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1. 이름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하나님을 아는 것도 그와 같다. 성호 하나 하나가 조명을 밝혀 주고 그의 성품에 대한 빛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자신을 공개하시는 까닭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사단의 곡해와 사람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정말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이 알게 하시려는 그분의 의도 때문이다. 그 의도는 더 나아가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타락한 상태(시 8:4; 144:3; 눅 15:17, 21)를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변화의 이상(理想)을 받아들여 전향하도록 하는 데 있다. (17.1)
 하나님의 모든 칭호를 한꺼번에 다 연구해서 파악하려는 자는 벽에 부닥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도로 마광(磨光)된 아름다운 다면의 다이아몬드에 햇빛을 세게 비추고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광채가 너무 강하면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오직 번뜩이는 섬광을 볼뿐이다. 그러므로 보석을 잘 보기 위해서는 그늘로 들어가서 빛이 한번에 하나의 단면만 비추도록 하고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는 보석의 단면 몇 개를 검토한 후 그것이 보석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칫하면 각 단면과 보석 전체와의 관계를 망각할 위험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17.2)
 이런 경고의 말은 하나님의 성호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어떤 하나의 성호도 전체를 다 포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어느 일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완전한 초상화는 성령께서 허락하신 모든 성호를 다 연구하여 그 의미를 종합해 볼 때 그려진다. 이처럼 각 성호가 강조하는 빛을 하나하나 합쳐 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의 성품의 찬란한 광채를 어렴풋이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드디어 예수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요 17:6)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사명을 마치실 것이다. 그 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의 영광의 충만(요 1:14)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썩지 않는 육안으로 그를 보는 날이 오기까지 그의 사랑스런 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문뜩 깨닫게 될 것이다(계 22:4). (17.3)
 KJV와 하나님의 이름
 영문 「제임스왕역」(King James Version, KJV)은 원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들 중 몇 가지만을 선택적으로 사용했다. 구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들은 히브리말 구약 성경의 엘로힘('Elohim), ('El) 또는 엘로아('Eloah)(창 1:1; 25:11; 등)를 일괄해서 “God”으로 표기하고, 원문의 야훼(Yahweh)는 “LORD” 또는 “GOD”으로 전부 대문자로 표기하고 있다(창 2:4, 5; 6:5-8, 등). “Lord”—이렇게 첫 글자만 대문자로 쓴 것은 아도나이('Aḏonay)를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창 15:2, 등). 이 세 이름은 성경에 모두 일만 번 이상 나온다. (17.4)
 엘로힘('Elohim), 야훼(Yahweh), 아도나이('Aḏonay), 이 세 이름은 각기 별개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것이 사용된 배경을 살펴볼 때 경건하고 주의 깊은 연구자는 각기 다른 독특한 하나님의 특성을 발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 필요에 그 이름들이 각기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게 된다. 구약에는 이 세 성호의 복합형이 더러 나타난다. 예컨대, 야훼 엘로힘(Yahweh 'Elohim)을 “LORD God”(창 2:4, 5, 7, 8, 등)로, 아도나이 야훼('Aḏonay Yahweh)를 “Lord GOD”으로 옮긴 것이 그런 경우이다(창 15:2; 겔 2:4, 등). (18.1)
 어떤 경우에는 한 절에서 하나님은 엘로힘 으로 불리고, 다음절에서는 야훼 로 불린다. 그 이유는 내용의 배경을 신중히 연구해 보면 알 수 있다. 예컨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언약 체결자인 엘로힘 으로 나타내신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는 야훼 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창조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추가적인 내용이 주어진다. 야훼 는 인간 가족의 드라마가 전개됨에 따라 엘로힘 이 관여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르나 거기에 보완적인 국면에 관계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또 엘로힘야훼창세기 6장에서 노아의 성격을 보는 각도와 지구의 장래를 보는 관점에 반영된다. (18.2)
 처음 성경이 영어로 번역될 때는 학자들이 이런 이름의 차이를 보았으나 별 해설을 남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18세기의 프랑스인 의사 쟝 아스트뤼크(Jean Astruc)는 “두 문서 결합설”이란 가설을 내놓았다. 그것은 창세기가 두 개의 문서를 하나로 합쳐 만든 책이란 이론으로, 한 부분은 엘로힘 신봉자가 쓴 것이라 하여 이를 “E­부분”이라 했고, 다른 부분은 야훼 즉 여호와 경배자가 쓴 것이라 하여 이를 “J­부분”이라 했다. 그의 근본적 이론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한 결과 최근에는 심지어 미국 동부의 어느 명문 대학의 한 학자는 모세의 오경 중 “J­부분”을 쓴 사람은 여자일 것이라는 맹랑한 주장을 내놓은 일이 있다! (18.3)
 이런 얼빠진 가설들을 통해 사단은 아직도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의 연구로 하나님의 본성을 깨달으려는 이들의 노력을 무산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거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를 기도하며 심사 숙고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칭호가 나올 때마다 그 배경에 숨은 개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성령께서 왜 특별히 어떤 칭호를 어떤 경우에 사용하셨는가를 연구해 보면 의미가 확실히 드러난다. (19.1)
 이름들은 삼위의 각 위(位)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한가지 주의를 말해 두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의 칭호들은 삼위의 신격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지 삼위의 각 위에 따로 따로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각 성호의 깊은 뜻은 최종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벽하고 찬란하게 드러났다. (19.2)
 성경의 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를 소중히 여겼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다윗은 찬양하기를 인생의 투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旗)를 세우리라”(시 20:5) 하였다. 지혜의 사람은 적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의 방어가 어디 있는지를 알았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고 그는 원수들을 향해 부르짖었고,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고 주장했다. 시편 기자가 쉴 곳을 찾은 곳이 바로 거기였다. 그래서 그는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리라”(시 9:10) 하였다. (19.3)
 아무리 연구를 깊이 해도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세와 본질을 통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선별해 주신 당신의 여러 이름들을 연구할 때 우리는 점점 커지고 깊어지는 그의 심오한 영광을 분별하게 된다. 본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는 그의 이름의 심오한 뜻을 탐색할 것이다. 이름이 아름다우신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그분 안에 있는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앨프레드 B. 스미쓰(Alfred B. Smith)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4)
 그 이름 비길 데가 어디 있나?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귀하신 이름, 놀라우신 이름, 참되신 이름 우리 주 예수.

 주 예수 이름 내가 생각할 때, 내 마음속에 기쁨 넘치네.

 우리의 소망 구원되신 예수, 그 이름 비길 데 어디 있나?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의 이름들을 올바로 읽을 수 있도록 빛을 허락하옵소서.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