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히브리서의 이슈들 제32장 히브리서 9, 10장의 속죄일-제2부
 • 출애굽기 24:8에서는 모세가 “[보라],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이는 언약의 피라.”(20절)라고 말한다. (391.3)
 • 히브리서는 모세가 두루마리와 백성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19, 21절) 피를 뿌렸다고 한다. 하지만 출애굽기는 백성과 제단에만 피를 뿌렸다고 언급한다(6, 8절). (391.4)
 • 출애굽기 40:9, 10;레위기 8:10, 11;민수기 7:1은 모두 모세가 성소를 성별하는 의식의 일부로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기름을 발랐다고 말한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언약의 비준 의식과 성소의 성별 의식을 합쳐서 묘사한 것이다. (391.5)
 • 히브리서는 모세가 성소와 그 기물들을 성별하기 위하여 피를 사용했다고 말하지만 출애굽기(40:9, 10)와 레위기(8:10, 11)의 이야기에서는 모세가 기름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391.6)
 왜 히브리서에 나오는 언약의 비준 기사와 구약의 기사들 사이에 이처럼 상당한 차이가 있을까? 왜 히브리서 저자는 언약의 비준을 위한 의식과 성소의 성별 의식을 병합하였을까? 코르테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 히브리서의 논증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것들은 하늘 성소의 성별(9:23)과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제사장으로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의 개통(10:19-23)을 포괄하는 복합적인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게 해준다.”3) (391.7)
 요점은 이렇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구약의 의식들을 반드시 하나하나 자세하게 분석해 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 의식들을 자신이 주장하려는 요지에 맞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말한 것들로부터 이러한 의식들의 원형적인 의미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가 있으며, 한편, 그가 의식들을 부정확하게 사용한 것은 우리가 너무 교조적으로 흐르는 것을 피해야 함을 시사한다. (392.1)
 히브리서에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없음
 속죄일에 대한 저자의 설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생략은 그 중요한 아사셀 염소 의식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지상의 속죄일은 백성의 죄가 성소로부터 제거되고, 아사셀 염소가 그것을 지고 이스라엘 진영으로부터 영원히 떠남으로써 완결되었다. 레위기는 그 염소가 진영을 떠난 후에야 백성의 정결을 선언한다(참조 레 16:21, 22, 30). 따라서 속죄일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히브리서 저자가 아사셀 염소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속죄일의 이 중요한 요소에 대하여 완전히 침묵하였다. 왜일까? (392.2)
 만일 속죄일이 히브리서의 일차적인 주제라면 거기에는 또 하나의 중대한 생략이 있다. 나는 제20장에서 신정론—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레위기의 의식들과 다니엘 7, 8장의 공통적인 주요 주제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다니엘 7장에서 짐승 권력들과 작은 뿔은 패퇴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은 인자와 그의 성도에게 넘겨졌다. 다니엘 8장에서는 작은 뿔의 공격으로부터 성소가 “정결하게” 되고 그것의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된다. 레위기 16장에서, 속죄일은 악의 문제에 대하여 비슷한 해결책을 보여준다. 바로 악을 하나님 백성의 진영에서 제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원형적으로 우주 전체에서 악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392.3)
 하지만 우주에서 악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게 중요한데도 히브리서는 기본적으로 그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8-10장의 주제가 속죄일이라면, 아사셀 염소와 하나님이 악의 제거 계획이 그렇게 철저하게 간과된 것이 매우 이상하다. 속죄일은 그것을 그렇게 분명하게 예증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이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가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쓰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관심사는 새 언약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분의 하늘 성소 중보 사역을 통하여 그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저자에게 물을 수 있었다면, 그는 우주에서 악을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해 주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가־ 다음에 또 책을 쓸 때는 속죄일의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려고 했다고 우리에게 말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도 설명해 줄 것이다. (393.1)
 지상 성소에서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까지 백성의 죄가 정결하게 되지 않았다. 코르테스는 레위기에서 대제사장이 성소를 떠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과 히브리서의 묘사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의미심장한 관찰을 하였다. “만약 양심의 정결(9:14)을 성소의 정결(23절)에 관련시키는 속죄일의 표상을 히브리서가 따랐다면, 예수께서 아직 지성소(하늘)에서 나오시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는 문제가 된다∙∙∙ 몇몇 학자들은 히브리서 9:28에 묘사된 이 성소로부터 나오는 일이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있으며, 죄의 정결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죄의 정결이 벌써 완수되어 있다(히 10:10-13,18).”4) (393.2)
 코르테스는, 속죄일에 대한 구약의 설명에서, 대제사장이 아사셀 염소 의식을 포함하여, 그 날의 의식들을 다 완료하고 성소에서(지성소와 성소 칸을 모두 포함한) 나올 때까지 백성은 그들의 죄가 정결하게 되었다는 선고를 받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를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책 전체의 요지는 그 당시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 안에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께서 아직 하늘 성소에서 나오시지도 않았는데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양심이 죄에서 씻음을 받았다고 확증해 줄 수 있었는가? (394.1)
 나는 이 책의 22장에서 언급한 원칙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제공하는 영적인 혜택을 그분의 백성이 이미 받았다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확증하신다. 비록 그러한 영적인 혜택을 유효하게 하는 법적인 절차는 아직 미래에 남아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을 보장하는 십자가 희생이라는 법적 절차가 아직 수백 년이나 남은 미래에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사 44:22; 강조는 첨가된 것임)고 확증하실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독자들의 죄가 하늘 기록책에서 정결하게 되는(즉 도말되는) 조사심판의 법적 절차는 아직 수천 년이나 남은 미래의 일이지만, 그들의 양심이 이미 죄에서 정결하게 되었다고 그 저자는 그들에게 확언할 수 있었다. (394.2)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장래의 심판/속죄일
 재림교회는 속죄일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기 직전 하늘 성소에서 열릴 심판의 표상이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교리에 대한 비평 중의 하나는 히브리서가 그것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94.3)
 물론 속죄일을 마지막 때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히브리서의 저자보다 좀 더 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히브리서에 있는 두 구절은 그가 그것을 미래의 심판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보여준다. (394.4)
 첫째 구절은 히브리서 9:27이다. 25절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라고 말하였다. 이 본문은 지상 성소에서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26절에서 저자는 이것을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395.1)
 저자가 그리스도의 하늘 속죄일을 그분이 “자기를 제물로 드림”에 적용하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제칠일안식일재림교회는 지상의 속죄일에 바쳐진 희생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성취되었다는 데 전적으로 찬동한다. 우리가 마지막 때 심판의 형태로 성취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날의 나머지 행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저자가 다음 절에서 말한 것이다. 그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27절)라고 말하였다. 그 다음 28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였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그분이]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조사심판 직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어진다는 것이 바로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이다. (395.2)
 10장에는 장래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 있다. 24, 25절에서 저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썼다. 〈새제임스왕역〉의 번역자들이 (day)이라는 단어의 첫 자를 대문자로 쓴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해석자들의 대다수가 이 “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리처드 데이빗슨은 ‘그 날’(아람어로 요마[yomá])은 미쉬나에서 속죄일을 가리키는 술어이며(제2성전의 속죄일 의식을 설명하는 요마라는 제목의 장 전체를 참조하라), 여기 [히브리서 10:25]에서도 속죄일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5)라고 말한다. (395.3)
 데이빗슨은 계속해서, “그러한 결론은 이어지는 절들에 미래(히브리서 저자의 시점에서 볼 때)의 심판을 묘사된 것에 의하여 확증된다.”6)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절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하는 것은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 27). (3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