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창조와 구속과 소망의 축제) 5. 자유의 경험 (Sakae Kubo)
 * Atlantix Union College 학장 및 Andrews University Seminary 신약학 교수 역임.

 저서: God’s meets Man: The Mearing of Sabbath and the Second Advent (Southem Publishing Association, 1978). (39.1)
 안식일은 칭의와 성화에 모두 관련되어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날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적 활동의 완성을 가리키는 날이자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의 기쁜 기념일이기도 하다. 이 글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과 안식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업적에 의하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가 행하는 것이나 성취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께서 가납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안식일 준수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안식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표징 즉, 구원이라는 것은 전혀 사람의 업적과 상관이 없고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의 표징인 것이다. 인류의 첫 부부가 지킨 첫 안식일은 인간이 창조되고서 처음으로 맞은 날이었다. 이와같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끝마치셨기 때문에 안식에 초청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업적이라고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빈손으로 안식에게로 나아갔던 것이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것들을 구경하는 일 뿐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날이기도 했던 그 안식일의 경험이 계속하여 그들에게 상기시킨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만한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야 했던 것이다.1 (39.2)
 안식일에 우리는 우리의 일들을 중지해야 한다. 안식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대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안식일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마땅이 인간의 업적과 인간의 일들을 제쳐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원하신다. (40.1)
 우리의 일을 끝마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중지할 수 있고 세상은 우리 없이도 계속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필요하다 할지라도 절대로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중지할 수 있으나 우주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여전히 계속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다. 안식일은 우선권이 하나님에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하나님이 일하시며, 하나님이 주시며,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하나님이 초청하시며,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피조물이며 받은 자이며 관객이며 손님이다. (40.2)
 지시된 명령이 어떤 것이건 간에 그것은 인간에 의하여 자기의 의를 주장케 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기도, 자선과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공로로 주장될 수 있는 율법의 업적으로 이용될 수 있으며 사실상 아직까지 그렇게 이용되어 왔다. 그리고 안식일 역시 같은 방식으로 악용되어 왔다는 것도 인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안식일 사상에는 이같은 계율주의적인 정신 즉 그 독단적 특징을 반대하는 일면이 있다. 안식일 계명은 단지 한날의 준수 만을 명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날이 어떤 날이 되어야 하는지를 상세히 지시하고 있다. (40.3)
 일곱째 날은 태양과 달의 운행이나 씨뿌리고 수확하는 것에 연관된 자연적인 예배의 날이 아니다. 이날은 유월절이나 오순절, 장막절이나 월삭처럼 하늘이나 땅의 어떤 자연적 현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날은 창조 행위를 마치신 하나님의 안식을 기념하는 날로서, 계시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날이다. 이날은 독단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제칠일에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순종의 행위이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아 포기의 신앙 행위이다.2 안식일 준수의 명령에 나타나 있는바, 사람과 사람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그날에만 제한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시간 전체에 그리고 인간 전체에 미친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관하여 우리에게 특별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하여 안식일 이외의 다른 날들은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시간이 안식일과 같이 거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의 생활이 항상 그분과 그분의 원칙에 의해서 영위 되어야 한다는 인식하에 사용되어야 할 시간이다. (40.4)
 안식일이 보편적으로 준수되고 있는 유태인 사회에서의 형편과는 달리 경쟁적인 주장들이 서로 상충하고 실생활에 있어서 사회의 관습과 규범이 하나님의 명령과 빈번히 서로 충돌을 빚는 다원적인 사회에서는 늘 안식일 계명이 인간의 자치권에 대한 크나큰 도전으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다. 20세기 현대 사회에서의 안식일이 그렇다. 안식일 준수자들은 일요일 중심의 세계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나아가서는 어느 날도 예배일로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사회에서 생존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른바 레저(여가)사회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고려없이 주말을 사용해 왔다. 주말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위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칠일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분명히 인간의 자치권에 대한 도전이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방해는 받아 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주말에 앞서 종교적 행사를 치름으로서 주말의 향락에 불편이 없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막무가내 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면 하나님의 방식을 떠나서는 예배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편리한 대로 하나님과 그분의 안식일을 조작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을 영접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영접하기로 한다면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땅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영접해야 한다. (41.1)
 하나님은 인간에게 휴식과 여가시간 이상의 것이 필요 됨을 알고 계시다. 인간은 쉼과 휴식과 여가로만 살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역시 하나님이 필요하다. 참된 성취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첫째로 할 때 그리고 현 세계의 사물보다 영적이며 영원한 것의 가치가 더 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이루어진다. (41.2)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일과 자치권을 벗어 버리게 하는 것이 안식일 이라면 그같은 안식일은 결코 자기를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날의 본성 자체가 이러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을 거부한다. 실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통치권의 표징이며, 인간의 수용성과 의존성의 표징이다. (42.1)
 안식일은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수용성을 나타낸다. 수용성은 수동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하나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현존을 우리에게 강제하시지는 않으신다. 대신에 그분은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가 문을 열 때만 우리의 것이 된다. 이와같이 안식일의 충분한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초청에 의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그의 생활 가운데 받아들일 때에 완성된다. (42.2)
 이러한 경험의 결과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은 대지처럼 생기가 없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고 의지를 지닌 활기찬 개성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새 피조물”로서의 사람은 무생물과 같은 하나의 완성된 생산품이 아니다. 그는 매일 매일 하나님께 대응해야 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그의 생활 가운데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엘렌 화잇이 말했듯이 “일순간에 성화의 이르는 일은 전혀 없다. 진실한 성화는 생애가 계속되는 한 계속되어야 하는 매일의 과업인 것이다.”3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날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해야 한다. (42.3)
 안식일이 의미하는 것은 칭의 경험만이 아니라 바로 위에서 말한 성화의 경험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 20:12)고 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했다는 표징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이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속의 거룩함 또는 거룩한 백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에스겔의 주장처럼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며 그의 법도를 실천치 않았으며 그분의 안식일을 더럽혔다. 안식일의 모독은 반역과 불순종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42.4)
 안식일은 단순히 자의적으로 구별된 백성이 아닌 하나의 거룩한 백성을 뜻하고 있다. 하나님은 물질이나 시간의 일부를 따로 떼어 임의로 그것을 거룩하게 하실 수 있으시나 인간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람은 거룩한 생활, 곧 순종의 생활로 응답해야 한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행동화 되어야 한다(갈 5: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성화의 표라고 말씀하신 안식일의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계명들에 순종하는 충성스러운 생활로 살게하여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시키는 표인 것이다. (43.1)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생활을 살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안식일의 의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와 성화된 생활, 거룩하고 순종하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주인을 부인하는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의 완전한 명사(혹은 개념) 모순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이 자신의 조국에 대하여 충성과 반역의 행동을 동시에 할수 있다는 말과 같다. 성화의 표로서의 안식일의 의미를 이해 하게 될 때 우리는 안식일의 의미와 우리 생활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에 불편을 느낄 것이며 그리하여 안식일의 의미와 우리의 생활이 조화되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것이다. (43.2)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예외없이 가장 분명하고 힘있는 말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아무도 은혜를 떠나 행위로 구원 받을 수는 없다. 누구든지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열매를 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믿는다. 엘렌 화잇의 말처럼 (43.3)
율법을 지킴으로 그 자신의 행위로 거룩하게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불가능을 시도 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리스도 없이 하는 모든 것은 죄와 이기심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4
(43.4)
 바울이 말했듯이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다(갈 5:6).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얻는”(롬 2:13)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 곧 인간의 순종과 충성을 나타내는 표인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다른 계명들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순종심의 진지성에 도전하며 그의 믿음의 확실성을 시험한다. (43.5)
 우리는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에서 주장과 실천 사이의 넓은 간격을 자주 목격한다. 이 간격은 생활의 모든 길에서 나타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순종의 표시 곧 안식일 의미가 망각되어 왔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살펴 보건데 성화 없는 칭의가, 순종 없는 겉치레의 믿음이, 사랑 없는 자복과, 희생없는 사랑이 강조되어 왔다. 디트리히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말한다. (44.1)
값싼 은혜란 회개가 요구되지 않는 용서, 교회의 규율 없는 침례, 자복이 없는 친교, 개인적 자복이 없는 면죄를 가르치는 것이다. 또 값싼 은혜는 제자의 본분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며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를 두고 말한다.5
(44.2)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는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진지성에 대한 하나님의 도전인 것이다. 오늘날은 세상살이가 휴일인 일요일을 중심으로 구조화 되어 있기 때문에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철저하고도 지각적이며 신중한 결정이 요구된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 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믿는다”6 는 주장을 수긍한다. (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