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8부 거룩한 삶에 예수님과 함께 (모든 충만함 안의 자유) 38. 붉은 암송아지 (나의 모든 첩촉은 그리스도의 것임)
 죽임당할 장소로 끌려가는 동안에 암송아지는 굴레에 묶이우고 처음으로 사람 즉, 제사장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이것은 스스로를 자제하시는 희생 제물이시자 제사장이신 구세주를 묘사한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의 밤으로 의도적으로, 결연하게 자발적으로 들어가셨을 때,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시대의 소망, 329와 비교)라고 노래하셨으며, 그 후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시는 철저한 자아 복종을 확인하셨다. (483.1)
 소를 묶고 강제로 죽음의 장소로 이끄는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은,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었고 얼마 동안 진중에서 추방당하였다. 이것이 죄인과 동일시되고 세상의 죄악을 떠맡고, 묶이고 영문 밖으로 끌려가고, 그분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마귀와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구세주—제사장을 나타냈는가? 성전 예배 시대 동안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그의 봉사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감람산 기슭의 실로암 못에서 “침례”를 받아야만 했다(Parah, 3:7). 그 곳은 인류의 정결을 확보하기 위하여, 죽게 된 고민으로 투쟁하시던 때에, 하늘 성소의 제사장이신 예수께서 피와 눈물의 마지막 “침례”를 견디신 것은 이 장소와 가까웠다(막 10:38). (483.2)
 랍비들은 두번째 성전의 건립 이후 수세기 동안 암송아지의 화장용 장작을 쌓아 놓은 장소는 감람산의 꼭대기였다고 기억한다. 그 곳에 무화과나무 장작을 피라미드 식으로 쌓아 동굴 형태로 만들어 “창문”이나 공기 구멍을 만들었다(Parah, 3:8). 이 안으로 짐승을 뒷 걸음으로 들여보내고, 묶고 그의 얼굴이 성소 쪽을 향하여 놓여졌다. 그리고 그것은 제사장에 의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도살되었다. 순백의 옷을 입은 제사장이 그의 손을 흘러 쏟아지는 피에 집어 넣고 그의 손가락으로 일곱번 “지성소를 향하여 뿌렸는데, 매 번 담갔다가 뿌렸다. 그 일을 마친 후 그는 그의 손을 암송아지의 몸에 닦았다. ∙∙∙ 그리고 마른 종려나무로 불을 붙였다”(Parah, 3:9). (483.3)
 대속은 충분하고 완전함
 일곱번 피뿌림은 구세주의 대속의 철저함과 완전함에 주의를 환기시켰다(사도행적, 585). 반면에 제사장의 “손가락”은 속죄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나타낸다(“손가락”“성령”을 나타낸 경우를 보려면 마 12:28눅 11:20을 비교하라). 하나님의 손가락은 시내산에서 두 돌비에 십계명을 새기었고, 거의 천년 후에, 벨사살의 연회당 벽에 바벨론의 운명을 기록하였다. “손가락”의 활동은 팀을 이루어 하는 사업을 예측케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히 9:14) 그분 자신을 아버지께 위탁하셨기 때문이다. (483.4)
 암송아지의 화장용 장작은 마른 종려나무 잎으로 불붙여졌다. 이 승리와 충성된 지지의 징표들은 1주일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추잡한 저주로 전락해 버린, 종려 일요일의 “호산나” 외침의 아이러니한 예고였던가? (483.5)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사용될 수 있었지만, 무화과나무는 희생물을 사르는 일에 선호되었다. 그것이 멸망받을 문명인 유대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약에서의 행동화된 비유에서 그러했듯이, 이 구약의 의식에서 이것은 인간의 열매 없는 위선을 상징하지 않았을까? 배은 망덕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태우기 위해 저주받은 불성실의 “무화과나무”(마 21:19, 20)에 여전히 불을 붙이고 있다. (484.1)
 희생은 하늘에 기록됨
 우리가 인지한 것처럼, 바울은 피가 성소 안으로 가져간 바 된 속죄 제물들의 몸이 이스라엘 진영의 밖에서 불태워졌다고 히브리인들에게 상기시켰다(히 13:11, 12). 암송아지가 성벽 너머에서 불태워졌으므로 지성소를 향한 피뿌림은 하나님에 의해 실제적으로 그분이 계신 곳으로 전달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예배자들은 감람산 정상에서 제사장이 피를 손가락으로 날리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의 믿음은 그것이 기드론 골짜기를 넘어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믿도록 그들을 인도하였다. 바로 그 장소에서 제자들은 암송아지의 원형인 예수께서 인간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로 승천하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의 존전으로 들어가시는 그분을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었다. 그들의 확신은 주님의 약속의 성취인 성령의 선물에 의해 오순절날에 보상받았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인간의 속죄 희생 제물과 중보의 제사장으로 취임하셨다는 것을 나타냈다”(사도행적, 39). (484.2)
 암송아지를 태워 버리는 화장용 장작 속으로 제사장은 희생의 의미를 높이기 위해 세 가지 중요한 상징적 물건을 던져 넣었다. 이것들은 작은 백향목 가지와 우슬초 세 가지, 그리고 붉은 빛 양모 한 줄로 구성되어 있다. 제왕다운 백향 목은 예수님의 위엄과 인내의 상징이며, 비천한 우슬초는 그분의 낮음과 깨끗게 하는 기술을 가리키며, 붉은색 줄은 그분의 하나님 아들되심과 인류를 위해 버리신 생명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자격들을 구세주께서는 갈바리에서 생생하게 드러내 보이셨다(두 마리 염소에 관한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것을 세부적으로 숙고하게 될 것이다). (484.3)
 재가 준비됨
 불이 그 임무를 다했다는 증거인, 붉은 암송아지를 태우면서 생기는 연기가 감람산 꼭대기에서 사라진 후에, 재는 정결한 사람이 거두어 모았다. 내 마음은 이 행위에서 아리마대 요셉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가? 이 차가운 타다 남은 것들은 가루가 되도록 돌망치로 쳤으며, 완전히 분말이 될 때까지 12번 체로 치고, 마지막으로 일곱 부분으로 일곱 번 나뉘었다(Parah, 3:11). 한 부분은 성소에 보관되고 다른 부분들은 6개의 도피성을 포함한 48개의 전략적으로 위치된 레위인들의 성읍에 분배되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이렇게 준비된 것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심하였으며, 하늘이 그들을 정결케 할 수단을 준비해 주신 것을 기뻐하였다. (484.4)
 재들은 가끔 방부성 작용제로 쓰였다. 소홀히 처리된 쓰레기나 오물은 위험해 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때때로(사람의 거주지 주변에서)가끔 볼 수 있는 태만함과 무모함은 역겨우며, 그것들이 건강에 미치는 결과에 대한 무지는 놀라울 만하다. 그러한 장소는, 특별히 여름에, 석회나 재 혹은 흙으로 매일 덮음으로 정결케 되어야 한다”(CH, 63). (484.5)
 정결케 하는 재의 문자적 사용과 오염에서 깨끗게 하는 그들의 영적 역할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단 한 걸음 사이였다. (485.1)
 우리가 놋단을 연구할 때 주지했다시피 희생을 불사른 후 제거된 재는 많은 부정적인 면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성막에서 진 밖의 장소로 옮겨져야 하였다. 그러나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조심스럽게 보관되어야 했다. 그것을 묘사한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표현은 “죄의 불 사름의 재”였다(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는 죄로도 번역된다. 민 19:9, 13, 17, dust, 하단, 20, 21). 이것은 그들이 속죄제와 똑같은 가치를 가졌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흐르는 물과 함께 섞일 때 죄를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민 19:9, 17; 슥 13:1과 비교). 좌를 뜻하는 단어 하타트(Chattáth)는 발의 미끄러짐이나 걸려 넘어짐을 뜻한다(잠 13:6; 19:2). 또한 그 재는 범죄자의 집이나 장막을 정결케 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민 19:14~17). (485.2)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의식의 의미를 지적하였다. “만일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은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3, 14). 레위기 법에 사용된 언어의 메아리를 주목하라. 갈바리 희생의 목표인 “재”나,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된 불에 의해 남겨진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의 최종 결과는 지금 죄로부터 완전한 정결 그리고 주검과의 접촉으로 부정해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과 그의 회중과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는 일을 가능케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에서 이 재는 “흐르는 물”에 의해 오염된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은 성령의 상징이다(요 7:37~39).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정결케 하는 피는 영원하신 성령에 의하여 그의 오염에 접촉되어진다(히 9:13, 14). (485.3)
 붉은 암송아지 의식의 의미는 아직도 적용됨
 엘렌 화잇은 우리에게 주의와 도전을 남기셨다. “어떤 이들은 이 암송아지 잡는 일을 무의미한 예식으로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행해졌고, 따라서 현재까지도 그것의 적용이 상실되지 아니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4T, 122).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영원하신 성령이여,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이 “깊은 의미”를 이해하도록 우리 눈을 밝혀 주소서. (485.4)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도피성”이요. “그분의 은혜의 보화 진열장”이다(사도 행적, 11). “재”“다 이루었다”라고 의기 양양하게 선포하고, 쇠퇴의 접촉이 영원히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으며, 정결케 하기 위해 언제나 가까이에 있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묘사한다. 성경에서 재는 인간의 무가치함, 수치스러움과 허물에 대한 슬픔 뿐 인간의 뉘우침, 자기 비하, 그리고 죄에 대한 애통에 관심을 촉구하는 데도 사용되어져 왔다(창 18:27; 에 4:1; 욘 3:6). 재는 예수께서 절대적으로 극한까지 고통당하셨다고 선포한다. (485.5)
 지금 두 가지 질문을 고찰해 보자.

 1) 주검과의 접촉에 의해 오염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2) 어떤 상황에서 이 재들이 그처럼 오염된 자들을 깨끗게 하는 데 사용되어졌는가? (4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