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우리는 1,260년/일이 프랑스 대혁명의 기간에 종료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때 우리는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대 사건을 차후에 좀더 상세히 취급하기로 약속했었다. (276.1)
 윌리암 H. 맥니일(William H. McNeil) 교수는 유명한 그의 대표적 저서인 “서양의 기원”(The Rise of the West)에서 유럽의 사상과 기술을 온 세계에 파급시킨 하나의 위대한 “서양의 폭발”에 대해 말하고 있다. (276.2)
 

옛날에 아담과 하와가 노아 홍수와 십자가 사건과 그리고 계시록 14장의 세 천사의 기별까지를 한눈에 내다보았듯이 세상 역사를 본다면 마지막 때는 참으로 짧은 기간인 것이다.
(277.1)
 멕니일 교수는 이 서양의 폭발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1789년에 시작한다고 하였다.13 수많은 다른 학자들도 이 주장에 일반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멕니일 교수는 말하기를, 프랑스의 대혁명이 발발하던 당시만하여도 유럽 문명의 지리적인 경계선을 꽤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1917년이∙∙∙되면서 사정은 예전과 달라졌다. 서양 역사가 세계의 역사로 바뀌어진 것이다.14 (277.2)
 맥니일 교수는 서양의 폭발을 “영토상의 팽창”, “산업주의”, “민주 혁명”이라는 세 가지 제목으로 분석했다. 이 세가지 국면은 모두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예언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277.3)
 1800년 대에 이루어진 대영제국의 성공은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저 광대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 보급시키고,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시킨 거대한 진행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또 1700년 대 후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으로 말미암아 증기 기관, 증기 기관차, 증기 기선(機船), 동력 인쇄기, 전신기, 신무기 등 서양의 선진 기술이 전세계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서양 열국이 새로운 산업주의에 힘입어 광대한 영토 확장에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대확장이 가능하였다. 이로서 케네드 스콧 라투켓(Kenneth Scott Latourette) 교수는 1800년 대를 그리스도교가 “그 넘치는 활력으로 유례없는 대확장”을 이룩한,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부를 수 있었다.15 (277.4)
 이와같이 서양의 산업주의와 서양의 팽창은 놀랍게도 1,260일의 끝에 관한 예언들을 성취시켰다. 다니엘 12장 4절은 이같은 예언적인 연대의 끝에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예언하였다. 또 요한도 동일한 연대의 끝에 한 음성이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계 1:11)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278.1)
 “지진”으로 나타난 혁명
 요한은 1,260 일의 끝에 발생할 또 하나의 현상을 묵시에서 보았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하나님의 “두 증인”“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죽일” 것이며 “저희 시체를 큰 성 길에” 방치할 터인데 “그 성은 영적으로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한다고 했다. 또 “그 성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일 반 후에”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갔다. 요한이 보니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계 11:3~13)리었다. (278.2)
 이제는 맥니일 교수가 “서양의 폭발”의 세번째 국면으로 묘사한 “민주 혁명”에 대해서, 그리고 좀더 직접적으로는 프랑스의 대혁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78.3)
 프랑스 대혁명은 예언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대혁명은 근래 민족주의의 정신을 진작시켰으며 근대의 국민 개병제(國民皆兵制)의 군제와 그에 따른 대규모의 병력 동원과 엄청난 살상 전쟁을 도입함으로써 그 어떤 요인보다도 세계사(世界史)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16 (278.4)
 프랑스의 대혁명으로서 프랑스는 민주주의와, 법 앞에서의 시민 평등권을 처음으로 펼 수 있게 되었으며 오래 끌어 온 국왕의 왕권 신수설(王權神受說)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코 그 하나만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었다. 이 혁명이 이루어지고 있던 거의 같은 시기에 화란, 아일랜드,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아메리카 등지에서도 다른 형태의 혁명이 일고 있었다(민주주의자(Democrat)란 낱말은 북미 식민지에서 유행하기 이전에 화란에서 발생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전파되었다). 같은 기간에 독일과 헝가리와 폴란드와 그리스에서도 혁명을 위한 선동이 준동하고 있었다. 서양 근대사(近代史)의 저명한 전문가인 프린스톤 대학의 R. R. 팔머(Palmer) 교수는 말하기를, “이러한 선동과 동란과 음모와 책동들이 하나의 위대한 운동의 부분”이었다고 했다.17 (278.5)
 팔머 교수는 몇 페이지 뒤에 또 대단히 적절한 고찰을 기술하고 있다. 이 혁명의 시대가 현대의 한 역사가에 의해 하나의 “지진”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18 요한도 요한계시록 11장 13절에서 “지진”에 관해 말했다. 낱말의 선택은 적절하였다. (278.6)
 악명 높은 프랑스 대혁명
 이 시대의 수많은 혁명 중에서도 프랑스 대혁명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 감정과 그 폭력성에 있어서 크게 두드러졌다. 그 피비린내 나는 공포 정치의 기간에는 수개월에 걸쳐 날마다 십여 명의 남녀들이 J. I 길로틴 박사가 고안하였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본딴 길로틴 단두대(斷頭臺)에 목이 잘려 죽어갔다. 어떤 날은 그 수효가 50~60명에 달하였는데 그 사람들 속에는 귀족들과 정치가들 뿐만 아니라 잡상인, 기술자, 날품팔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9 (278.7)
 공포 정치 시대에는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아무도 안전치 못했다. 혁명의 범위에 대해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누구나 반동으로 기소될 수 있었다. 합법적인 자기 변호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으며 간혹 형식상의 재판이 있었을 뿐이었다. (278.8)
 심지어 공포 정치의 장본인인(맥사말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tien Robespiere)/ 자신도 결국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279.1)
 이보다 더 끔찍한 일도 있었다. 폭도화한 파리(Paris) 시내의 군중이 국왕을 몰아내기 위하여 궁중으로 쳐들어갔을 때는 1,000명의 사람들이 밟히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이 사상자들 속에는 국왕의 명령에 의해 이미 무기를 버린 600 명의 스위스 수비병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9월 대학살” 때는, 군주의 파리의 여러 형무소들을 덥쳐 재소자들의 반수 이상을 죽였다. 여러 도시에 길로틴이라는 단두대가 설치되었다. 단두대로는 처형 속도가 너무 느리다 싶으면 반혁명 활동 혐으로 기소된 사람들을 백여 명씩 모아 놓고 대포를 쏘아 죽였다. 시체를 처리하는 문제가 골치거리였다. 그래서, 어떤 지방에서는 2,000여 명의 남녀 노소를 강제로 배에 실어 르와르 강에 가라앉게 했다. (279.2)
 희생자들의 수효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폭력에 너무나 친숙해진 나머지 마음이 둔감해진 까닭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오늘날의 절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현재 프랑스의 인구는 5천 4백 20만 정도인데, 프랑스 혁명 당시의 인구는 2천만 정도에 불과했다.
(279.3)
 전쟁은 대부분의 생명을 앗아 갔다. 민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서방 나라에서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국군을 탄생시켰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는 혁명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프랑스 국민의 외침은 근대 역사상 최초의 국민 총동원령 즉 레베 앙 마세(levee en masse)로 이어졌다. 즉각 30만 명의 열렬한 시민군이 모집되었다. 민주 국가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국가는 바로 그 자신의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279.4)