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가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여인은 비탄 속에 잠겨 있었다. 품에 안긴 아기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인생의 윤회(輪廻)를 가르치고 있다. 이 여인은 그녀가 전생에 지은 죄가, 또는 그녀의 어린 딸이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서 아이가 질병에 걸린 것으로 알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390.6)
 선교사는 여러 말로 그 여인을 위로했으나 그 여인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또 이해할 수도 없었다. (390.7)
 저녁 무렵에 선교사는 갔던 길을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잠시 아침에 만났던 힌두교 여인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자세로 여자 아기를 안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여인은 이제 전보다 좀 더 지쳐있었다. 아침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린 사내아이가 종적을 감추었을 뿐이다. (390.8)
 선교사는 속으로 웬일일까 하고 의아히 여겼다. 그는 그 여인에게 인사를 하고 아들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 보았다. (390.9)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나의 신(神)을 위해 희생 제물로 갠지즈 강에 바쳤답니다”하고 대답했다. (390.10)
 그 말은 사실이었다. 순간 선교사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름이 끼치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여보세요, 아기 엄마, 당신의 여자 아이는 지금 죽어가고 있읍니다. 또 인도에서는 여자 아이를 천하게 취급합니다.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면 왜 차라리 병든 여자 아이를 갠지즈 강에 바치지 않았읍니까?” 그 가련한 여인은 한참 선교사를 올려다보더니 경멸하는 태도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신사 분이시여 나의 신들은 나의 최상의 제사를 받아야 할 만큼 소중하답니다.” (390.11)
 그렇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우리의 최상의 응답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귀중한 분이시다. (390.12)
 확실히 어린 양은, 우리들에게 전부와도 같은 귀중한 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제물로 바치신 분이시다. (390.13)
 그는 하늘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셔서 오해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겟세마네 동산의 고통과 갈바리의 고난을 겪으셨다. (391.1)
 어린 양을 아는 것은 어린 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전부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391.2)
 경배는 사랑의 순종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고 하셨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누구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고 필요한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그가 부탁한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391.3)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요구하신다 .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 (391.4)
 계명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391.5)
 계명의 말씀은 말하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고 한다. 사람들에게 거짓말도, 험담도 하지 말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해가 되는 길로 이끌지 말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만인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정직하게 대하여야 한다. (391.6)
 “간음하지 말라”(출 20:14). 결혼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성행위를 갖지 말라.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마 5:28). 하나님이 우리의 배우자를 창조하셨고 그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가 그에게 진실하고 친절하기를 바라신다. 이것을 명심하라. (391.7)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물질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살지라도 탐내지 말라. 오히려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유를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나님은 부자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빈민가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도 똑같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391.8)
 “네 마음을...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 화난 태도로 또는 가벼운 농담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 말라. 화가 치밀어서 사랑의 하나님에게 누구를 “저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391.9)
 그러나 이런 것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이다 . 중동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거의 매일같이 모슬렘들을 살해하고 있다. 서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일부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서로 쌍방에게 테러 행위를 일삼고 있다. 미국에서는 일부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흑인 교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일부 흑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 때문에 백인들을 증오하고 있다.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다. (391.1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매주일 특별한 방식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39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