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이가 고등학교 연회에 참석하는 여자 친구에게 꽃 장식을 사주기 위해 꽃 가게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은 진열대에 있는 데이지와 난초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애정과 호주머니 사정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자전거를 탈 돈을 남겨 놓고 싶었다. (388.1)
 꽃 가게 주인이 청년의 결심을 거들었다. 잠시 후 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게 청년, 그 여자 친구는 청년에게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소?” (388.2)
 그 청년이 말없이 난초 꽃을 사들고 꽃 가게를 나가자. 가게 주인은 그저 왠일인가 하고 궁금히 여길 뿐이었다. (388.3)
 하나님은 얼마나 귀중한 분이신가?
 하나님은 당신에게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세 천사의 기별(계 14:6~12)에서 이미 보았듯이 대쟁투의 최후 순간에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는,하나님과 어린 양을 경배하느냐 아니면 짐승을 경배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배”라는 것은 우리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인 것이다. (388.4)
 우리는 요한계시록 4장5장에서 우리가 우주 관제탑이라고 명명했던바, 하늘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열린 문을 통해 들여다 보았다. (388.5)
 우리는 그 곳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우리는 노래, 너무나 행복한 노래들을 들었다. 생물들과 장로들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라고 노래하였다. (389.1)
 천천 만만의 천사들도 장로들과 생물들에 합세하여 다른 노래를 불렀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389.2)
 경배는 기쁜 찬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어린 양을 경배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는 경배,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들과 현재하고 계시는 일들을 인해 감사를 드리는 경배, 곧 그분들이 소중한 분임을 찬양하는 경배라야 한다. (389.3)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389.4)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짐승의 경배자들과 대적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온갖 힘이 필요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쁘게 기억할 때,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길 것이다. (389.5)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389.6)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사자 굴의 위협을 당했을 때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단 6:10)였다. 우리가 마지막에 바벨론의 짐승의 위협에 직면할 때에도 하나님께 찬양으로 경배한다면 기필코 하나님이 그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지켜 주실 것이다. (389.7)
 

데이지를 살까 난초를 살까? 그녀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예수님은 얼마나 가치가 있으신 분이신가?
(389.8)
 우리는 바로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으로 감사하는 생활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니엘은 갑작스레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전부터” 그렇게 해 왔던 것이다. 지금 오늘, 내일의 생활 속에서 봉착하는 일반적인 시련을 통해 우리는 마지막 위기를 위한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390.1)
 지출이 너무 많을 때, 직장 상사가 까다롭게 굴 때, 배우자나 부모가 참기 어렵게 할때,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직도 살아 계시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나 지금은 우리를 위해 살아 계신다(히 7:25)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벧전 5:7)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또 하늘의 능력과 사랑을 이 순간의 필요에 당장 이용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390.2)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과 어린 양에 대해 아는 바를 기쁨이 넘치는 찬양으로 응답하는 경배인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기 때문이다. (390.3)
 이와 같이 경배는 기쁨 어린 찬양이다. 그러나 경배는 또 다른 의미도 지니고 있다. (390.4)
 수년 전 어느 아침에 그리스도교 선교사 한 사람이 갠지즈 강변을 걷다가 한 힌두교 여인의 옆을 스쳐 지났다. 이 여인은 강변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여자 아기를 품에 안고 앞뒤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귀엽게 생긴 남자 아이가 놀고 있었다. (3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