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8부 거룩한 삶에 예수님과 함께 (모든 충만함 안의 자유) 38. 붉은 암송아지 (나의 모든 첩촉은 그리스도의 것임)
 접촉에 의한 오염
 하나님의 규정은 시체나 뼈나 무덤이든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의 죽음의 결과와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것 때문에 부정하게 되었다고 명기한다.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로 말미암았으므로, 죽음은 죄를 상징한다. 사도는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회심 전에는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죄로 죽었”(엡 2:1; 4:17~19)었다고 상기시켰다. 성경에서 “죄에 의하여 부패된 영혼은 부패 상태에 있는 사체의 표상으로 대표되어 있다. 의식법에서 명하는 모든 씻음과 피뿌림은, 죄와 불법으로 죽은 영혼의 정결을 위한 속마음에서의 재창조 과업의 필요성과 성결케 하는 능력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비유화된 교훈들이다”(4BC, 1176). (486.2)
 사도 바울은 그가 본성적으로 더럽혀진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에게 달라붙어 그를 잠식하는 더러움의 “사망의 몸”으로부터 놓여 나기를 갈망하였다(롬 7:24). 그의 암시는 그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끔찍한 로마식 사형 집행의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시체에 쇠사슬로 묶어진 죄수는 그것과 함께 서서히 부패되어 갔다. 여기 “무자비하고 오만한 사람, 가학성애자이며 야만적인 ∙∙∙ ” 메제타우스(Mezentius)왕의 명령에 의한 메스껍고 무서운 죽음의 형벌을 라틴 시인 비질(Virgi)이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에게 붙들어 매고, 손을 함께 가죽끈으로 잡아매고 얼굴을 마주 대하여 묶고 그 긴 죽음의 쓰레기와 더러움을 껴안은 채 서서히 서서히 죽게 했다”(The Aeneid of Virgin, tr. Rolfe Humphries, 196). 어느 누구도 위로부터 오는 능력 없이 그 자신의 부패한 본성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이미 주검과의 접촉으로 오염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으로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람도 역시 더럽혀졌다. (486.3)
 이 “주검”과의 접촉을 통한 오염은 인생의 비극적 상태에 대한 우화이다. 그 과정은 부주의한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분리되어 살기로 선택한 그의 동료들로부터 알아 차릴 수 없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저성 철학들과 사고 방식, 표현, 농담, 습관, 생활 방식을 참으로 흡수해들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일단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차적으로 그들의 농담에 웃고, 그들의 음악을 즐기고, 그들이 읽는 책과 그들이 보는 쇼들을 인정하는 태도로 논하고, 그들의 축제와 파티에 열심으로 참석하고, 그 다음엔 비판력 없이 그들과 결혼하여 가족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지금, “죽은 자”와의 접촉을 통하여 치명적으로 더럽혀진다. (486.4)
 나쁜 감화의 힘
 삼손과 솔로몬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나쁜 친구들의 영향을 통하여 발생하는 품성의 점진적인 타락을 예시(例示)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제에 스스로 들어가는 자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그 동료들의 습관과 풍습을 따라 행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이와같이 소비된 시간은 낭비라고 하기보다 악용이다. 원칙이란 성채를 무너뜨리고 영혼의 요새를 약하게 하는 경향의 사상이 환대를 받고 대화가 교환된다”(부조와 선지자, 563). 그리고 한번 부패되어진 후에는 오염된 사람이 만진 모든 것은 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오염된다(학 2:13, 14). (486.5)
 소위 “성결의 법전”으로 일컬어지는 레위기 법—사실은 죄됨을 묘사하고 있다—은 성화를 향해 순례자들이 가는 길에 잠재적 오염이 도사리고 있는 악한 행위의 6가지 분야를 기술한다.

 (1) 지나치고 왜곡된 먹고 마심(레 11:1~47, 17:1~16),

 (2) 혼외 정사와 하나님의 법 밖에서의 결혼(레 12:1~8; 15:1~33; 18:1~30; 20:10~21),

 (3) 사람과 재물에 대한 침략적인 행위(레 24:17~23),

 (4) 하늘에 대한 불경과 신성 모독(레 19:1~37; 20:1~9),

 (5) 사람과 하나님과의 계약 위반(레 25:23~55), 그리고

 (6) 하나님으로부터의 배도와 그 분을 섬기기를 소홀히 하는 것(레 26:1~46; 27:1~34)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분의 도덕법이 죄를 규정하고 죄인을 부정하다고 선고한 후에, 그 문제를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분의 의식법을 통하여 그분은 겸손히 그것들을 사용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위하여 구체적이고 적당한 치료책을 마련하셨고, 그것들을 통하여 죄인을 구세주에게로 인도하셨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시체와의 접촉으로 기인된 부정을 씻는 특별한 정결케 하는 특효 약제였다. (487.1)
 성령께서 영혼을 정결케 하기 위해 일하시는 방법
 성령께서는 그들의 생애에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분야들을 지적하심으로써 죄인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신다. 그분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사람의 영혼 안에서 그 일을 하시는데, 그가 변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특정 분야를 점진적으로 알게 하신다. 그 다음 그분은 참회하도록 만드신 그 사람들을, 용서를 얻기 위해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한다. 예를 들면, 선지자 나단은 다윗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었고, 성령은 왕의 양심을 일깨워 이렇게 기도하게 하셨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우슬초로 정결케 된다고 하는 다윗의 언급은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수행된 의식의 의미를 그가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487.2)
 그것이 죄인을 그의 부정으로부터 분리시켰기 때문에, 이 의식은 “분리의 물”의 적용으로 알려졌다. 수세기 후에 사도 바울의 한 질문, 즉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라”에 대한 답을 알고, 다윗왕은 정결함과 거룩함의 근원으로 돌아갔다. 바울은 이 의식의 중대한 의미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정결케 하는 능력을 지적하였다(히 9:11~15). 예수님은 골고다 위에서 로마의 창에 의해 열려진 정결의 샘, 즉 붉은 암송아지의 실체이시다. (487.3)
 “정결”한 사람은 누구나 하늘의 치료제를 적용할 수 있다
 고대 규정들은 재를 관리할 “정결한 사람”을 그가 아는 사람 중에서 찾도록 회개자에게 지시하였다. 랍비들은 예수께서 그의 왕국의 이상적인 신민으로 묘사하실 때 만족하시면서 가리키신 그런 연령 층의 순진 무구한 젊은이가 선택되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Parah, 3:3). (487.4)
 사도는 영적인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라고 충고하고, 참된 온유와 사랑의 정신으로 회개자를 완전한 교제에로 회복시키라고 촉구하였다(고후 2:4~11고전 5:1, 4~11의 결론이다. 갈 6:1, 2과 비교). 랍비들은 “속죄제의 물을 섞는 자는 그의 신을 신지 못할 수도 있다”(Parah, 8:1; 출 3:5과 비교)고 회고한다. (488.1)
 선택된 자원자는 샘은 찾기 위해 회개한 죄인을 데리고 시골로 갔다. 거기서 “생수”를 질그릇에 가득 채웠다(민 19:17, 18). 그는 그릇에 담긴 액체의 표면에 엷은 먼지막이 형성될 만큼 암송아지 재를 뿌렸다. 그 후에 그 두 사람은 정결케 해 달라고 요구하는 가족의 집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붉은색 리본 혹은 백향목 가지에 줄로 묶인 우슬초 세 가지(Parah, 11:9)는 뿌림을 위한 도구의 형태를 갖추었다. 주지한 바와 같이 이와 유사한 도구가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 의식에서 그것은 정결케 될 대상에게 액체를 뿌리기 위하여 물과 재의 혼합물에 담그어졌다. 이것은 일곱 번 반복되었는데 “회개하는 죄인을 위하여 성취되어져야만 하는 사업의 철저성”(4T, 122)을 강조하기 위해 첫째날, 셋째날, 일곱째날에 그렇게 했다. (488.2)
 어떻게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적용되었는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라. 기대감을 가지고 주위에 모여든 권속들과 함께, 뿌리는 일을 하도록 선발된 사람이 거실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깨끗게 하는 물과 재를 그 곳에 거주하는 자들이 여가를 보내던 주변의 소유물들을 대표하는 가구, 책, 잡지, 악기들과, 그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들” 위에 조심스럽게 떨어뜨린다. 모든 것이 반드시 정결케 되어야 한다. (488.3)
 그 다음 그는 식사하는 지역으로 가서 질서 있게 식품과 음료가 저장된 곳 위에 그것의 일부를 던졌다. 그것은 거주자들의 매일의 식사 습관을 나타내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준비하는 자양분의 전형(典型)이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 10:31)고 촉구할 때 이것을 염두에 두었는가? (488.4)
 침실로 나아가면서 그는 장의 옷을 위하여 똑같은 절차를 수행하였다. 옷은 권속들의 외적 행위에 대한 행동의 상징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게으름과 정욕을 뜻할 뿐 아니라(잠 26:24; 겔 23:17) 결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히 13:4; 창 41:4) “침소” 위에 정결케 하는 물을 뿌렸다.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 음행을 피하라”(고전 6:15~18)고 이것에 대해 논평한 것은 당연하다. (488.5)
 집안의 모든 물건과 가족의 각 사람이 철저하게, 반복해서 뿌림을 받은 후에, 호주는 그의 집 문 위에 “나는 내 것이 아니로소이다 주여 나는 당신의 것이나이다”는 명각(銘刻)을 달았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었다고 공언하는 자들도 이와같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옛날 못지않게 지금도 엄격하시다”(4T, 122). (488.6)
 붉은 암송아지는 그리스도의 예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