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하신 성령님 제 8장 재림교회의 성령 이해 III. 성령 교리의 역사에서 얻는 교훈
 1. 교리적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짐
 마치 어린 아이가 하루아침에 어른으로 성숙하는 것이 아니듯이, 재림교회의 삼위일체 이해의 역사는 신학의 발전도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재림교회가 삼위일체의 교리를 정립하는데 50년 이상이 걸렸다.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이들은 이러한 재림교회 신학의 발전적이고 교정적인 속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재림교회의 초창기의 전통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216.1)
 그러나 재림교회의 신학은 언제나 그리고 전적으로 성경에 의존하려고 노력해왔다. 과거의 전통이 성경과 일치할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성경과 다를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 어떤 과거의 전통도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어떤 전통이라도 결코 성경을 대신하거나 성경보다 더 큰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준 삼아야 할 유일한 전통은 교단의 과거 전통이 아니라 재림교인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216.2)
 2. 삼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구원에 필수임
 기독교 역사를 통해 증명된 사실은 유대교, 이슬람,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삼위일체를 믿지 않던 초창기 재림교도들 등, 반 삼위일체 신앙전통은 “언제나 율법주의적 구원관으로 떨어지게 된다”80)는 것이다. (217.1)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에 전적으로 기초되어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은혜의 교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지 못하기에 죄인이 선하고 순종적이 될 때에만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217.2)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주어진 1888년 이후에,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영원한 신성을 인정해야 함을 인식하면서 반 삼위일체적 견해를 떠나서 삼위일체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주목할만하다. (217.3)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참 종교의 핵심과 본질”일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총체”81)이다. 이 교리는 “기독교를 신적 존재 내의 구별을 부인하는 유대교와 하나님의 단일성을 거부하는 이교로부터 원칙적으로 구별시키는 기독교의 핵심이다.”82)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전 구원의 주된 원천”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구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83) (218.1)
 이와 같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전 구속 계시의 핵심”진리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며, 모든 특별계시를 내던져버리는 것이다.”84) (218.2)
 1888년, 엘렌 화잇은 이미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증언을 하였다. “또 한 가지 위험한 오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교리 ...이다... 그것은 우리 구주께서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 당신의 신격(神格), 당신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견해이다. 그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런 사상은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을 설복시키는 것 역시 어렵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영감적인 성경의 증언을 부인할 것 같으면 그 점에 대하여 그들과 토론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218.3)
 “왜냐하면 아무리 단호한 이론일지라도 그것이 그들을 설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오류를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분의 사명, 그리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하여 올바른 관념을 가질 수 없다.”85) (218.4)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오류이다. 또한 성령의 신성과 개성을 부인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게 만든다.”86) 왜냐하면 성경에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2:31, 32).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중보하시는 동안(히 7:17-8:2), 성령께서는 이 땅에서 “또 다른 보혜사”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롬 8:26, 27). (218.5)
 실제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와 중보의 은혜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전 12:3).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상실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실재를 상실하게 만든다.”87)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이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임을 확신할수 있다. (218.6)
 3. 재림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문제에 대안을 제시함
 엘렌 화잇의 명백한 진술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끌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성경을 탐구하도록 백성들을 격려하였으며 적절한 때에 신학적, 교리적 통찰을 제공하였다. 특별히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같이 철학적, 사변적 접근이 아니라, 상호 관계적인 차원으로 이해한 그녀의 진술은 신학적으로도 큰 공헌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가톨릭 신학자인 카를 라너(Karl Rahner)도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회의 삶과의 구체적 연관성을 잃어버리고 비실제적인 교리가 되었다고 비판한다.88) (220.1)
 그런데 엘렌 화잇은 삼위 하나님은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89) 하나이시라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관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만약 삼위일체를 이처럼 상호 관계적인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는 말씀은 “단지 서술적일 뿐만 아니라 정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90) 또한 그 사랑은 상호 무아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면 삼위 하나님은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분이 복수(複數)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가 없는 것이다.91) (220.2)
 상호 무아적인 사랑 가운데서 삼위 하나님은 자신보다 다른 존재들을 더 사랑하신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보다 훨씬 적은 빈도로 구약(88회)92)과 신약(325회)93)에 나오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분은 자신을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로 나타내시며, 자신의 사명을 성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내신다.94) 그래서 스위트(H. B. Swete)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second Self)라고 결론지었다.95) 이처럼 자신을 철저히 감추시고 오직 성부와 성자를 드러내시는 성령의 모습은 삼위 안에 있는 무아의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21.1)
 또한 성자도 언제나 성부를 높이고 성령을 의지하신다.96)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시고(빌 2:5-8),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복종하셨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아버지를 온전히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7). 이러한 성자의 모습 역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무아의 사랑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도 성자와 성령을 의지하고 높이신다.97) 이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성경의 증언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해 볼 때, 성부 역시 성자와 성령을 무아적으로 사랑하셨음을 확신할 수 있다. (222.1)
 그래서 갈리(Norman R. Gulley)는 “타락하지 않은 지성적 존재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상상한다”98)고 말한다. 이것은 이기적인 사탄의 정신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품성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은 삼위 하나님 안에 나타난 무아의 사랑과 교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며,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인류 공동체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223.1)
 4. 삼위일체 신앙은 실천적인 의미를 가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