으로 마치시고 인간의 시간과 역사 안으로 들어 오신 날이다. 때문에 인류의 역사를 시작한 날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완성을 요약하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들인 창조와 구속과 회복은 모두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제정하신 제도인 안식일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상징되며 기념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주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와 그 역할에 주안을 두고자 한다. (51.3)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완결되고 완전한 창조의 기사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관심과 만족을 나타낼 목적으로 기획된 우주론적 제도로 안식일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안식일의 구속론적인 기능도 비록 미숙한 형태로나마 이 제도속에 엄연히 나타나 있었다. 안식일 제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몇몇 동사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예시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2, 3). (51.4)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첫번 째의 명백한 역할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제 “마치고” “다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창 2:2, 3). 하나님의 창조 결과를 개선키 위한 진화론적 과정 같은 것은 전혀 필요치가 않았다. 그러나 위의 진술 속에는 외견상 덜 뚜렷할는지는 모르나 분명 매우 심오한 의미가 별도로 담겨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세상의 모든 물건들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까지도 내주시기 위하여 안식일을 통해 인간의 시간속으로 들어 오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마 1:23) 되시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려는 당신의 자발성을 나타내 보이셨다. (52.1)
 우리는 “일곱째 날을 복주셨다”(창 2:3; cf 출 20:1)는 축복의 보증에서도 구속적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축복이 충만하고 풍요한 생활을 약속하는 구체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창 1:22, 28; 9:1; 49:22-26; 시 133:3). 창조의 기사에서는 안식일의 축복이 혈육 있는 피조물(창 1:22)과 인간(창 1:28)에 대한 축복에 뒤이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최종적인 축복으로써, 하나님의 완결되고 완전한 창조에 대한 궁극적이고도 총체적인 축복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축복하심으로써 모든 피조물에게 완전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재확인 하시면서 인류의 시혜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인류가 타락하자 안식일에 대한 이같은 약속은 미래에 있을 주님의 구원을 보장하는 표시가 되었다. (52.2)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진술에도 구속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창 2:3). 안식일의 거룩성은 이 날에 발생하는 하나님의 신비스럽고도 장엄한 임재의 특별한 징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출 31:13; 겔 20:20; cf. 사 1:12-15).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하여 당신의 거룩한 임재로 인한 당신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담이 생후 처음으로 보낸 하루가 바로 안식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날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적 연출을 탄복하면서 보낸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교적 상대가 되었던 하루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하여 창조의 결과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계속적인 임재를 약속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안식일은 인류가 타락한 후에 그분의 모든 구속적 행위의 기본적 토대와 배경도 족히 될 수 있었다. (52.3)
 창조 후에는 만나의 사건이 안식일의 구속적 역할을 나타내는 의미 깊은 본보기로 나타났다. 이 경우에서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완결되고 완벽한 창조를 나타내는 우주론적 구조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가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해 낸 새 민족에게 주시는 역사적 제도로서 제시되었다.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노라(출 16:29)고 하신 것이다. (53.1)
 평일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만나의 기적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내보이셨지만, 안식일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직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음성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안식일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아래를 보지 말고 위를 쳐다보며, 세상의 사물을 멀리하며 오직 요동치 말고 믿음에 정진해야 한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적절한 준비를 갖추게 가르침으로써 만나의 사건속의 안식일은 에덴의 타락과 애굽의 노예 생활로 파괴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뢰 관계를 회복시키는 매체가 되었다. (53.2)
 만나의 경험은 그 후에 시내산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자신과 안식일의 의미에 관한 더 큰 계시의 전조에 불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산에서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계명의 모습을 더욱 풍성히 나타내주셨다. 구속사(救聽史)의 이 사건에 나타난 안식일의 역할은 이제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영속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7의 구조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53.3)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므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출 24:16).
(53.4)
 엘렌 화잇은 “제칠일 곧 안식일에 모세가 구름 속으로 불리어 들어갔다”1고 하였다. 모세는 어쩐 일로 유독 안식일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받았는가? 혹시 하나님의 이 초청이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신비로 감싸져있는 저 안식일의 쉼 즉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거룩한 임재로써 당신의 피조물들을 복 주신 그날의 신비 어린 본질을 밝혀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계시의 여러 요소들을 미루어 볼 때 이제 안식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인격화 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모세를 당신의 임재로 초청하셨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 계명을 통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안식일 준비를 합당히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배양하도록 촉구하셨다(출 20:8-10).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시내산에서 안식일을 가리켜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알게하는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라고 선포 하셨다(출 31:13). (53.5)
 안식일의 이같은 축복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 행위를 끊임없이 회상케 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그 일례로서 출애굽기에 기록된 안식일 계명의 강조 사항은 이제 바야흐로 야웨에 의하여 노예 상태로부터 놓이게 된 자유를(출 20:2) 히브리 사회 전체 구성원들에게 보장시키기 위하여 동물을 포함한(출 20:10) 모든 대상들에게 안식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같은 구속적 동기는 신명기에 소개되는 십계명에서 더욱 더 분명해 지고 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54.1)
 한스 왈터 울프(Hans Walter Wolff)는 말하기를 “안식일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해방자이시라는 사실을 회상한다”2고 하였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이 히브리 사회의 구성원 전체에게 제공하는 바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사회적 불평등으로 부터의 해방 경험은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출애굽 구원을 회상케 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메시아의 온전한 구속을 예고했다. 이사야서에서는 모든 민족들이 모이게 될 메시아 시대가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할 시대로 묘사되고 있다(사 66:23). 헤셀(A. J. Heschel)이 “행복과 평정, 화평과 조화”3로 정의한 안식일의 쉼—메누하 경험은 흔히 마지막 날 또는 내세라고 알려진 메시아 시대에 관한 선지자들의 기록이나 탈무드 문서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54.2)
 안식일에 대한 이와 같은 메시아적, 구속적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행한 공생애 취임 설교에서 이사야 61장 12절(cf. 사 58:6)의 안식일 기별을 빌어 당신의 사명을 선포하셨는 지를 깨닫게 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막 3:2, 6). 이 기별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하신 간단한 논평이야말로 이러한 설명의 핵심을 이루는 말이 아닐 수 없다. (54.3)
 누가복음에는 메시아의 사명을 처음으로 선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눅 4:16-21)에 뒤이어 두개의 병고치는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가버나움 회당의 안식일 예배 도중에 한 귀신들린 자가 정신적 질환을 치유 받은 이야기이며(눅 4:31-37), 둘째 사건은 안식일 예배 직후 시몬의 집에서 시몬의 장모의 육체적 질환을 고쳐준 이야기이다(눅 4:38, 39). 이 치유로 말미암아 안식일은 그 환자의 모든 가족에게 기쁜 날이 되었으며 환자 자신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는” 봉사를 할 수가 있었다(눅 4:39). 그리스도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마 12:9-12; 막 6:6-11) 안식일의 구속적 가치와 역할을 예증하셨다. 예수님에게로 병자를 데리고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 무리들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니까?”하고 시비를 걸었다(마 12:10).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나의 원칙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나서 실례를 들어 대답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마태복음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원칙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구체적인 실례를 곁들여 두번째의 질문을 제기하고 계시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 12). (55.1)
 그리스도께서는 원칙에 관한 질문과 구체적인 실례를 통하여 안식일의 본질적 가치 즉 이날은 다른 이들에게 관심과 동정을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안식일에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신자들은 다른 이들을 “죽이는”활동이 아닌 “살리는” 활동에 자동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시비를 건 사람들은 안식일에 타인의 신체적 정신적 복리를 돌보지 아니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을 잘못 인식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구원에 봉사하는 기회로 보내기 보다는 결점을 찾아내어 그리스도를 죽일 방도를 강구하는 등 파괴적인 노력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막 3:2, 6) (55.2)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는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의 치료를 통하여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눅 13:10-17), 주님께서는 세번에 걸쳐 “자유케 하다—루에인”이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18년 동안 “꼬부라져” 앓고 있는 여인에게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셨다. 회당장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보고 분노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사람을 사랑하고 구하는 날이 아니라 법을 지키는 날이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전자의 의미를 더 명백히 하시기 위하여 회당장에게 랍비들도 허용하고 있는 관례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눅 13:150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께서는 동물을 풀어 준다는 개념위에 수사학적 질문의 형태를 빌어 명확한 결론을 끌어내셨다.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6). (56.1)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소전제에서 대전제로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안식일의 개념이 얼마나 역설적으로 왜곡되어 있는가를 드러내 보이셨다. 마구로부터 소나 말을 풀어 내는 것도 합법적이었는데 (필시 그들은 하루라도 물을 먹이지 않으면 무게가 떨어져 매매할 때 값이 떨어질 걱정을 더 했을 것이다). 동일한 그 날에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사람을 고쳐주는 것은 오히려 위법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심한 왜곡인가? 그러기에 그리스도로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바 안식일의 근본 목적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안식일에 대하여 만연되어 있는 당시의 그릇된 관념에 의도적으로 맞서서 행동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56.2)
 요한이 전하고 있는 두개의 안식일 기적은(요 5:1-18; 9:1-41)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안식일의 관계를 보다 더 확실하게 예증해주고 있다. 병고침을 받은 사람은 둘 다 만성 병자들이었다. 한 사람은 38년간 앓은 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다. 두 사건에서도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상투적인 송사를 하였다. 중풍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하셨으며, 소경에게는 진흙을 이겨 발라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을 깨뜨렸다는 비난을 반박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cf. 9:4). (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