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1. 이름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애인을 처음 사귀던 때를 그대는 기억하는가? 서로 자기의 경험과 기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가슴이 뜨거웠던 때를? 온갖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우정은 서로 친밀히 알 때만 자라난다. 사랑하는 부부가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서로 들려주고 들어줄 때, 행복한 정이 오가고 만족이 있다. 진정한 사귐의 저변에는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런 정과 대화가 있는 법이다. 성경은 부부간의 가까운 관계를 “안다”는 말로 표현하거니와 이 관계는 교회인 신부와 신랑인 주님과의 사이에 있어야 할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는 적절한 예증이라 하겠다. (11.1)
 하나님을 알고 싶고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기를 바라는 이 갈망은 성장하는 성도의 마음속에 자기가 찬양하기를 배우고 있는 그분에 대해 깊이 알고 싶은 열정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욥이 한 것처럼 부르짖는다: “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까?”(욥 23:3). 하늘의 “지혜”를 찾아 헤매는 자는 솔로몬의 권고를 따른다. 하나님의 특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이란 사실을 솔로몬은 깨달았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 5). (11.2)
 성령에 이끌린 사람은 이렇게 신의 본성을 열렬히 탐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본성을 정말 얼마나 깊이 알 수 있는 것일까? 두 살 난 아이가 아버지의 지혜와 기술, 책임과 개성을 얼마나 이해할 것인가? 인간은 영원하신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항상 유아적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한된 이해력을 가진 우리 인간 자녀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때로는 좌절을 느끼신다(사 5:4). 그러나 그는 결코 성령의 노력을 절감시키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 (12.1)
 하나님은 천연계와 영감의 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의 지혜는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는다. 그는 능력으로 방대한 우주를 존재케 했으며 창조 후 지금까지 그것을 유지해 오고 계신다. 그의 임재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이다. 그는 그의 다양한 피조물들의 역할을 관리하시고, 그들의 충성과 경배를 받으신다. 그러나 그가 가지신 목적의 심대한 차원과 그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12.2)
 유한한 피조물은 무한하신 창조자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루시벨(Lucifer)의 반역 사상은 하늘에서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천사들의 제한된 이해를 빌미로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하고 의혹을 불어넣음으로써 천사들의 삼분의 일(계 12:4)을 속일 수 있었다. 바로 그 전략에 따라 그는 의혹과 노골적인 거짓말로 에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성격이 복합적이고 그 집행에 쓰이는 수단이 모호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그것을 기화로 사단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의 성품을 불신하며 그의 섭리를 왜곡하고 그의 목표를 조소한다. (12.3)
 천연계라는 교재를 통한 하나님 발견
 인간의 정신력이 지닌 약점과 단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삶의 모든 국면에서 배제한 결과로 일어난 이해력의 둔화(鈍化)를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남녀들이 제한된 이해력으로 가능한 한 당신의 계획을 보다 빠르고 선명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신다. 이 일을 위해 그는 자신을 두 가지 방법으로 계시하신다. 첫째는 그 손으로 하신 일을 통해, 둘째는 당신께서 주신 영감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13.1)
 그래서 “천연의 책”을 읽은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시 19:1, 2).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이렇게 말한 그의 깊은 통찰을 음미해 보라. 많은 사람은 실제로 그 “언어”“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나 하나님은 당신께서 친히 지으신 만물을 통해 당신께 귀를 기울이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부단히 자기에 관해 말씀하신다. (13.2)
 현미경을 통해 천연계를 조사해 보면 하늘 공장(工匠)의 다정하고 꼼꼼한 솜씨를 보게 되고,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내다보면 하늘 기사(技士)의 엄청난 능력과 수학적 정밀(精密)을 보게 된다. 그는 무제한의 우주 공간을 선회하는 그 무수한 천체들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치 웅장한 궤도에 따라 광년(光年) 단위로 측정되는 엄청난 거리를 일초의 오차도 없이 운영하고 유지하신다. 천연의 책을 통해 창조자를 배울 때, 우리는 그의 통할(統轄)과 고안(考案)의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13.3)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만나 뵙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에너지나 정밀을 훨씬 능가하는 분이시다. 인간 가족들에게 그의 인격의 여러 국면을 알리시기 위해 그는 영감의 글을 주셨다. 이 두 번째 책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신격을 타락하고 실수하는 유한한 인간을 상대로 약 500이 넘는 이야기와 수백 가지의 교훈과 예언을 말씀하고 계신다. 각 구절과 이야기에서, 각 예언과 비유에서, 그리고 온갖 형태의 의식과 절차에서 우리는 그분의 본성의 다양한 면모를 보게 된다. (13.4)
 그러나 그의 성품을 어느 때보다도 가장 완벽하게 나타내는 과업을 하나님은 성육신(成肉身)하신 말씀인 예수를 위해 유보하셨다. 바울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이 엄청난 진리를 말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 1:1, 2). 헬라어 원문에는 이 “아들”이란 말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헬라어에서는 정관사가 없으면 질(質)을 강조하고, 있으면 신분을 강조한다. 여기 성령께서 관사를 쓰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질, 즉 그 특성을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예수는 탄생 후 죽을 때까지 아버지께 대해 진실로 참된 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셨다. 그의 모든 행적과 말씀은 오로지 하나님의 성품을 온 우주에 펼쳐 보이시기 위한 것이었다. (14.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대변자이심을 강조하셨고, 요한에게는 “알파와 오메가”임을 나타내셨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알파와 오메가”란 관용구는 사실상 알파벳의 모든 글자를 다 일컫는 말이다. 알파벳의 모든 글자를 활용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상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알파벳이다. 예수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시고, 인간 자녀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의 계획을 공개하신다. 명료하게 보여진 그의 삶의 토막 토막을 통해 구세주는 하늘의 기별을 분명히 발표하셨다. 그것이 그의 “말씀”이었고 구원의 복음이었으니 거기엔 추호도 한계성이나 착오가 없었다. 그는 영원한 로고스, 육신이 된 말씀이시며, 그가 하신 말씀으로 공개된 실체이시다. (14.2)
 대제사장으로 하신 그의 기도에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언명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3, 4, 6). 그가 맡은 책임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인류와 온 우주에 알림으로써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에 포함된 모든 것을 나타냄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셨다. (14.3)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했다
 옛날 하나님은 미디안의 한 목자에게 당신의 영광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다. 당신의 성품을 알고 싶다고 기도한 모세에게 그는 약속하시기를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출 33:17-19)고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계시를 위해 완벽한 환경을 준비하셨다.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1-23). 이것은 행동으로 보이신 상징적 이야기로서, 인류가 타락하여 이해력에 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구원의 지식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말해 준다. (15.1)
 상황 : 계시의 장소는 하나님 곁이다. 이 이야기의 깊은 뜻을 깨닫는 비밀은 갈라진 바위틈에 숨어 있다. 환상을 보는 렌즈는 못 자국난 손이다. 사람은 오직 그의 손을 꿰뚫었던 못 자국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모세가 명령대로 순종하자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셨다(출 34:5-7). 그 때 모세는 “즉시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8절). 환상은 찬양의 서곡이며, 하나님의 이름들은 계시의 수레 구실을 한다. (15.2)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께서 이 계시를 보이시는 이유를 설명하셨다: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 너를 앎이니라”(출 33:17). 오늘날도 그와 같이 주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자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어야 한다. 그들은 날마다 주의 본성이 공개되는 대로 그 성품을 귀하게 여기고 받아들여 그것으로 성장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온유한 제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이름이 하나님께 알려지는바 된다. 지적인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구변이 능해도 소용없다. 오직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서 깊은 비밀을 찾아 마음에 깨달음을 줄 때 비로소 사람은 그의 영광스런 이름의 뜻을 분별하게 된다.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바로 그 깨달음을 주시옵소서. (15.3)
 하나님의 이름을 찾기 위한 성경 탐사
 모세의 오경과 그 밖의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수백 개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각 성호는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성품의 국면을 공개하며, 달리는 불가사의한 그의 성격을 상세히 알게 해 준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하는지 평범한 비유를 들어 그 목적을 설명해 보자.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한 낯선 사람을 소개한다 치자. 그는 어딘가 색다른 사람이다. 우선 그는 미국 사람이라고 소개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 대해 조금 알게 된다. 또 그는 아버지와 남편이며 직업은 은행원이며 취미는 아마추어 정원사, 사진사, 그리고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집사이며 어느 자선 단체의 회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새로운 칭호가 하나하나 추가될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가. 그러나 실은 우리가 그 사람과 함께 한 지붕 아래서 한동안 살아보고, 그 집 아이들의 행동을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